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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이테 Oct 02. 2024

맞지 않는 옷

유년의 은채 이야기-용제살이 1

아우성을 치면서 참았던 것들이 터져나왔다. 빈틈이라고는 바늘구멍 하나도 남기지 않을 만큼 억눌렀던 마음을 아이는 울음으로 토해냈다. 팽팽하던 것이 뚝 끊어지면서 쓸모없게 된 허탈감. 그것을 털어내기에는 가만히 서서 우는게 성에 차지 않았다. 마당에 털썩 주저앉아 발을 버둥거리고 울었다. 그 집에서 닳아빠지게 될 유년의 거친 시간을 울음으로 예고했다.


"이런 경을 칠! 재수 없게 가시내가 울고 그려? 오메, 시끄러라 뚝 못 그쳐?"

부엌으로 들어가려던 늙수그레 여자는 발을 한 번 쿵 하고 구르면서 눈을 부라렸다. 발길을 돌려 성큼성큼 장독대로 가더니 가장 큰 옹기 뚜껑을 열었다. 소금 항아리였다. 소금을 주발에 담아 아이에게 연거푸 뿌렸다.

"더부살이 허러 왔시믄 눈치껏 혀야지 온 날부터 울고 그려. 재수 없게 "

늙수그레 여자가 뿌린 소금과 걸걸한 목소리가 함께 머무려 져서 순식간에 아이의 온몸으로 쏟아졌다.

마당을 기웃거리던 암탉과 병아리들이 땅에 흩어진 소금을 보고 아이 곁으로 달려들었다. 소금 떨어진 곳을 마구 쪼아댔다. 놀란 아이가 벌떡 일어나 병아리를 피해 달아났다.

여자는 우물가로 가서 마중물을 한 바가지 붓고 펌프질을 해댔다. 집안을 거침없이 휘젓고 다니는 모양이 늙수그레 여자가 주인인 듯했다.

주인 여자는 물을 양동이에 콸콸콸 받아 손을 씻고 나서 손 씻은 물을 마당에 쫙 뿌렸다. 그 바람에 소금을 쪼아대던 암탉병아리들이 쪼르르 달아나버렸다. 

애초에 거기 우는 아이가 없었던 것처럼 주인 여자는 아랑곳 하지 않고 집 뒤쪽으로 가버렸다.

'여기 오면 밥도 많이 먹을 수 있고 학교도 보내준다고 했는데... '

주인여자가 사라지자 아이는 마음놓고 부글부글 분노를 일으켰다. 하얗게 햇볕이 쏟아지는 마당에 울음으로 분칠을 했다. 세상은 아이에게 다정하지 않았다. 울지 않으면 아무도 관심을 두지 않았다. 울음소리는 어른들을 거슬리게 했다. 질긴 울음 뒤끝에는 욕설이 날아들면서 머리를 쥐어 박히거나 등짝을 얻어맞아야 했다. 다된 밥에 재뿌리듯 울음이 일을 그르칠 때도 많았다. 이번에도 밥을 얻어먹지 못한 탓이 울음이라 생각했다. 울음은 아이가 가진 방패이자 무기였다. 그것 외엔 아이가 가진 것이나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집 뒤쪽으로 사라진 주인 여자는 무엇을 하는지 기척이 없었다.

아이는 울음을 그치벌떡 일어나 옷에 묻은 소금을 털어냈다. 아이가 있던 자리 주변으로 소금이 쌀알처럼 하얗게 떨어졌다. 얼굴에 묻은 소금을 털어 입에 넣었다. 짜고 쓴 맛에 몸서리가 쳐졌다. 얼른 우물가로 가서 양동이 물을 한 바가지 떠서 발칵발칵 마셨다. 꽃무늬가 희미해진 고무신에서 걸을 때마다 찌꺽찌꺽 소리가 났다. 젖은 양말과 신발을 양동이 옆에 벗어 놓았다. 늘 그랬던 것처럼 맨발이 되니 가뿐했다. 화난 이모를 피해 달아날 때도 맨발로 달려야 잡히지 않았다. 신발을 찾아신다가 곧장 머리채를 잡혔으니 나중에는 맨발로 뛰었다. 깨진 유리조각을 밟아 발을 다칠때도 있었지만 그렇지 않을 때가 더 많았다.


