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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이테 Sep 11. 2024

어쩌다 보이스피싱

폐쇄공포증의 뿌리

[#중년의 은채 이야기]


서연이 쇼핑카트를 밀며 과일코너로 향하는데 부클점퍼 주머니에 넣어두었던 휴대전화가 부르르 렸다. 얼른 주머니에서 전화기를 꺼내보니 '조리실 은채여사님' 글자가 떴다.


"여보세요? 여사님, 어쩐 일이에요?"


서연의 목소리가 들리자, 은채의 움츠렸던 어깨가 서서히 내려갔다.

발효된 과일즙을 먹었을 때처럼 머리가 핑 돌고 말이 느려졌다.


"선생님, 부탁할게 생겼어요. 급한 건데... 말하기 좀 곤란한 부탁이에요."

"네. 무슨 일 생겼어요? 어디 아파요? 목소리가 안 좋네."

"그건 아니고. 아들이... 지금 교도소에 있대요."


은채의 뜬금없는 얘기에 서연은 주찬이를  마지막으로 본 기억을 떠올렸다.


"아들? 교도소요? 주찬이 어제 편의점 앞에서 봤는데? "

"주찬이 말고요... 실은.. 아들이 또 있어요. 일부러 속이려던 건 아니고... 첫 번째 결혼 때 낳은 아들이 둘 있어요."

"앗!...."


서연의 숨 고르는 소리 너머로 요란하게 폐점 마감세일을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은채는 서연이 외출 중이라는 것을 눈치챘지만 통화를 계속 이어나갔다.


"혼 두 번이 자랑거리도 아니고 말하고 싶지 않아서 다들 모르고 있어요. "

"아이고, 아들 소식에 많이 속상했겠다. 놀랐지요? "

"그러게. 뭘 어째야 할지 몰라서 전화했어요."

"그래요 그래요. 전화  잘했어요. 정은채 옆엔 노서연이 있잖아요. "

"그러게요. 일자무식인 내가 아는 게 있어야지. 어딜 가도 종이에 뭘 자꾸 쓰라는 것뿐이라..."


은채는 글자를 읽고 더구나 거기에 해당하는 뭔가를 써야 하는 것이 큰 부담이었다. 야학에서 한글 읽기는 깨우쳤지만 쓰기는 넘어야 할 산으로 남았다.


서연은 통화하면서 과일코너 자몽진열대로 카트를 밀고 갔다.


"음.. 어려운 얘길 꺼냈는데 오, 미안해요. 내 지금 밖이라 통화 집중이  어려운데. 이런 얘긴 집중해서 들어야 할 것 같아요.  오늘 토요일이잖아요? 낼은 관공서도 다 쉬고 지금 뭔가 서두른다고 상황이 급박하게 바뀌지는 않을 것 같아요. 전화보다는 우리 내일 만나서 얘기하면 어떨까요?"


은채에게는 돌발상황이지만 토요일 저녁에 급박하게 진행될 상황은 아니라는 서연의 말이 틀리지 않았다. 서연과 통화를 마치고 나자 저리던 은채의 차차 진정되었다. 서연이 어떤 도움을 주게 될지는 모르지만 이 일을 누군가와 공유하고 있다는 것 자체로도 은채 마음에 위안이 되었다. 그러나 서연에게 도움을 받으려 하니 한편으로는 마음이 복잡했다. 머릿속에서 자음과 모음이 둥둥 떠다니면서 글자 울렁증이 가라앉지 않았다.


은채는 온수매트의 컨트롤러 다이얼을 최대로 돌리고 아무렇게나 밀쳐둔 극세사 이불을 끌어당겨 덮고 누웠다. 안방에 침대가 있었지만 사용하지 않았다. 침대커버만 가끔 세탁해서 교체해 놓았다. 흡사 손님맞이를 위해 정돈해 놓은 듯한 호텔의 그것과 같은 상태였다. 여름이든 겨울이든 온수매트가 은채의 보금자리이며 취미공간이며 손님 접대공간이었고 주말 식사공간이었다.

은채의 생활공간 대부분은 거실의 온수매트였다. 은채에게는 폐쇄공포증이 있었기에 갇힌 공간이 아닌 툭 터진 공간에서 심리적 안정감을 느꼈다. 은채의 폐쇄 공포증 뿌리 또한 용제살이에서 비롯되었다.




