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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이테 Sep 25. 2024

대설주의보

아들과 엄마의 해후는 그렇게

[#중년의 은채 이야기]


얼마 지나지 않아 서연과 은채를 향해 낯선 남자가 다가왔다. 볼살이 심술보같이 늘어진 데다 덕지덕지 기름을 발라 고정시킨 까만 염색모가 고집스러운 인상을 풍기는 사내였다. 용제살이때 대학교에 다니던 청년이 중년 남자가 되어 은채 앞에 서 있었다.


"경이, 맞지? 오랜만이네."

"네. 삼촌 잘 지내셨지요?"

용제살이 주인집 막둥이 아들과 은채는 그렇게 빛바랜 세월을 건너 만났다.


"친구랑 같이 왔어요. 제 친구예요."

"처음 뵙겠습니다."

어깨에 무궁화 두 개가 붙어있는 교도관이 명함을 내밀며 인사했다.

교감 윤석.

"네. 안녕하세요? 두 분 얘기 나눌동안 저는 차에서 기다릴까요?" 

"쌤, 함께 가요."

은채가 서연의 손을 잡아끌었다. 혼자 시험장에 들어가는 학생의 초조함이 은채의 얼굴에 일순간 스쳐갔다. 석진을 만난 후부터 목소리가 바람에 나부끼는 깃발 같았다. 서연은 자꾸 움츠러드는 은채의 어깨를 뒤에서 서 너번 주물러주었다. 은채의 손에서 꾸러미를 옮겨 들고 한 손으로는 은채의 손을 슬그머니 쥐었다. 은채의 손에 땀이 배어있었다.


석진이 안내하는 길을 사이에 두고 마른 잔디가 양쪽으로 넓게 깔려 있었다. 계절상 풀이 돋아날 시기는 아니었으나 여름날이라 해도 풀 한 포기 없이 관리되었을 정갈함이 빽빽한 잔디였다. 그 풍경이 은채의 마음을 조여왔다. 짧은 호흡이 가빠지는 듯해서 은채는 서연과 잡았던 손을 빼내어 목에 두른 머플러를 느슨하게 풀었다. 잔디밭과 막둥이 삼촌 석진. 그 조합이 은채를 순식간에 용제살이로 데리고 갔다.




주인집 큰 아들 석환이 결혼을 해서 옆동네 만월리에 양옥집을 지었다. 동네 또래들이 가방을 메고 국민학교에 가 있는 동안 은채는 인부들의 점심밥과 오전, 오후 새참을 내놓아야 했다. 집 짓는 터 한쪽에 양철판을 얼기설기 얹어서 간이 부엌을 만들어 주었다. 주인 할머니는 그날 필요한 식재료를 아침에 갖다 주는 것과 점심밥이 다 되었는지 확인하러 올뿐이었다. 어린 손이 혼자 벅찼지만 그래도 갓 지은 밥 한 공기를 먹을 수 있었다. 새참이라도 남게 되길 바랐지만 손에 저울이 달린 건지 주인 할머니는 딱 맞게 재료를 갖다 줬기에 그런 날은 드물었다. 소나기 쏟아지는 날에는 양철판 위로 투두둑 투두둑 떨어지는  빗소리가 좋았다. 어석술로 감자를 긁으며 비를 긋는 시간이 그렇게 평화로웠다. 봄에 시작된 공사는 추석을 앞두고 끝이 났다.
다른 집들은 마당에 텃밭을 일구었지만 석환은 아내인 서울새댁을 위해 잔디를 심고 긴 나무의자를 마당에 갖다 놓았다. 잔디관리가 은채 몫이 되었다. 5월만 되어도 잔디 사이에 괭이풀, 질경이, 조뱅이풀이 넘쳐났다. 조금만 잡풀이 보여도 석환은 은채를 불러댔다. 뜨거운 햇살에 쪼그리고 앉아있으니 오금에서 흘러나온 땀이 허벅지와 종아리  사이에 막혀 흘러내리질 못했다. 오금에 땀띠꽃이 피었다. 장맛비를 맞은 풀은 잔디보다 훨씬 빨리 자랐다. 풀이 뽑히면서 튀어 오르는 흙과 땀이 눈으로 들어가 눈은 빨갛게 충혈되었다.  새벽부터 시작된 일과는 뜨거운 햇살 아래에서도 졸음을 불렀다. 한참 졸다보면 석환이 커다란 손으로  은채의 등짝을 후려댔다. 그러는 바람에 손에 쥔 낫이 흔들려 고무신을 뚫고 들어와 상처가 크게 났다. 억울함이 촘촘한 돌담처럼 쌓였다. 잔디를 다 쥐어뜯어내고 싶었다. 땡볕에 기진맥진하도록 잔디를 다듬고 주인집으로 돌아가면  어스름 저녁이 되었다. 어디서 뭘 하다 왔느냐는 주인 할머니의 욕지거리가 기다리고 있었다.