양동이에 담긴 물에 파란 하늘이 비쳤다. 양동이를 흔들자 하늘이 울렁울렁 움직였다. 물결이 멈추면 하늘도 멈췄다. 복도 끝방에 살 때는 해볼 수 없는 놀이였다. 물 담긴 양동이에 비치는 것은 페인트가 칠해졌던 흔적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곰팡이 핀 천장이었다. 아이가 양동이를 흔드는대로 물 속 하늘이 흔들리는게 재미있었다. 지금까지 이모들이 하라는 대로 따라할 뿐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고작 낡은 인형의 팔다리와 고개를 돌려 조작하는 놀이가 전부였다. 아이는 내맘대로 놀이에 빠져들었다. 


하늘이 비쳐야 할 양동이에 낯선 얼굴이 훅 들어왔다. 화들짝 놀라 고개를 들어보았다. 책가방을 옆구리에 낀 상고머리 소년이 양손을 바지 주머니에 꽂은 채로 내려다보고 있었다. 놀이에 빠져 소년이 다가오는 것도 몰랐다.

"야, 너 누구야? 여기 우리 집인데 여기서 뭐 해?"

"..."

당황한 아이가 급히 시선을 떨구었다. 오줌에 쪼글쪼글 불은 발가락 끝 길게 자란 발톱과 땟물이 눈에 들어왔다. 낯선 집 낯선 소년에게 처음 보인 모습이 오줌 젖은 바지와 때낀 발가락이라니. 아이는 부끄러워 얼른 바짓단을 잡아당겨 발을 가렸다. 소년은 기분나쁜 표정으로 어깨를 한 번 으쓱하더니 토방으로 올라섰다. 마루의 미닫이 문을 드르륵 열고 가방을 휙 던졌다. 가방 안에서 꽃동산 필통이 빠져나와 뚜껑이 열렸다. 연필이 흩어져 마루끝으로 또르르 굴렀다. 아이는 연필이 갖고 싶었다. 구멍가게집 미경이가 자랑하던 것보다 더 좋아보였다.


"엄마, 엄마 어딨어? 엄마,  거지 같은 여자애 누구야?" 

엄마를 부르며 주인 여자가 사라진 으로 소년이 총총총 걸어갔다. 거지 같다는 소년의 말이 아이 가슴에 탱자나무 가시처럼 콕 박혔다. 소년이 사라지자 아이는 양동이 물에 얼굴을 비추고 손으로 머리를 쓸어 매만졌다.  해가 점점 서쪽으로 이울었다. 아이가  자리 소금꽃이 탱자나무 울타리 긴 그림자로 덮여갔다.




주인 여자가 상고머리 소년의 어깨에 한 손을 올린 채 다정하게 걸어 나왔다.

"아이고, 내 강아지. 배 안 고팠는가. 우리 석진이 오는 것도 모르고 시간이 벌씨 이르케 돼버렸댜."

"엄마, 나 배고픈데 뭐 먹을 거 없어?"

"암만, 암만, 내 새끼. 공부 허느라 배가 을매나 고팠을까잉. 쪼매만 지다. "

신병훈련소 교관 같던 주인 여자 목소리가  속살 같이 사근사근했다. 어디서  저런 다정함이 나오는지 의뭉스럽기조차 했다. 주인 여자가 옆구리에 낀 바구니를 우물가에 내려놓더니 부엌으로 들어갔다. 아이는 바구니 안에 뭐라도 먹을게 들어있나 싶어 고개를 쭉 내밀었다. 거기에는 나비날개같이 조그맣고 귀여운 연둣빛 애기상추가 담겨있었다.


주인 여자가 동글 넓적한 쑥떡이 담긴 채반을 부엌에서 들고 나왔다. 두툼 두툼 겉이 반지르르 윤기가 흐르는 게 보기만 해도 침이 꿀꺽 넘어갔다.

"우리 석진이 줄라고 엄니가 개떡 맨들었응께 천천히 많이 묵어. 아니지. 저녁밥 먹어야 하니께 요기할 만큼만 묵어."

"엄마가 만든 거 이런 거 말고 바나나 없어? "

"어찌케 날마다 귀한 바나나만 먹을라고 혀? 내 강아지 멕일라고 힘들게 만든 것인디. 엄니가 오렌지 가루로 주스 한 대접 만들어 갖고 올팅게 쪼매만 있어. 아이고 내 새끼."

"그럼 저녁에는 닭 삶아줘. 알았지?"

