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화. 바이 코리아, 깡통 계좌의 비명

시간의 다방 : 디지털 유목민의 고군분투

by 공감디렉터J


여의도 증권가, 빌딩 숲 사이로 불어오는 강바람이 유독 날카로웠다.
최석훈(61세) 씨는 낡은 가죽 서류가방을 꼭 쥔 채, 한국거래소 앞의 황소상을 멍하니 올려다보고 있었다.
금색으로 번쩍이는 저 황소. 뿔을 치켜들고 상승장을 기원하는 저 짐승이, 26년 전 석훈의 모든 것을 들이받아버렸다.

“바이 코리아! 지금이 기회입니다!”

2000년의 TV 광고 속 목소리가 환청처럼 귓가를 때렸다.
IT 벤처 붐. 코스닥이 천장을 뚫을 듯 치솟던 광기의 시대.
대기업 부장이었던 석훈은 퇴직금을 중간 정산받고, 아내 몰래 마이너스 통장까지 뚫었다. ‘새롬기술’, ‘다음’, ‘골드뱅크’... 이름만 들어도 가슴 뛰던 종목들에 인생을 배팅했었다.
결과는 처참했다. 거품은 순식간에 꺼졌고, 계좌는 파란색 숫자로 도배되다 못해 ‘깡통’ 소리를 내며 나뒹굴었다.

씁쓸한 입맛을 다시며 돌아선 골목, 증권사 직원들이 담배를 피우러 모이는 흡연 구역 옆으로 낯선 간판이 보였다.

시간의 다방 - 객장(客場)


문을 열고 들어서자 익숙하고도 지독한 냄새가 났다. 땀 냄새, 담배 냄새, 그리고 종이 전표 냄새.
벽면 가득 메운 전광판에는 붉은색 숫자들이 미친 듯이 깜빡이고 있었다. 코스닥 지수 2800. 역사상 가장 뜨거웠던 그날의 지표였다.

“최 부장님, 오셨습니까. 상한가 축하드립니다.”

전광판 앞, 붉은 조끼를 입은 젊은 남자가 뒤를 돌았다. 말끔하게 빗어 넘긴 머리, 자신감 넘치는 눈빛.
석훈은 숨을 멈췄다. 김 대리. 당시 담당 증권맨이자, "부장님, 이거 무조건 갑니다"라며 석훈의 등을 떠밀었던 그 친구.

“김... 대리?”

“아이고, 부장님. 왜 그렇게 얼굴이 흙빛이십니까? 오늘 새롬기술 30연상 갔지 않습니까. 자산이 벌써 두 배입니다, 두 배!”

김 대리는 호들갑을 떨며 계산기를 두드렸다. 그 소리가 마치 석훈의 심장을 쪼는 딱따구리 소리 같았다.
석훈은 알고 있다. 저 붉은 숫자가 며칠 뒤면 지옥의 불꽃으로 변해 자신의 집문서를 태워버릴 것임을.

“김 대리... 그만하자. 나 이제 무서워.”

“네? 무슨 소리십니까. 이제 시작인데. 강남 아파트 세 채는 사셔야죠.”

김 대리가 쟁반을 내밀었다. 빨간색 버튼과 파란색 버튼, 그리고 커피 한 잔.

“자, 주문 넣으시죠.”

“빨간 버튼을 누르면, 1999년의 그 정점으로 돌아갑니다. 이번엔 욕심부리지 말고 딱 고점에서 전량 매도하세요. 그 돈으로 강남 땅 사고, 애플 주식 사두면... 당신은 지금쯤 워런 버핏 부럽지 않은 슈퍼 리치가 되어 있을 겁니다. 가족들한테 떵떵거리며 ‘내가 다 예지력이 있어서 그런 거다’ 큰소리치면서요.”

“파란 버튼을 누르면, 주식의 '주’자도 모르는 사람으로 리셋해 드립니다. 퇴직금은 은행 예금에 얌전히 넣어두고, 평범하고 지루하지만 안전한 노후를 보내게 해 드리죠. 밤새 미국 증시 보느라 잠 설칠 일 없는 편안한 삶으로요.”