잔디밭에 쏟아지던 숨 막히는 땡볕과 지열이 순식간에 기억의 이편으로 건너왔다. 은채의 얼굴이 화끈하게 달아올랐다. 목에서 재빨리 머플러를 풀어냈다. 심호흡을 깊게 해도 이마에서 땀이 흘러내렸다. 다습한 훈풍이 얼굴에 끈적이게 닿아 하늘을 올려보았다. 먹구름이 북쪽에서부터 낮게 드리워지고 있었다.




"아들이 2518번, 박상민이라 했던가? 음... 1심 판결에 불복해서 항소를 신청한 상태야. 워낙 보이스피싱이 중대범죄이고 도주의 우려가 있으니 구속수사는 기본이었고 바로 검찰로 송치됐어."

은채는 석진의 말에 뭐라고 대꾸해야 할지 몰라 머뭇거렸다. 선생님 앞에 잘못한 학생의 학부모처럼 앉아 있을 뿐이었다.

서연이 궁금한 점을 물었다.

"혹시 재판 진행에 따라 수감되는 교도소가 바뀔 수도 있는 건가요?"

"그건 말씀드리기 곤란합니다. "

"사실 상민이가 아들이긴 하지만 오랫동안 서로 만나지 못한 상태이기 때문에 상민이의 재판진행 결과를 엄마가 전혀 모르고 있어요. 상민이 아빠에게 재판 결과를 들을 수 있는 상황도 아니고요. 사건이 어떻게 발생되었고 보이스피싱에 어떻게 연루되었는지도 파악이 안 되었고요. 그러니 엄마로서 얼마나 답답하겠어요. 이 부분에 대해서 어떻게 얘기를 좀 들을 수 있을까 기대하고 왔어요. 이게 솔직한 심정이에요."


서연이 느낀 석진의 태도는 방어적이고 소극적이었다. 낯선 서연을 경계해서 그런지, 직업정신이 투철해서 그런지 아니면 이 일에 더 이상 엮이고 싶지 않은 마음에서였는지는 알 수 없었다.  팀장인 그의 계급 교감은 9급으로 임용된 직원들의 실질적인 최종 목표라고 볼 수 있다. 이대로 순탄하게 정년퇴임을 하자면 사소한 결점도 남기고 싶지 않은 석진의 마음이 이해가 되면서도 서연은 화가 났다. 은채가 용제살이에서 당한 학대를 석진도 한 집에 살면서 목도했다면 사무적인 태도로 일관해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은채는 석진에게 분명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거라고 설레발을 쳤었다. 그러나 은채의 예측은 빗나갔다.

민원실 돌계단 앞에서 석진은 점퍼 안주머니에서 봉투 한 개를 꺼내 은채에게 건넸다. 그리고 정중하게 인사를 하고 되돌아갔다. 인사하는 석진의 머리카락은 한 올도 흐트러지지 않았다. 봉투엔 서연이 상민 영치금으로 보태라고 건넨 만큼의 돈이 들어있었다. 기껏 그것이 용제살이 어린 은채에 대한 보상 같아서 서연은 봉투를 쓰레기통에 던져버리고 싶었다. 그러나 은채는 봉투를 외투 주머니에 넣었다. 얄팍한 봉투가 은채의 자존심인 것 같아 서연은 분했지만 은채가 불편하지 않도록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렸다. 어쩌면 은채에게는 아무짝에나 쓸모없는 자존심보다 얄팍한 봉투가 더 간절할 수 있다. 서연은 은채가 가져온 차 안의 식혜가 생각났다. 식혜가 담긴 유리병까지 먹어 치울 것 같은 갈증이 일었다.  