아이는 풍경화 속 정물처럼 앉아  둘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떡을 보니 침이 꿀꺽 넘어갔다. 아침에 먹은 것이라고는 이모가 미군부대 PX에서 얻어왔다는 크림빵 한 개와 탈지분유 한 잔이 전부였다. 석진이가 떡을 다 먹을까봐 조마조마했다. 와서 먹으라는 손짓을 언제 할지 주인 여자의 손만 보였다. 석진이 쑥떡에 별 관심을 두지 않아서였는지, 아이의 간절한 눈빛이 닿아서였는지 주인 여자의 손이 아이를 향했다. 찰진 쑥떡과 빛깔도 영롱한 오렌지맛 단물이 아이 앞에 놓였다.


주인 여자는 부엌과 우물가를 오가며 저녁식사 준비를 분주히 했다.

"아니, 야가 여그서 걸리적거리게 왜 이러고 있댜? 저짝으로 가 있어."

주인여자가 가리킨 곳은 뒷마당으로 가는 모퉁이 앞에 나 있는 창고방이었다. 경첩에서 떨어질 듯 덜렁거리고 군데군데 한지에 구멍이 난 창호문 앞에 먼지 덮인 쪽마루가 있었다. 창호문 안쪽에는 오래된 잡동사니 물건들이 널브러져 있을 듯한 허름함이 느긋하게 깔려있었다.

아이는 비척비척 쪽마루에 가서 앉았다. 봄날의 석양이 쪽마루에 사선으로 들자 졸음이 쏟아졌다. 마당에 땅거미가 졌다. 까무룩 잠이 들었나 보다.




이불처럼 몸을 덮는 한기에 움츠리다가 잠이 다. 슬며시 눈을 떠보니 어둠 속에 빛이 얌전히 새어들었다. 잠에서 깰 때 먼저 실눈을 뜨는 것은 아이가 터득한 나름의 비결이었다. 눈뜨기  소리로 주변상황을 가늠해 보다가 자는척 더 누워있어야 할지 일어나야 할지를 결정하는 시간은 언제나 긴장되었다. 매질을 면할 수 있는지 아닌지를 갈라놓는 순간이기도 했다.

이따금 개 짖는 소리들릴뿐 주위는 조용했다. 눈을 번쩍 떴다. 안채 대청마루에 백열등이 환하게 켜져 있었다. 식사를 끝냈는지 주인 여자가 방에서 물린 상을 오고 있었다. 아이가 일어나 앉아 있는 것을 보자 상을 그대로 마루 끝에 내려놓고 창고방 쪽으로 건너왔다.

"이런 경을 칠. 가시내가 잠이 그렇게 많댜? 잠 많으믄 게을러서 못써. 오늘은 첫날인 게 석영방에서 함께 자는디 낼부터 여그가 니 방여. 오메, 이 냄시는 뭐여 시방. 아이고 린내."

주인 여자는 한 손으로 코를 쥐고 안채로 건너갔다.

"석영아, 거그 방에 놔둔 옷 좀 갖고 나오니라. 여그 애기 좀 갈아입혀라."

말은 애기라고 지만 주인 여자는 어린아이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모르는 사람 같았다. 주인여자뿐 아니라 아이가 만났던 대부분의 어른이  그랬다. 쥐어박기부터 하거나 고함을 지르고 윽박질렀다.


부엌을 사이에 두고 안맞은편에서 똑 단발 처녀가 옷을 들고 나왔다. 처녀가 아이에게 오라고 손짓을 했다. 백열등 불빛 아래서 본 처녀는 가르마가 단정하고 귀밑으로 솜털이 보송보송한 둥근 얼굴이었다. 스웨터 위로 가슴이 봉긋하게 솟 허리가 잘록했다. 이모에게서 났던 향긋한 분 냄새도 났다. 그동안 봐온 이모들에게서 욕이 나올지 날쌘 손바닥이 나올지 아니면 알사탕이 나올지 아이는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지금은 적어도 욕이나 손바닥은 아니라는 생각에 바짝 움츠렸던 마음이 해제되었다.

"맹아, 넌 이름이 뭐야? 난 석영이. 이제부터는 우리 집에서 함께 살아야 한대."

"..."

"어휴, 냄새. 옷 갈아입기 전에 씻어야겠다. 물이 차가워도 좀 참아."

석영은 찬물에 오들오들 떠는 아이를 대충 물기만 닦은 후 방으로 데리고 들어갔다.

석영의 방 한쪽 벽에는 흰 칼라가 달린 교복이 옷걸이에 단정하게 걸려 있었다. 교복 옆으로는 금발에 부리부리 큰 눈, 오뚝한 콧날의 남자 사진이 여러 개 붙어있었다.  집 가족은 아닌듯했다.

