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부. 별을 잊은 그대에게

더 프롬프트 (The Prompt) 시즌4 : 리셋

by 공감디렉터J


해발 800미터, 강원도 깊은 산골.
낡은 표지판 하나가 비포장도로 입구에 덩그러니 서 있었다.


WARNING: No Signal Area

여기서부터 모든 디지털 기기의 접속이 차단됩니다.


지우(29세)는 표지판 앞에서 스포츠카의 시동을 껐다.
엔진 소리가 잦아들자, 낯선 적막이 차 안에 밀려들었다.
습관적으로 스마트폰을 확인했다. 안테나 신호가 'X’로 바뀌어 있었다.
스마트 워치도, AR 안경도, 내비게이션도 모두 먹통이었다.

“진짜네...”


지우는 대한민국 최고의 IT 기업 '넥스트 휴먼’의 수석 디자이너였다.
하루 18시간 동안 스마트 렌즈를 끼고 가상현실 속에서 살았다.
잠잘 때조차 수면 패턴을 분석하는 센서를 몸에 붙이고 잤다.
그녀에게 '연결되지 않음’은 곧 죽음이나 다름없는 공포였다.

하지만 일주일 전, 과로로 쓰러졌을 때 의사가 처방해준 건 약이 아니었다.
“환자분, 뇌가 과열됐어요. 디지털 디톡스가 아니라, 아예 로그아웃이 필요합니다. '청정 구역’으로 가세요.”


지우는 차에서 내렸다.
공기가 달랐다.
도시의 공기는 정수된 물처럼 밋밋하고 차가웠다면, 이곳의 공기는 흙내음, 풀 비린내, 그리고 이름 모를 꽃향기가 뒤섞인 '살아있는 맛’이었다.

마을 입구에는 촌장이라는 노인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지우가 쓴 AR 안경을 가리키며 손을 내밀었다.
“그거, 반납하셔야 합니다. 여기선 맨눈으로만 봐야 하거든요.”

지우는 망설였다.
안경을 벗으면 세상이 흐릿하고 정보가 없을 것 같았다.
길가에 핀 꽃의 이름이 무엇인지, 오늘 날씨가 어떤지, 내 심박수가 몇인지 알려주는 데이터가 사라지는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떨리는 손으로 안경을 벗어 노인에게 건넸다.

순간, 시야가 쨍하게 밝아졌다.
데이터 텍스트가 사라진 자리에, 진짜 풍경이 들어왔다.
초록색은 생각보다 더 짙었고, 하늘은 데이터 코드 값인 #87CEEB보다 훨씬 깊고 오묘한 파란색이었다.

“어서 오십시오. 불편함의 천국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첫날밤은 지옥이었다.
지우는 금단 증상에 시달렸다.
무의식적으로 허공에 손가락을 휘저으며 스크롤을 내리려 했고, 아무 알림도 오지 않는 손목을 계속 확인했다.
적막이 너무 커서 귀가 윙윙거렸다.
정보가 주입되지 않는 뇌는 심심하다 못해 고통스러워했다.

“잠이 안 와요...”
지우는 마당 평상에 나와 앉아 있는 촌장 옆에 쭈그리고 앉았다.

“당연하지. 자네 뇌는 지금껏 1초도 쉰 적이 없으니까. 쉬는 법을 까먹은 게야.”
촌장은 옥수수를 찌고 있었다. 김이 모락모락 났다.
“이거나 하나 먹어봐. 타이머 없이 그냥 냄새로 찐 거야.”

지우는 뜨거운 옥수수를 호호 불며 베어 물었다.
달큰하고 쫀득했다.
식영양 정보가 뜨지 않아 칼로리가 얼마인지 알 수 없었지만, 혀끝에 닿는 감각은 그 어떤 정보보다 확실했다.

“고개를 들어보게.”
촌장이 하늘을 가리켰다.

지우는 무심코 고개를 들었다.
“아...”