기대하고 찾아간 우물이 말라버린 격이었다. 마른 우물에 두레박 던져봐야 헛일이었다. 석진에게 더 이상의 정보는 기대하기 어려웠다. 다른 우물을 찾아내는 수밖에. 서연은 혹시 상민이 죄를 혼자서 뒤집어쓴 억울한 상황은 아닌지 궁금했고 억울한 상황이라면 어떻게든 도움을 주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서연의 마음과 달리 은채는 조심스럽고 두려웠다.


"내가 뭐 할 수 있는 일이 얼마나 있겠어요? 가진 것도 없고 일자무식이라 아무것도 모르겠고 또 상민이 아빠가 있으니까. 내가 나설 수 있는 입장도 안 되는 거 같고. 그냥 오늘처럼 우리 상민이 면회나 다녀오고 영치금이나 조금씩 부쳐주면서 사부작사부작 그렇게 소식 듣고 살았으면 좋겠어요."


서연은 은채의 말에 동의 하기 어려웠다. 어릴 때 헤어졌다 이제 만났으니 그동안 막혔던 사랑의 물꼬를 이제라도 터야 하고 만약 상민이 억울한 일을 당했다면 손을 쓸 수 있을 때 써야 하는 것 아닌가 싶었다.


"이런 말 섭섭하게 들릴지도 모르겠어요. 그런데 좀 해야겠어요. 법적으로 친권이나 양육권이 없어도 상민이에게는 엄마잖아요. 그동안 가출이 전남편의 모함에서 비롯되었다 해도 18년 동안 떨어져 살아온 건 사실이에요. 엄마가 바람이 나서 나갔다고 상민이가 알고 있지만 당시 어린아이에겐 가출 이유보다 더 중요한 게 엄마의 가출자체, 엄마의 부재였을 거예요. 죽음으로 엄마를 잃은 것과는 또 다른 아픔이에요. 엄마가 어딘가에 살아 있을 텐데 나를 보러 오지 않는다는 그 상실감. 엄마가 너무 보고 싶은데 엄마가 필요한데 끝내 오지 않아서 느꼈을 좌절감. 그런 상처들을 차곡차곡 쌓으면서 자랐을 거란 말이에요. 앞으로 가출 이유에 대한 오해가 풀린다 해도 엄마가 왜 아들을 한 번도 찾으러 오지 않았는지에 대한 서운함이나 애증이 남을 거예요. 갑자기 나타난 엄마가 보고 싶기도 했겠지만 밉고 야속한 마음도 분명 있을 거예요. 어쩌면 나를 버리고 간 엄마에게 앙갚음을 하고 싶은 마음이 생길 수도 있는 거고요. 그건 단번에 짧은 시간으론 다 풀기 힘들어요. 그렇다면 늦었지만 지금부터라도 서서히 엉킨 실타래를 풀어야지요. 접견, 영치금 이런 것도 좋아요. 그렇지만 거기에서 멈추지 말고 조금 더 적극적으로 나서야 하지 않을까요? 1심에 불복해서 항소했다는 것은 뭔가 상민에게 억울한 부분이 있다는 거 아니겠어요? 상황이 어떻게 진행되고 어떤 내용인지 자세히 알 수 없으니 저도 좀 답답하네요. 항소까지 갔는데도 1심과 별다를 것 없는 주장만 하게 되면 재판부에서는 죄를 뉘우치지 않는다고 판단하게 되고 오히려 더 좋지 않은 결과가 나올 수 있어요. 지금이 아주 중요한 시기인 것 같아요. 물론 국선변호인인지 사선변호인인지 변호인이 알아서 준비하겠지만. 만약 상민이가 억울한 상황이라면 어떻게든 도와야지요. 이런 상황이 답답해서 얘기하는 거예요. 아들을 도우려면 방법은 얼마든지 있을 거예요. 내가 도울 일이 있다면 힘을 보탤게요."


