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화. 태평양을 건너는 송금 수수료

시간의 다방 : 디지털 유목민의 고군분투

by 공감디렉터J


“띵동. 송금이 완료되었습니다.”

스마트폰 뱅킹 알림음. 박준호(59세) 씨는 통장 잔고를 확인하며 쓴웃음을 지었다.
이번 달도 200만 원. 미국에 있는 손자에게 보낸 용돈이다.
20년 전, 똑같은 액수를 아들에게 보낼 때는 손이 벌벌 떨렸다. 그때의 200만 원은 준호의 월급 절반이었고, 컵라면으로 끼니를 때우며 모은 피 같은 돈이었다.

2000년대 중반, 대한민국을 휩쓴 조기 유학 열풍.
“남들 다 가는데 우리 애만 뒤처지면 어떡해?”
아내의 성화, 그리고 자식만은 넓은 세상에서 키우고 싶다는 욕심에 준호는 '기러기 아빠’가 되었다.

아내와 아들을 미국으로 보내고, 텅 빈 30평 아파트에 홀로 남겨진 밤.
벽지를 뜯어먹고 싶을 만큼 지독했던 외로움과 싸우며, 그는 달러를 벌어 날랐다.

퇴근길, 혼자 저녁 먹기가 싫어 들어간 김밥천국 옆. 낡은 공중전화 부스처럼 생긴 간판이 보였다.

시간의 다방 - International Call


문을 열자 ‘뚜- 뚜-’ 하는 국제전화 연결음과 함께 시차가 느껴지는 묘한 공기가 흘렀다.
한쪽 벽시계는 서울의 밤 9시, 다른 쪽은 뉴욕의 아침 8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테이블엔 컵라면 용기들이 쌓여 있고, 그 사이에 후드티를 뒤집어쓴 청년이 앉아 있었다.

“아빠?”

청년이 고개를 들었다. 준호의 아들, 민석이었다. 20년 전 유학 가던 날 공항에서 봤던 그 앳된 얼굴.

하지만 눈빛은 반항기로 가득 차 있었다.

“너... 왜 여기 있니? 공부 안 하고.”

“공부? 아빠가 원해서 간 거잖아. 난 가기 싫다고 했잖아!”

민석이 소리쳤다.
그랬다. 민석은 가고 싶지 않아 했다. 친구들과 헤어지기 싫어 울던 아이를 억지로 비행기에 태웠다.
준호는 아이를 위한다고 했지만, 사실은 자신의 못다 이룬 꿈을 투영한 것일지도 몰랐다.

“미안하다... 아빠는 네가 더 큰 세상에서 성장하길 바랐어.”

“그래서 행복했어? 아빠 혼자 컵라면 먹으면서, 엄마랑 나는 거기서 적응 못 해서 겉돌면서... 우리 가족이 다 찢어졌는데 그게 행복이야?”

민석이 쟁반을 내밀었다. 국제전화카드와 커피.


“설탕을 고르면, 2005년 공항으로 돌아가. 비행기 표 찢어버려. 유학 안 보내. 그럼 우린 지지고 볶더라도 같이 밥 먹고, 같이 TV 보면서 살았겠지. 아빠는 외롭지 않았을 거고, 나는 한국 친구들이랑 추억을 쌓았겠지.”

“프림을 선택하면, 유학 실패의 기억을 성공 신화로 바꿔줄게. 내가 하버드 가고 월가에 취직해서 아빠 호강시켜 주는 걸로. 기러기 아빠의 희생이 빛을 발한 걸로 기억이 바뀌게 돼.”

“아무것도 안 고르면... 아빠는 계속 송금해야 해. 돈이 아니라 마음을. 이미 벌어진 거리감을 인정하고, 서먹해진 아들과의 관계를 회복하려고 애써야 해. 평생 '돈만 보내준 아빠’로 남지 않기 위해서.”

준호는 설탕을 고르고 싶었다.
되돌리고 싶었다. 10년 넘게 떨어져 산 탓에, 성인이 되어 돌아온 아들과는 남보다 못한 사이가 되었다. 명절에나 얼굴 보고, 대화는 뚝뚝 끊기는 사이.
그 외로웠던 밤들을 보상받고 싶었다. 따뜻한 저녁 밥상이 있는 평범한 가정으로.

하지만...


준호는 스마트폰 속 손자의 사진을 보았다. 미국에서 태어나 자라고 있는 손자.
아들이 미국에서 겪은 고생과 방황 덕분에, 아들은 그곳에서 자리를 잡았고 가정을 꾸렸다. 비록 아버지와는 서먹하지만, 자신의 삶을 개척해 냈다.
나의 희생이 헛된 것만은 아니었다. 내가 날개를 꺾어가며 만든 바람을 타고 아이는 태평양을 건넜다.

“민석아.”

준호는 카드를 내려놓았다.

“안 돌아갈래. 네 말대로 우린 많이 아팠고, 외로웠어. 하지만... 그 덕분에 네가 거기서 버티는 법을 배웠고, 지금의 네 가족을 만들었잖아.”

준호는 블랙커피를 들었다.

“아빠는 컵라면 먹어도 괜찮았어. 네가 거기서 보낸 사진 한 장이면 배불렀으니까. 그게... 아비 마음이더라.”

민석의 눈가가 촉촉해졌다. 반항기 어린 눈빛이 사라지고, 어느새 훌쩍 커버린 30대 가장의 눈빛으로 변해 있었다.

“아빠... 고마워요. 그리고 죄송해요. 자주 전화 못 드려서.”

민석의 형상이 흐려지며 따뜻한 빛으로 변했다.
“아빠, 이번 휴가 때 한국 들어갈게요. 소주 한잔해요.”


다방 문을 열고 나오자 차가운 밤공기.
준호는 핸드폰을 들어 아들에게 메시지를 썼다.
[민석아, 밥은 먹었냐? 손주 녀석 장난감 값 보냈다. 사랑한다.]

전송 버튼을 누르자마자 답장이 왔다.
[아빠도 밥 잘 챙겨 드세요. 사랑해요.]

20년 만에 처음 듣는 말이었다.
준호는 코끝이 찡해졌다. 태평양보다 넓고 깊었던 거리감이, 문자 한 통으로 조금은 좁혀진 것 같았다.
오늘 저녁은 컵라면이 아니라 따뜻한 국밥을 사 먹어야겠다. 마음이 불러서 배도 고프지 않았지만.




[작가 노트]
3화는 2000년대 ‘기러기 아빠’ 열풍과 그 이면에 숨겨진 가족의 해체, 그리고 고독을 다룹니다. 주인공 준호는 자녀 교육을 위해 자신의 삶을 희생했지만, 남은 것은 서먹해진 부자 관계뿐이라는 현실에 아파합니다. 하지만 과거를 부정하기보다, 그 희생을 통해 아들이 독립적인 삶을 일궈냈음을 인정하고, 현재의 관계 회복을 위해 노력하는 모습을 그립니다.


"본 소설은 허구이며, 등장하는 인물, 단체, 지명, 사건 등은 실제와 관련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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