구들장이 망가진 창고방에서 이틀이고 사흘이고 주인 할머니의 분이 풀릴 때까지 밖으로 나올 수 없었다. 격자무늬가 군데군데 부러진 채 경첩에서 금방이라도 이탈될 창호문을 밖에서 숟가락으로 걸어 잠갔다.  손잡이 밑으로는 어느 해 가을인지 알 수 없는 빛바랜 누름국화꽃잎이 장식으로 덧대어 있었다. 방문에 발라진 한지에 구멍이 숭숭 뚫려서 동지섣달 황소바람이 밤새도록 드나들었다. 그 구멍을 막으려고 새끼줄 꼬던 지푸라기를 말아서 구멍에 끼우면 한지가 쭉~하고 찢어져서 더 큰 구멍이 나곤 했다. 꺼내달라고 문을 두드리며 발버둥 쳤다. 감금이 반복될수록 그렇게 하면 감금 기간이 길어진다는 것을 알았다. 무슨 일이든 울타리 밖으로 알려지는 것을 싫어했다. 발버둥 치는 것이 심기에 불쏘시개가 된다는 것을 곧 깨달았다. 북향인 창고방은 한낮에도 어둠 컴컴했는데 짧게 사선으로 햇볕이 벽에 드는 시간이 있었다. 볕이 비쳐 들면 빨갛게 부어오른 손을 볕에 쪼이며 주물렀다. 잠깐 그러다 곧 짙은 어둠이 몰려오는 저녁이 되었다. 그렇게 쫄쫄 굶고 똥오줌 싸면서 동사 직전이면 용케도 그때를 알고 문을 열어주었다. 그렇게 굴복시켰다. 그런 주인 할머니에게 어린 은채가 할 수 있는 앙갚음이라는 것은 이것이었다.
 '망할 할망구. 망할 할망구. 호랑이나 물어갈 망할 할망구.'
분이 사그라들 때까지 읊조릴 뿐이었다.


그 시절이 떠오르면 은채는 집 안의 모든 문, 한겨울에도 창문까지 열어젖히고 베란다에 나가 찬 바람을 맞아야 했다. 추위를 끔찍이도 싫어하지만 얼굴이 달아오르고 온몸 구석구석이 화로가 된 듯 견딜 수 없었다.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던 무기력한 어린 은채가 원망스러웠다. 찬바람으로 창고방에 갇힌 은채를 난도질했다. 그렇게 분을 가라앉히고 나면 한기가 들어 온수매트 위로 극세사 이불을 뒤집어쓰고 설움의 딸꾹질을 하며 마음을 다독였다.


사춘기를 지나는 주찬은 은채의 이런 모습을 끔찍이 싫어했다. 사춘기라는 시기가 누굴 이해하기엔 이기적인 시기였으니 은채도 이런저런 이유를 주찬에게 말하지 않았다. 평소에도 온 집안의 문을 다 열어야 했으니 이 문제로 주찬과 자주 말다툼이 이어졌다. 은채와 주찬은 그때마다 이렇게 말하곤 했다.


"너는 엄마 마음을 이해 못 해."

"엄마는 내 마음 몰라요."  




베개도 없이 바닥에 머리를 대자 온수매트의 물 도는 소리가 졸졸졸 들렸다. 익숙한 소리를 듣자 머릿속 자음과 모음도 서서히 제 자리를 찾아 누웠다. 하얀 벽지에 시선을 두고 양각으로 새겨진 꽃무늬를 이쪽 끝에서 저쪽 끝까지 쭉 따라갔다. 반복해서 따라가 보면 어느새 마음이 가라앉았다. 휴대전화를 열어 너튜브의 재생목록에서 [Deep Pray Music] 음악을 찾았다. 용제살이를 향해 생각이 달음박질칠 때마다 은채 스스로를 다독이며 듣는 음악이었다. 블루투스 스피커로 음량을 확장시켰다.


은채는 이럴 때 주찬이가 집에 없어서 다행이라 생각했다. 주말에 아빠와 시간을 보내겠다고 아빠 집으로 갔다. 단 둘이 생활하다 밥 챙겨줄 식구가 없으니 덩달아 굶게 된다. 아침부터 제대로 챙겨 먹은 끼니가 없다는 생각이 들자 은채는 몸을 간신히 일으켰다. 글자 울렁증이 일지 않도록 조심히 이불을 걷어내고 막 뜨끈해진 온수매트의 조절기를 숫자 3으로 돌려놓았다.  