서연이 쏟아놓은 말 자체가 은채에게는 세상 밖 꿈도 꾸지 못할 일처럼 요원하게 느껴졌다. 그동안 살아온  환경에서 그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은채를 둘러싼 두려움을 깨뜨리는 일은 어쩌면 만년설을 깨뜨리는 일보다 어려울지도 모르겠다고 서연은 생각했다. 그럼에도 한 마디 덧붙였다.


"친한 선배언니 아들이 작년에 변호사시험에 합격해서 변호사로 일하고 있어요. 혹시 변호사 도움이 필요하면 연결해 줄게요. 형사전문변호사예요."


은채는 서연의 말을 알아들었는지 어쨌는지 그 말에 아무런 대답 없이 돌계단을 마저 내려가면서 혼잣말하듯 했다.


" 내 어릴 때 이름이 경이었어요. 주인 할머니가 어린 내게 자주 했던 말이 뭔지 알아요? 이런 경을 칠 이 말이에요. 그렇게 나를 경이라고 부르더니 그게 용제에서는 이름이 되어버렸어요."


멀리 미나리하우스 단지에서는 여전히 출하하느라 쉴 새 없이 트럭이 드나들었다. 계단을 내려가는 은채의 스웨이드 로퍼에 빗방울이 떨어져 진한 브라운의 작은 점들이 번져갔다.

서연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낮게 드리워진 구름이 마침내 훈풍에 가랑비를 흩뿌리기 시작했다.




그 뒤로 서연과 은채는 두 번의 접견을 더 시도했으나 상민은 다시 접견을 거부했다. 상민이 은채를 만나고 혼란스러울 것이라 서연은 예상했다. 은채가 어떤 아픔으로 어떻게 세월을 지나왔는지 알 수 없는 상민으로서는 은채의 지금 모습에 배신감을 느꼈을지도 모를 일이다.  어릴 때 바람이 나서 집 나간 엄마와의 애증, 그런 엄마를 범죄자가 되어 만난 상황. 두 개의 교차점에 선 아들이 엄마를 만나는 데는 대단한 용기가 필요할 거라는 말로 서연은 접견 실패한 은채를 위로했다.

접견 거부를 맞닥뜨릴 때마다 은채는 깊은 침묵 속으로 빠져들었다. 동행한 서연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운전대를 붙잡고 그때마다 위로가 될 만한 음악을 고르고 집으로 은채를 데려가 억지로라도 밥을 먹이는 것뿐이었다. 엄마와 아들 사이에 헝클어진 오해의 실타래는 실마리도 보이지 않은 채 굳어져 세월의 편린 속에 던져져 있었다.


2월 말이 되자 은채는 새 학기 준비로 바빠졌다. 사립학교에는 기숙사 생활을 하는 특수반이 있어서 은채로서는 3월 한 달 동안 토요일 오전 근무가 불가피했다. 간신히 현정 아들 준수의 결혼식 날짜만 근무를 빼놓은 상태였다.

2월 넷째 토요일, 꽃샘추위가 있을 거라 했다. 뉴스의 기상캐스터는 큰 눈이 예상되니 빙판길 주의와 방한을 위해 겨울 외투를 다시 꺼내라고 렸다.


서연과 은채는 다시 접견을 신청하고 민원실에 앉아 대기했다. 은채는 추위를 싫어하면서도 접견을 올 때마다 화사한 차림을 했다. 발등 실루엣이 비치는 검정 스타킹 속 발이 리본장식 구두 안에서 추워 보였다. 서연은 주머니에서 핫팩을 꺼내 은채의 발등 위에 올려놓았다. 보온시간이 오래 유지되는 핫팩은 알맞게 따끈했다.

은채는 두 번의 접견 실패에도 불구하고 기대를 놓지 않았다. 서연도 적극적으로 접견신청을 이끌어나갔다.

지난번 접견실패로 서연은 은채를 대신해 상민에게 편지를 남겼다. 단순히 글자대필뿐 아니라 은채는 편지내용도 임의대로 작성해 주기를 부탁했다. 그 편지를 받고 마음이 움직였다면 접견이 이루어질 가능성이 있다고 서연은 저울질했다.