탄성이 터져 나왔다.
도시에서는 ‘광공해’ 때문에 볼 수 없었던, 아니 AR 안경의 날씨 정보 위젯에 가려져 보이지 않았던 밤하늘이었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 수만 개의 다이아몬드를 흩뿌려 놓은 듯했다.
별들은 멈춰 있지 않고 미세하게 반짝이며 숨을 쉬고 있었다.

“저게... 진짜 별이에요?”
“그럼 가짜겠나. 여기선 홀로그램 안 써.”

지우는 멍하니 하늘을 바라봤다.
눈물이 핑 돌았다.
슬퍼서가 아니었다.
너무 압도적이어서, 그리고 그동안 이 아름다운 것을 잊고 작은 사각 화면만 보고 살았다는 것이 억울해서였다.

그녀의 눈에서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촌장은 아무 말 없이 옥수수수염차 한 잔을 건넸다.

“울고 싶으면 실컷 울게. 여기선 ‘우울증 경고’ 알림 따위 안 뜨니까.”


지우는 그날 밤, 평상에 누워 별똥별이 떨어지는 것을 보았다.
소원을 비는 대신, 그녀는 자신의 심장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쿵... 쿵... 쿵...
스마트 워치가 측정해주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지금 내 심장이 아주 힘차게, 그리고 편안하게 뛰고 있다는 것을.


일주일 뒤.
지우는 맨발로 흙을 밟으며 걷고 있었다.
발바닥에 닿는 까칠한 돌맹이와 부드러운 흙의 감촉이 좋았다.
그녀의 얼굴에는 화장기 대신 건강한 혈색이 돌았다.

그녀는 마을 사람들과 함께 밭에서 감자를 캤다.
AI 로봇이라면 10분이면 끝낼 일을, 사람들은 반나절 동안 땀을 뻘뻘 흘리며 했다.
허리가 아프고 손톱 밑에 때가 꼈다.
비효율의 극치였다.

“새참 먹고 합시다!”
누군가 외쳤다.
지우는 흙 묻은 손을 대충 털고 막걸리 사발을 받았다.
옆에 앉은 할머니가 지우의 밥그릇에 김치를 찢어 올려주었다.
“아가씨, 많이 먹어. 일하느라 고생했어.”

지우는 김치를 씹으며 웃었다.
SNS의 ‘좋아요’ 1만 개보다, 할머니의 투박한 손길 하나가 더 따뜻했다.
이곳에는 알고리즘이 추천해주는 친구가 아니라, 땀 흘리며 함께 밥을 먹는 '식구’가 있었다.


떠나는 날.
지우는 차에 시동을 걸었다.
다시 도시로 돌아가야 했다.
하지만 두렵지 않았다.
그녀의 주머니 속에는 촌장이 선물해준, 매끈하게 다듬어진 조약돌 하나가 들어 있었다.

“힘들면 그걸 만지게. 그리고 기억하게. 자네는 데이터가 아니라, 따뜻한 피가 흐르는 사람이라는 걸.”

지우는 표지판을 지나쳤다.


Signal Connected


스마트폰이 미친 듯이 울리기 시작했다. 밀린 메일, 메시지, 알림들이 폭주했다.
지우는 잠시 차를 세우고 심호흡을 했다.
그리고 스마트폰의 ‘전원 끄기’ 버튼을 눌렀다.

“조금만 더... 이 기분을 가져가고 싶어.”

그녀는 창문을 활짝 열었다.

바람이 들어왔다.
강원도의 신선한 바람 냄새.
그녀는 엑셀을 밟았다.
그녀의 차는 디지털 세상으로 향하고 있었지만, 그녀의 영혼은 이제 영원히 로그아웃되지 않을 '아날로그의 숲’을 품고 있었다.


"본 소설은 허구이며, 등장하는 인물, 단체, 지명, 사건 등은 실제와 관련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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