은채의 시선이 조절기에 머물렀다. 빨간불이 초록불로 바뀌었다. 필요에 따라 급할 땐 빨간불로 최대한 올리고 적당하다 싶으면 초록불이 들어오는 숫자로 다이얼만 조작하니 간편했다.

'살아가는 일도 조절기처럼 간단한 조작으로 금세 초록불이 되면 좋겠네'

초록 점멸등이 깜박이더니 곧 멈추고 초록색을 유지했다.


은채는 끙 소리를 내며 일어나 주방으로 갔다. 아침에 먹다 만 봄동 배추가 소쿠리에서 시들어가고 있었다. 냉장고에 넣어 두는 걸 깜빡했다. 곧바로 소쿠리를 수전 아래에 두고 물을 세차게 틀었다. 용제살이도 그렇게 세찬 물살로 다 씻어내었으면 좋으련만 똬리를 틀고 숨어있다가  기습적으로 나타나 뒤통수를 날리곤 했다. 

매일 먹는 순환기내과 처방 약을 먹으려면 뭐라도 끼니를 잇대어야 했다. 냉동실에서 찰떡  조각을 꺼냈다.

벽 쪽으로 붙여놓은 식탁의 한쪽 모서리에는 여러 가지 건강보조제로 가득 찬 상자가 놓여있었다.

'이것저것 너무 먹어서 숨 넘어갈 때 꼴딱꼴딱 바로 못 죽고 오래 고통스러운 거 아냐?'하고 우스갯소리를 하던 은채에게 떠넘기듯 판매된 것들이었다.  그것들 사이에서 처방약을 꺼내 들었다. 꼭 먹어야 하는 약이었다.




은채는 서연에게 어디서부터 어떻게 얘기를 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 고아로 어릴 때 더부살이를 했다는 것은 서연도 알고 있었다. 일이 생길 때마다 서연에게 도움을 요청했던 은채였지만 아픈 과거를 낱낱이 드러내고 싶지는 않았다. 그동안 서연에게 받았던 도움은 대체로 게 해결되는 것들이었다. 서연에게는 단순했고 은채에게는 해독해야 하는 암호 같은 일이었다. 서류의 글자만 봐도 그랬고 관공서에 전화를 하거나 아들 학교에서 무슨 일이 생겨도 긴장부터 되었다. 스마트폰으로 간단히 할 수 있는 일도 직접 발로 뛰며 일처리를 했었다.


은채는 상민이 얽힌 일이 흉악한 범죄라는 것을 알고 있다. TV뉴스를 통해서 보도되는 소식이나 주변 지인들의 말을 들어봐도 보이스 피싱은 중대 범죄였다. 어쩌다 보이스 피싱에 가담하게 되었는지, 아니면 속아서 모르고 합류한 일인지 알 수 없었다.


주일 일정을 어떻게 마무리했는지 모르게 간신히 집으로 돌아왔다. 차차오톡메시지가 떴다.

 '지금 집으로 출발했어요.' 서연이었다.

서연의 손에는 은채가 좋아하는 자몽꾸러미와 막 봉우리를 열 듯한 노란 튤립 세 송이 화분이 들려 있었다.


"부탁 들어주러 오는데 뭘 들고 왔어요. 그냥 오지."

" 자몽 좋아하잖아요. 꽃집 앞 지나가는데 이뻐서 안 가져올 수 없었어요. 꽃 들고 있으니 정은채랑 튤립 닮았네  닮았어. 하하"


은채는 눈물이 올라오려 하자 얼른 시선을 돌려 화분을 식탁에 려놓았다. 누군가 자신의 기호를 기억하고 챙기는 일은 좋아하는 음식들로만 정성껏 차려주는 1인 밥상을 받는 것처럼 따뜻했다.


"울 은채여사님 얼마나 놀랐어요? 소식 듣고 나도 내내 맘이 찡했어요."

"그러게 미안해요. 일이나 생겨야 선생님에게 전화를 하니, 염체 없네."

"어머, 우리 사이에 무슨 그런 말씀을. 도울 일 있으면 언제든 콜콜 노서연을 불러주세요. 편히 얘기해요. 그런데 주찬이 말고 다른 아들이 또 있었네요."

