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화. 꿈★은 이루어진다, 광화문의 함성

시간의 다방 : 디지털 유목민의 고군분투

by 공감디렉터J


광화문 광장.
이순신 장군 동상 아래로 관광객들이 사진을 찍고 있었다.
오달수(56세) 씨는 그 풍경을 뒤로하고 손에 든 낡은 붉은색 티셔츠를 내려다보았다.
‘Be the Reds’.
색이 바래 분홍빛이 도는 티셔츠. 24년 전, 이 광장은 붉은 용암처럼 끓어올랐었다.
2002년 6월. 대한민국이라는 거대한 솥단지가 미친 듯이 달아올랐던, 단군 이래 최고의 축제.

“대~한민국! 짝짝~짝 짝짝!”

그 환청이 들리는 듯해 달수는 쓴웃음을 지었다.
그때 그는 서른셋. 카드빚에 쪼들려 신용불량자가 되기 직전이었다. 세상은 축제였지만, 그의 개인사는 지옥이었다. 하지만 그 붉은 물결 속에 섞여 목이 터져라 소리 지를 때만큼은 빚쟁이의 독촉도, 가장의 무게도 잊을 수 있었다.

광장 옆 세종문화회관 뒤편, 골목길로 접어드는데 붉은 조명이 새어 나오는 펍이 보였다.

시간의 다방 - Red Devils 2002


문을 열자 ‘오 필승 코리아’ 응원가가 쿵쿵 울려 퍼졌다.
벽면엔 대형 스크린이 걸려 있고, 안정환의 골든골 장면이 무한 반복되고 있었다.
테이블엔 붉은 뿔 머리띠를 한 외국인 한 명이 맥주를 마시고 있었다. 푸른 눈, 넉넉한 인상. 거스 히딩크 감독을 쏙 빼닮은 남자였다.

“헤이, 캄 온! 아직 경기는 끝나지 않았어!”

외국인이 서툰 한국말로 소리치며 달수에게 자리를 권했다.
달수는 멍하니 스크린을 보았다. 이탈리아전. 설기현의 동점골, 그리고 안정환의 헤딩.
그날, 달수는 광화문 네거리 아스팔트 바닥에 주저앉아 펑펑 울었다. 이겨서 기쁜 건지, 내 인생이 서러워서 우는 건지 모를 눈물이었다.

“당신, 그날 아주 크게 울더군. 내가 봤어.”

히딩크 닮은 남자가 맥주잔 대신 커피 쟁반을 밀었다.

“자, 이제 연장전이야. 선택해.”

“설탕을 고르면, 2002년 6월의 그 열기 속으로 영원히 보내줄게. 카드빚? 걱정 마. 로또 1회 당첨 번호를 알려줄 테니. 넌 그 돈으로 축구팀 구단주가 돼서 평생 월드컵을 즐기며 살 수 있어. 붉은 악마의 전설이 되는 거지.”

“프림을 넣으면, 그 뜨거웠던 기억을 식혀줄게. 월드컵 때문에 흥분해서 질렀던 충동구매, 술김에 했던 실수들 다 없었던 일로. 그냥 차분하고 이성적인 여름을 보낸 걸로 기억 조작.”

“그냥 블랙커피를 선택한다면... 넌 다시 현실의 빚쟁이 오달수로 돌아가야 해. 월드컵은 끝났고, 카드 명세서는 날아오고, '꿈은 이루어진다’는 문구가 비웃음처럼 느껴지는 그 허탈한 일상으로.”

달수는 설탕을 보았다. 로또. 인생 역전.
그 붉은 함성 속에서 영원히 살 수 있다면. 다시는 초라한 빚쟁이로 돌아가지 않아도 된다면.
하지만 달수는 자신의 붉은 티셔츠를 만지작거렸다.
그날의 함성은 단순히 축구 때문이 아니었다. IMF를 갓 졸업한 우리 국민들이, 억눌려왔던 패배 의식을 씻어내고 "우리도 할 수 있다"고 토해낸 울음이자 포효였다.
그 에너지를 맛본 덕분에, 달수는 월드컵이 끝난 후 다시 일어설 수 있었다. 낮에는 공장, 밤에는 대리운전을 뛰면서도 콧노래로 '오 필승 코리아’를 불렀다.

“그래, 4강도 갔는데 내 인생도 역전 못 하겠냐!”
그 '깡’이 지금의 오달수를 만들었다. 비록 재벌은 못 됐지만, 빚 다 갚고 작은 치킨집 사장이 된 지금의 나를.

“감독님.”

달수는 설탕을 밀어냈다.

“저 로또 필요 없어요. 이미 당첨됐거든요.”

“오? 1등?”

“아뇨. 제 인생이요. 그날 그 거리에서, 생판 모르는 사람끼리 얼싸안고 뒹굴면서 느꼈어요. ‘아, 나 혼자가 아니구나’. 그게 제 인생 최고의 로또였어요. 그 힘으로 20년을 버텼습니다.”

달수는 블랙커피를 들어 건배를 제의했다.

“그리고 꿈은 이루어지는 게 아니라, 버티면서 만들어가는 거더라고요. 제가 치킨 튀기면서 깨달은 전술입니다.”

히딩크 닮은 남자가 호탕하게 웃었다.
“You are still hungry! 멋져, 캡틴 오!”

달수는 커피를 마셨다. 뜨겁고 진한 맛. 2002년의 여름처럼 강렬했다.
“대~한민국!”
남자가 외치자 다방의 풍경이 붉은 꽃가루처럼 흩어졌다.


다시 2026년의 광화문.
달수는 핸드폰을 꺼냈다.
[여보, 오늘 저녁에 치킨 한 마리 튀겨갈게. 축구 보면서 맥주 한잔하자.]

저 멀리 전광판에서 국가대표팀 경기 예고가 나오고 있었다.
달수는 주먹을 불끈 쥐었다. 심장이 다시 뛰기 시작했다.
경기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오달수의 인생 후반전, 이제부터가 진짜 승부다.




[작가 노트]

주인공 달수에게 월드컵은 단순한 스포츠 행사가 아니라, IMF 이후 패배감에 젖어있던 자신을 다시 일으켜 세운 '에너지원’이었습니다. 과거의 영광에 머무르거나 로또 같은 요행을 바라는 대신, 그날의 에너지를 연료 삼아 현실을 돌파해온 현재를 긍정합니다. "꿈은 이루어지는 게 아니라, 버티면서 만들어가는 것"이라는 말은 치열한 삶을 살아낸 중년 가장의 묵직한 철학을 보여줍니다.


"본 소설은 허구이며, 등장하는 인물, 단체, 지명, 사건 등은 실제와 관련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