앉은뱅이책상 옆에 줄이 여섯 개 가로지른 표주박 모양의 나무통이 놓여있었다. 아이는 한 번도 보지 못했던 신기한 물건이었다. 옷을 입으며 그것을 뚫어지게 바라보자 석영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이거 궁금해? 통기타야. 줄을 튕기면 소리가 나는 건데 처음 보는구나?"

아이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너 이름이 뭐야? "

"..."

"나중에 언니이거 배우면 그때 노래 불러줄게. 지금은 나도 칠 줄 몰라. 이거 우리 아빠가 서울 사는 5촌 아저씨한테 부탁해서 낙원상가에서 사다준 거야. 저기 벽에 있는 남자 사진 봤지? 그게 클리프 리처드라는 가수거든. 그 가수 기타 치는 모습이 얼마나 멋진지.. 어후! "

석영은 그 남자가 바로 눈앞에 있는 것처럼 호들갑스럽게 얘기했다.

" 근데 너 말은 할 줄 알아? 이름 몰라? 네 이름." 

누구에게도 받아본 적 없는 낯선 친절이 어색했다. 그렇지만 이런 친절 앞에서라면 없던 이름도 만들어내야 할 것 같았다. 지금껏 불렸던 이름이 무엇이었던가.석영의 물음에 아이는 이름을 떠올렸다.

'야, 이 년, 저 웬수, 빌어먹을 년, 팔자에 없는 년...' 

그동안 들었던 것 중에 어떤 것도 이름으로 마음에 드는 게 없었다. 아이도 석영에게 친절을 베풀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어서 멋쩍게 웃고 말았다.

 

방은 따뜻했고 깨끗했고 향긋했고 밝았다. 방 안의 모든 것이 가지런하게 정돈되어 있었다. 불안한 하루의 안전지대 같았다. 지금껏 짐짝처럼 이리저리 굴러다니다 지쳐 잠들면 거기가 방이었고 집이었다. 어쩌면 태어날 때부터 집이 없었을지도 모른다.  아이에게는 이런 정갈함이 낯설고 좋으면서도 서글펐다. 금세 휘리릭 사라져버릴 무지개 같았다. 오래 곁에 두고 싶은 것은 어쩐지 더 빨리 사라졌다. 신작로에서 차에 치인 흰둥이가 그랬고 천사같이 착한 명희이모가 흰 천에 덮여 복도를 떠난것도 그랬다.


 입혀준 옷은 맞지 않는 크기인 데다 사내 아이나 입을 만한 낡고 볼품없는 옷이었다. 그러나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입지 않을 수 없었다. 주인여자의 눈에 들어야 이 집에서 밥이라도 굶지 않을 것 같았다. 이모들 틈에서 여러 방을 전전하며 사느라 눈치는 상당했지만  이 먼 곳까지 와야 하는 이유를 어느 누구도 알려주지 않았다.  떠나오면서 복도의 맨 끝방에 두고 온 물건들이 생각났다. 거기서 그다지 좋았던 것도 없었지만 다시 갈 수 없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쉬는 날의 끝방 이모처럼 머리카락이  엉키빨간 입술색이 지워진 바비인형을 두고 왔다. 하루 종일 손에 끼고 던 인형이었다. 친구나 다름없었다. 머릿결 좋은 새 걸로 사놓았을 테니 인형을 두고 가라고 . 친구를 버리는것 같아 고집을 피웠다. 또 언제 만날지 모른다는 말을 한숨처럼 내뱉는 끝방 이모가 가여워서 하자는대로 따랐다. 이모에게 해줄게 아무것도 없었다.

"엄마 보고 싶어서 그래? 옷이 맘에 안 들어? 언니가 과자 줄까? 아 , 너 밥 안 먹었지? 이리 와 언니가 밥부터 줄게."


석영은 아이를 데리고 부엌으로 나왔다. 인기척이 나자 부엌으로 난 안방 쪽문이 빼꼼히 열리고 석진이 고개를 내밀었다.

"어? 뭐야? 그거 내가 입었던 옷 아냐? 엄마, 거지같은 애가  왜 내 옷 입었어?"

"야, 윤석진 너 이제 이 옷 작아서 못 입잖아. 으휴, 저 심술보 또 시작이네."

안방에서 주인 여자 목소리가 들려왔다.

" 인자 어서 못입응께 가시내 줘버려. 석진이는 엄마가 사 온 새 옷 있잖여 그거 입으야지."

" 싫어. 내 옷이잖아. 빨리 벗어. ."

석진이 안방에서 쏜살같이 나와 아이 옷을 잡아당겼다. 화들짝 놀란 아이는 어쩔 줄 모르고 서 있다가 그만 바닥에 나뒹그러졌다.