"주찬아빠랑 결혼 전에 한 번 결혼했었어요. " 무슨 복이 이리도 없는지 결혼 두 번 했어도 드레스 한 번 입어본 적 없고.. 한심하죠?"

"웬 한심? 어휴, 사는 게 내 맘대로 어디 되던가요? 다 그렇잖아요 뭐. 태어날 때 주어진 환경도 있고 여러 요인이 섞여 그리 된 것이지. 자책 말아요. 절대절대 !!"

"에구, 지난 세월 떠올리면 한숨밖에 안 나와요. 그 와중에도 목숨 부지하겠다고 내 새끼를 두고 집을 나왔으니 에미라고 말도 못 하지요. 내 새끼가 어떻게 사는지도 모르고 아등바등 살았으니.. 아유, 그 세월 지긋지긋해요."


서연은 이야기를 듣고 조용히 은채 옆으로 다가가 등을 쓸어주었다. 은채 몸에서 파스냄새가 풍겨왔다. 그림자 같은 파스냄새가 은채 삶의 갑옷이었다. 




"상민이 소식은 친구 아들에게 들은 건데요. 상민이 고1 때 얼핏 한 번 보고 그전에도 그 뒤에도 만난 적이 없어요. 무심한 엄마지요."

"일부러 그런 거 아니잖아요? 아휴. 얼마나 많이 맞았으면... 나쁜 인간들이 왜 이렇게 많아요. 일단은 살고 봐야지요. 어린 나이에 결혼해서 고생 참 많았네."


자라 온 환경이나 당시의 상황에서 은채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이었다. 보통의 사람이라면 헤쳐나가고 시도해 볼 만한 일도 어릴 때부터 그루밍범죄를 당해 온 은채에겐 꿈조차도 꾸지 못할 일이었다. 당사자 본인이 아니라면 어느 누구도 섣불리 판단하고 정죄할 수는 없다고 서연은 은채를 그렇게 이해했다.


"혹시, 상민이 상황 알아볼 만한 사람이 있을까요? "

"상민아빠나 새엄마가 알 텐데 상민아빠 무서워서 연락 못해요. 8년 전이었나, 친구 아들이랑 동창이라 건너 건너 상민이 전화번호를 알아냈어요. 목소리라도 듣고 싶어서 전화를 한 번 했었는데 그 일로 사달이 났어요. 그걸 상민아빠가 알고 난리를 쳤었어요. "

말하는 은채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어머, 그런 일이 있었구나."

"상민아빠가 나한테 전화한 것도 모자라 다니던 교회에까지 전화해서... 당장 죽이러 오겠다고 얼마나 윽박지르고 소리를 치던지 그때 놀란 거 생각하면... 아휴 절대로 상민아빠랑 연락 못해요."

"이런 나쁜... 어휴 내가 다 화가 나네. "

"상민이가 시골서 살다가 부전동으로 이사 나왔다는 말은 들었어요. 부전동 볼 일 있어 갔다가도 혹시라도 상민 아빠 만날까 봐 조마조마해요."

은채는 무릎을 세우고 앉았다가 밀쳐놓은 이불을 얼굴 근처까지 끌어당겨 이불에 얼굴을 묻었다. 한동안 그대로 말이 없었다. 서연은 얼른 일어나 식탁의 티슈를 은채 앞으로 가져다주었다.


"혹시 상민이 주민번호랑 알아요?"

"다른 건 몰라도 내 새끼 주민번호는 알지요."


은채는 안방으로 들어가더니 테두리가 낡은 다이어리를 한 권 꺼내왔다. 주황색 다이어리는 색이 많이 바랬는데 서부화재보험에서 판촉용으로 발행한 다이어리였다. 다이어리 뒷부분을 펼치니 거기에 삐뚤빼뚤한 볼펜글씨로 박상민 8*****-1******이라고 쓰여있고 그 밑으로는 박재민 9*****-1******이 쓰여있었다.

서연은 상민의 주민번호가 적혀 있는 다이어리의 페이지를 사진으로 남겨두었다. 앞으로 필요한 상황이 생길 것 같았다. 다이어리는 6년이나 지난 것이었지만 대부분 아무런 기록도 없는 공백상태였다.