핫팩이 식어갈 즈음 기다리던 이름이 방송으로 불렸다. 은채는 함박웃음을 머금고 접견장 가는 문으로 이동했다. 서연도 상민을 만나고 싶었다. 이 나이쯤 되니 내 아들, 네 아들 구분이 모호해지고 군복 입은 군인만 봐도 모두 아들 같았다. 상민이 비록 중범죄를 저지른 범법자였지만 엄마 없이 살아온 시간에 대해 위로의 말을 직접 전하고 싶었다. 범죄에 눌린 상민의 쓰디쓴 인생 전부를 부인하고 싶지는 않았다.

이번 접견이 잘 이루어지면 다음 접견 때는 꼭 은채와 함께 접견을 하리라 마음먹었다.


은채는 지난번 보다 접견을 빨리 마무리하고 돌아왔다. 먹물같은 얼굴로 서연에게 나가자는 손짓을 하고 민원실 밖을 향했다. 은채는 계단을 다 내려와서 산수유꽃이 활짝 핀 화단 조경석위에 털썩 주저앉았다. 눈이 날려 노란 산수유 꽃을 덮었다. 은채의 얼굴에도 눈발이 몰아쳤다. 눈물인지 눈 녹은 물인지 알 수 없는 물이 눈꼬리에 맺혔다.


"상민이가 이제 그만 오래요. 두 번이나 거부했는데 계속 면회 신청해서 오늘은 얼굴 보고 직접 말하려고 나왔대요. 말 안 하면 계속 신청할 것 같아서. 안 만나고 싶으니까 더 이상  오지 말라고. 그동안에도 엄마 없이 살아왔는데 뭐 이젠 다 큰 성인인데 엄마가 뭔 소용이냐고.  앞으로도 남남으로 살고 싶다고. 여기 다시 오면 그땐 아빠한테 얘기해야겠대요."


흑백신문 같은 은채의 얼굴에 점점 더 눈발이 거세게 불었다. 시선을 멀리 미나리하우스단지 쪽을 향한 은채의 눈은 누에나방이 빠져나간 텅 빈 고치 같았다. 은채는 결승점이 없는 트랙을 끝없이 돌고 도는 것 같은 어지러움을 느껴 속이 울렁거렸다. 서연은 접견하러 다녔던 은채의 시간들이 모두 부정당하는 것 같아서 허탈했다. 은채가 이번 일로 느낄 상실을 어찌 감당할지 걱정이 앞섰다. 그러나 늘 그랬던 것처럼 그것은 오롯이 은채 본인의 몫이 될 수밖에 없었다. 해감하듯 시간 속에 토해놓아야 할 또 하나의 아픔이었다.




은채의 눈에 산수유나무 옆으로 간신히 땅을 뚫고 올라오기 시작한 수선화 싹이 보였다. 꽃샘추위가 며칠 이어지면서 기온이 영하로 떨어진다는데 은채는 수선화 싹이 걱정되었다. 조경석에서 일어나 싹 앞에 쪼그리고 앉아 눈을 털어주었다. 꽁꽁 얼었던 땅을 뚫고 올라오느라 안간힘을 썼을 테지만 그러느라 내공이 생겼을 것이니 그것으로 이 꽃샘추위 따위는 문제없을 거라고 수선화싹을 마음으로 지지했다.  꽃을 피우라고.


돌아오는 길에 눈발이 점차 굵어졌다. 서연은 이번에는 자신이 좋아하는 노래를 골랐다. Josh Groban의 앨범에서 [ Ave Maria] 4번 트랙을 눌렀다. 은채도 말없이 차창 풍경을 바라보았다. 노래의 선율이 눈발 날리는 풍경과 조화를 이루었다. 서연은 눈길 운전에 긴장을 늦추지 않으면서도 은채의 감정에 촉을 세웠다.


그동안 무심코 지나쳤던 27번 국도변의 푸른 보리밭이 은채의 눈에 들어왔다. 그 보리밭은 멀리 용제가 속한 만경평야로 이어져 있었다. 눈발이 하염없이 날리는 보리밭이 경이로울 만큼 아름다웠다. 은채는 풍경에 이끌려 갓길에 정차해 줄 것을 서연에게 부탁했다. 서연은 27번 국도에서 보리밭 사이 도로로 핸들을 꺾어 내려갔다.

이 지역은 보리를 주로 한우의 먹이로 재배하는 총체보리 재배지였다.