"아~~~ 앙, 앙앙"

"이이고 이런 경을 칠. 저 가시내는 낮에도 쳐 울더니 밤에도 울고 뭐땜시 자꾸 울었쌌는댜? 쟈가 이 집 바깥어른 무서운 지 모른게 저러지."

주인 여자가 아이를 다그쳤다.

"엄마, 피난다. 피. 얘 입술 깨졌어."

"입술 터진 게 뭔 대수라고 이 난리여. 가만 놔두믄 마를 것인디. 아부지 술 자셨응께 조용혀. 날배락 날라. "


아이의 입술이 장 굄돌에 부딪혀 피가 났다. 석영은 얼른 울타리 밑에서 쑥을 한 줌 뜯어왔다. 손으로 비벼 아이의 깨진 입술에 지그시 눌러줬다. 쑥 냄새와 석영의 향긋한 살 냄새가 콧속으로 스며들었다.

"조금만 참아. 언니가 피 멎으면 밥 챙겨줄게. "

아이는 밥을 준다는 말에 퉁퉁 부어오른 입술 상처가 금세 다 나은 듯했다. 지금은 즉시 울음을 그쳐야 할 때였다. 당장이라도 입술을 누르던 으깬 쑥을 떼어내고 밥을 먹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석영 앉은뱅이책상에 탁상등을 켰다. 주황 불빛이 따스하게 느껴졌다.  석영책상 앞에 앉아 편지를 쓰고 있었다. 이따금 멍하니 벽을 응시했다가 다시 고개를 숙이고 만년필에 잉크를 묻혀 꾹꾹 정성을 들였다. 중요한 사람에게 쓰는 편지 같았다.

하얀 책상보 모서리에 수놓아진 작은 꽂이 무리 지어 앙증맞게 이뻤다. 아이는 누워서 석영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둥근 등을 보이고 앉아 고개 숙이고 글씨 쓰는 모습이 고왔다. 이모들에게서는 한 번도 볼 수 없었던 생경한 모습이었다. 이모 말대로 학교에 보내주면 꼭 저렇게 앉아서 글씨를 써봐야 겠다는 생각을 수줍게 마음에 새겼다. 석영예쁜 모습이 벽에 까만 그림자로 그려졌다.

아이는 폭신하고 부드러운 이불속에서도 잠이 오지 않았다. 따뜻한 이불속에 누워있자니 몸이 녹아져 흐를 것만 같았다.


뒤척뒤척 하다보니 마당을 종종거리며 헤집고 다니던 노란 병아리가 궁금했다.

'낮에 주인 여자 물벼락 맞고 도망갔던 병아리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심술보 석진이 닭 먹고 싶다했는데 엄마닭이 죽은 건 아닐까? 그럼 병아리도 이모닭이랑 살아야 하나? 미경이가 나한테 엄마 없는 애라고 놀렸는데 병아리들도 그럼 나처럼...'

아이는 병아리가 걱정이 되었지만 닭을 잡아먹었냐고 뜬금없이 물어볼 수는 없었다.

함께 살던 복도 끝방 이모의 말이 떠올랐다.

"으이구,  매일 저 년이 있으니 일이 안된다니까. 누가 애기 있는 년을 좋다고 하겠냐고." 

그때마다 아이는 슬그머니 방을 나와 복도에 쪼그려 앉아있곤 했었다.

'이제 이모는 일이 잘 되겠지.'

아이는 이모에게 뭐라도 좋은 일을 만들어 준 것 같아서 덜 미안했다. 잘 때 가슴을 만지게 해주던 이모가 보고싶었다.


긴 하루 동안 있었던 일들이 송두리째 물결치듯 밀려왔다. 당장이라도 찌를듯한 가시나무 울타리, 문짝이 덜렁거리는 창고방, 무서운 주인여자, 심술궂은 석진을 차례대로 생각하니 눈물이 났다.

훌쩍이는 소리를 내지 않으려고 소매부리를 입으로 악물었다. 그럴수록 끝방 이모 얼굴이 선명히 떠오르고 설움이 북받쳐올랐다. 이모의 말랑말랑한 가슴을 만지던 손이 허전했다. 눈물이 부어오른 입술을 타고 베개로 흘렀다.  참으려 해도 점차 이불이 들썩거리게 울음이 커지더니 급기야 목구멍에서 꺼억꺼억 소리가 새어 나왔다.  


 소리는 아이가 태어나기 전부터 도사리고 있던 질펀한 삶의 절곡과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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