" 아시다시피 보이스피싱이 사회적으로 심각하잖아요. 근데 어쩌다  중대범죄에 연루됐을까?"

"나쁜 죄라는 거 알지요. 나도 여러 번 그런 문자 받아봤어요. 이 놈의 자식 어쩌다가 그런 나쁜 일을 한 건지. 아휴.."

"그나저나 솔직히 우리가 상민이 한테 해 줄 수 있는 일이 많지는 않을 것 같은데... 어찌 된 영문인지 먼저 알면 좋겠는데요. 여사님은 어떻게 하고 싶은 거예요? "

"우선 아들 얼굴이나 좀 볼 수 있으면 좋겠고 그 뭐라더라? 감옥에 돈이랑 음식 넣어주는 거 그런 거도 좀 하고 싶고요."

"접견이랑 영치금요? 그럼요. 접견하러 가야지. 노서연이 있잖아요. 함께 갑시다."


 이틀 후 은채의 아파트 주차장에서 만나기로 했다.

전날 저녁 은채는 거실과 주방사이를 계속 왔다 갔다 했다. 아들을 만나면 어떤 이야기를 어떻게 전해야 할지, 아들이 접견을 신청하면 만나주기는 할지 도통 감을 잡을 수 없었다. 아들이 엄마 얼굴을 알아볼 수는 있을지. 엄마를 얼마나 원망하고 분노했을지 그런 아들 앞에 엄마라고 얼굴을 내미는 일이 가당키나 한지. 이런 생각이 엄습하자 당장이라도 서연에게 전화해서 교도소 방문을 취소하고 싶었다. 한편으로는 아들도 엄마를 보고 싶어 할 수 있다는 일말의 기대가 희미하게 절망을 비집고 올라왔다. 두 마음이 시시각각 나뉘었다. 오늘따라 벽시계의 초침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벌떡 일어나 벽시계를 떼서 안방에 집어넣었다.




화장실 거울 속 은채 얼굴이 푸석푸석했다. 18년 만에 만나는 아들 앞에 어떤 모습이 가장 적절한지 옷장 앞에서 한참 서성였다. 너무 화사하면 아들 없이도 행복하고 윤택하게 사는 냉랭한 엄마가 될까 봐, 너무 단조로운 차림이면 아들 두고 가출한 엄마가 사는 꼴이 겨우 그 정도였나 비칠까 봐. 긴 시간을 건너 아들을 마주하는 일은 설렘보다 두려움이었다.


서연은 차 안에서 마실 따끈한 차와 간식을 준비했다.

지난가을에 몇 개 따다가 생강과 함께 편으로 저며 꿀에 잰 모과차를 꺼냈다. 두 개의 텀블러에 모과차와 커피를 담아두고 호두파이와 은채가 좋아하는 자몽도 넉앤넉 통에 각각 담아놓았다.

TV 아침 뉴스에서는 2월 중순으로 접어들었으나 며칠째 지속되는 이상 고온 현상으로 3월 중순의 날씨라고 하였다. 남부지방 어디선가는 매화꽃이 활짝 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서연은 밤잠을 설쳤을 은채를 위해 대신 운전대를 잡기로 했다. 서연보다 은채가 월등히 잘하는 게 있다면 운전과 요리였다. 은채는 매사에 조심스럽고 소심했지만 운전만큼은 대범하게 했다. 이런 운전 솜씨를 알고 은채에게 무례한 무탁을 하는 은채 지인들 몇몇이 있었다. 그런 그들이 은채가 곤란한 일이 생길 때마다 항상 바쁜 것도 서연은 탐탁지 않았다.


Ta-맵을 켜보니 강주에 있는 교도소까지는 24.5km. 평일 아침 출근시간이라 그런지 서연이 어젯밤 모의주행 해 본 시간보다 10분 정도 더 소요되는 52분 남짓 걸리는 거리였다. 은채에게 생소하고 긴장되는 일정이라 서연은 느긋하게 마음의 여유를 갖고 일정을 진행하기로 했다. 운전석에 앉아 은채가 좋아할 만한 음악을 골랐다. 은채는 염평안[요게벳의 노래]를 즐겨 들었는데 노래를 들으면 마음이 평안해진다고 말했던 게 기억났다.