은채는 차에서 내려 주인이 누군지도 모르는 보리밭 가운데로 성큼성큼 들어갔다. 땅이 얼어붙어서 단단했다. 언 땅 아래로 뿌리를 내린 보리는 영하의 추위에도 푸른색을 잃지 않았다. 요란한 소리를 내며 들판을 휘도는 바람이 은채의 긴 머리카락을 흩날렸다. 은채가 갑자기 팔을 양옆으로 들어 올리더니 크게 원을 그리며 뱅글뱅글 돌기 시작했다. 어린아이들이 비행기 놀이 하는 제스처였다. 차 안에 앉아있던 서연도 은채의 심상치 않은 행동에 긴장이 되어 무릎담요를 꺼내 들고 밖으로 나왔다. 은채가 달음박질하는 대로 흰 눈 위 푸른 동그라미는 멈출 줄 모르고 그려졌다. 은채 발을 옮긴 곳마다 밟힌 보리가 이울다가 스러지기를 반복했다. 서연은 무릎담요를 펼쳐서 은채에게 망토처럼 둘러주었다.


"어릴 때 하늘에 비행기가 날면 일하다가도 비행기가 안 보일 때까지 쳐다봤어요. 얼마나 높이 날면 저렇게 작게 보일까... 비행기같이 용제에서 멀리 떠나고 싶었어요."


푸른 보리밭 위에 눈발은 더욱 거세졌다.

은채는 굵어진 눈발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동그라미를 그리고 또 그리며 달렸다. 서연은 은채를 기다리느라 눈사람처럼 우두커니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굵은 눈이 은채의 발등에 닿자마자 물이 되어 발등을 타고 구두 안으로 고여 들었다. 어느새 구두는 눈 녹은 물로 눅눅히 젖어들었다. 신발 안으로 스며든 물이 발을 옮길 때마다 찌꺽찌꺽 소리를 냈다. 신발에 물이 차오르는 늘한 감촉은 잠자는 기억들을 헤집고 과거 어느 날로 조용히 은채를 이끌고 갔다.


그날 밤, 은채는 용제살이 첫날 햇살이 눈부시게 하얀 4월의 그 집 앞마당에 서 있었다.

오줌보가 터져 고무신 속으로 줄줄줄 오줌이 스며든 채로.




[에필로그]

꿈과 같은 접견 일정들이 진행되었다. 살면서 멀리 해야 할 곳 중 한 곳이 교도소 아니겠나.

지역에 있는 교도소세트장도 한 번 가본 적 없던 나나 은채나 교정시설은 처음이었지만 죄를 짓지 않은 사람에게 그곳은 관공서 곳에 불과했다.

죄를 짓지 않았다고 하니 어폐가 있는 말이다. 이 세상에 죄를 짓지 않은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으니까.

어쨌든 법적 구속을 받지 않는 신분으로 교정시설을 드나들 일이 없었던 나는 생경한 경험이었다.

교도소 미션을 진행하면서 기대와 설렘, 낙심과 절망사이를 오갔다. 담담한 듯했던 은채도 아들에게 더 이상 만나지 않겠다는 말을 들었던 그날엔 많이 힘들어했다.


오늘 본문 스토리가 진행됐던 이틀 후 은채는 상민아빠에게 다시 전화로 어마어마한 폭언을 들어야 했다. 폭언의 원인은 상민의 면회였다. 상민이 결국 아빠에게 면회사실을 털어놓았던 것이다.

은채가 과거의 트라우마를 이겨내기는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다.

그 한통의 전화로 은채는 상민의 일을 포기한 듯 보였다. 은채가 얼마나 이해할지 모르는 본문의 그 문장들을 내뱉으면서 억울할지 모르는 아들을 위해, 사랑을 주지 못했던 상민을 위해 적극적으로 나서야 하지 않겠냐는 나의 설득은 무용지물이 되고 말았다. 은채는 상민의 접견을 중단했다. 상민아빠에게 이팔청춘 나이 때부터 폭행을 당한 은채트라우마는 짐작보다 훨씬 깊고 크다는 것을 그때 알았다. 안타깝지만 나그녀를 이상 재촉하지 않고 기다리기로 했다.



https://youtu.be/2k7jUTHGsTU?si=F_aE4sZ6oj-i6jx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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