서연이 천천히 주차장을 빠져나와 어린이 제한구역을 지나 8차선 희망길로 접어들었다. 강주로 가는 길에 거치는 공단 쪽 길엔 출근 차들이 빽빽해서 평소 번이면 빠져나갈 신호가 번을 받아야 통과할 수 있었다. 동쪽을 향해 달리는 차 앞유리에 떠오르는 햇살이 강하게 부서졌다. 한참을 달려 27번 국도를 타고 내려갔다.


길 옆으로 미나리재배 하우스가 즐비했다. 미나리 하우스가 보이면 목적지가 근처에 있다는 말이다. 서연은 초행길이 걱정되어 어젯밤 Ta-맵에 강주교도소를 모의주행 해보고 주소를 검색해 보았었다. 봄을 앞두고 출하가 한창인지 미나리하우스 입구에 트럭을 대놓고 미나리를 상차하는 모습이 활기차보였다. 

목적지가 가까워지자 부쩍 말이 적어진 은채에게 서연은 일부러 톤을 높여 말을 건넸다.


"어머나, 미나리 출하하는걸 좀 봐요. 저걸 보니 봄은 음식에서부터 오는 것 같아요."

"그러네. 미나리김치 먹을 때가 되었네요."

"은채표 김치야 말해 뭐해요. 군침 도네. 쩝쩝."


목적지의 거리가 짧아질수록 은채의 얼굴에 긴장한 표정이 역력했다. 2km쯤 남았을 때 은채가 차장문을 열고 긴 호흡을 반복하며 가슴을 두드렸다. 서연은 갓길에 잠깐 차를 세웠다.


"괜찮아요?"

"아무래도 아들을 만날 용기가... 못 갈 것 같아요."

"저기 주유소 앞 삼거리에서 좌회전만 하면 바로 교도소 입구인데.. 다 왔으니까 일단 거기 주차해 놓고 천천히 생각해 보는 건 어때요?"


서연은 교도소 입구에 주차했다. 주차장 남쪽 끝에는 오르막 돌계단이 길게 나있었다. 돌계단 옆 화단에는 아침 햇살을 받은 산수유꽃망울이 가지마다 터지려 하고 있었다. 교도소에도 봄이 오고 있었다.


"접견 안 하고 싶으면 영치금이라도 넣어주면 되니까 서두르지 말고 천천히 생각해요."


서연은 먼저 차에서 내렸다. 주차장에 서서 교도소로 왔던 길을 눈으로 더듬어 내려갔다. 멀리 저지대에 솜사탕처럼 펼쳐진 미나리하우스와 농부의 분주한 움직임을 한동안 바라보았다.


마침내 은채도 검정 크로스백을 들고 차에서 내렸다. 은채와 서연은 산수유나무 옆 돌계단을 바라보았다. 돌계단 옆에는 민원실 이정표가 있었다.  둘은 동시에 가방을 열어 뭔가를 꺼냈다.




[에필로그]

은채는 용제살이에서 얻은 상흔이 몸과 마음에 깊이 각인되어 있었다. 그 흔적들은 유사한 상황의 요건들만 갖추어지면 언제든지 불쑥불쑥 튀어나와 방어기제로 작용했다.

용제의 창고방에 갇혔던 경험은 좁은 장소, 밀폐된 공간에서 공포를 느끼는 상징화된 방어기제였다.

주인 할머니는 그녀의 인생에 지울 수 없는 공포증을 그렇게 쉽게 새겨주었다. 그리고 은채가 사과받을 기회도 영영 가져가 버렸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차에 탔을 때는 폐쇄공포증을 느끼지 않는 것이다. 운전은 그녀가 자신 있게 할 수 있는 사회활동 중 비중을 크게 차지하는 부분으로 타고난 방향감각이 적잖이 도움이 되었다. 이 외에도 그녀에게 더 많은 소질이 있을 수 있는데 소질 개발할 기회가 그동안 없었던 것은 참 안타까운 일이다.

지금은 너튜브를 보고 독학으로 오카리나를 배우기 시작했다. 아무도 없는 예배당에서 혼자 이른 시간에 와서 연습하는 그녀의 모습이 고왔다. 양해를 구하고 뒷모습만 살짝 카메라에 담았다. 더디더라도 배우는 기쁨을 알아가면 좋겠다. 그녀가 좋아하는 [요게벳의 노래]를 연주하는 모습을 나는 그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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