“아무것도 누르지 않으면... 당신은 깡통 찬 그날의 기억을 안고 살아야 합니다. 아내에게 무릎 꿇고 빌었던 그 비참한 밤을, 아이들 학원비를 끊으며 피눈물 흘렸던 그 시간을 잊지 못하고 짊어져야 합니다.”

석훈의 손이 빨간 버튼 위에서 떨렸다.
고점 매도. 주식쟁이들의 영원한 로망.
그때 팔았더라면. 그 돈이면 지금 고생하는 아내 호강시켜주고, 아들 녀석 집 한 채 사주는 건 일도 아닐 텐데. 지난 20년, 빚 갚느라 택배 상하차부터 대리운전까지 안 해본 일이 없는 자신의 고단한 손이 눈에 들어왔다.

하지만...


석훈은 전광판의 붉은 숫자를 노려보았다.
그 탐욕의 숫자들. 돈이 돈을 먹는 그 야만의 시간 속에서, 석훈은 괴물이 되어가고 있었다. 하루에도 몇 번씩 천국과 지옥을 오가며 가족들의 얼굴보다 모니터를 더 많이 쳐다봤던 시절. 돈을 잃고 나서야 비로소 가족의 얼굴이 보였다.
빈털터리가 되어 집에 들어갔던 날, 아내는 욕을 퍼붓는 대신 말없이 따뜻한 밥상을 차려주었다.
“돈은 다시 벌면 돼요. 당신만 안 죽으면 돼요.”
그 말이 석훈을 살렸다. 그 후로 흘린 땀방울은 주식으로 번 돈보다 비록 적었지만, 훨씬 정직하고 무거웠다.

“김 대리.”

석훈은 손을 거두었다.

“나, 매수 안 해. 매도도 안 해.”

“예? 그럼 어쩌시려고요?”

“그냥... 깡통 찰게.”

석훈은 담담하게 말했다.

“그 깡통 소리가 내 인생의 알람시계였어. 그 소리 듣고 정신 차렸어. 덕분에 땀 흘려 버는 돈이 얼마나 무서운지, 내 옆에 있는 사람이 얼마나 귀한지 뼈저리게 배웠다.”

그는 아무것도 넣지 않은 블랙커피를 집어 들었다.

“슈퍼 리치? 좋지. 근데 내가 사기꾼 같은 운으로 부자 됐으면, 아마 거만해져서 마누라 쫓아내고 떵떵거리다 더 크게 망했을 거다. 차라리 그때 쫄딱 망한 게 내 인생엔 예방주사였어.”

석훈은 쓴 커피를 들이켰다. 위장이 쓰려왔다. 하한가 맞은 날처럼 속이 쓰렸지만, 정신은 어느 때보다 맑았다.

“그래도... 아깝긴 하시죠?”
김 대리가 짓궂게 물었다.

“아깝지, 인마! 내 피 같은 돈!”
석훈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하지만 그의 입가엔 허탈하지만 시원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그러니까 다시는 주식 안 해. 내 인생 우량주는 내 가족이니까.”

전광판의 숫자가 0으로 바뀌고, 객장의 풍경이 사라졌다.


다시 여의도 증권가 거리.
점심시간이 끝났는지 넥타이 부대들이 바쁘게 빌딩 속으로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석훈은 가방을 고쳐 멨다. 가방 안에는 주식 정보지 대신, 손주들에게 줄 붕어빵 봉투가 들어 있었다.

“할아버지가 간다. 따끈한 거 먹자.”

석훈은 황소상을 향해 가볍게 눈인사를 건넸다.
더 이상 뿔에 받힐까 두려워하지 않는, 인생의 파도를 넘어온 자의 여유였다.




[작가 노트]
시즌 3의 시작은 2000년대 초반 대한민국을 뒤흔들었던 '닷컴 버블’과 주식 열풍을 다룹니다. 주인공 석훈은 한순간의 탐욕으로 모든 것을 잃었지만, 그 실패를 통해 '돈’보다 중요한 '가족’과 '땀의 가치’를 깨닫게 됩니다. 과거의 실수를 되돌려 벼락부자가 되는 판타지 대신, 뼈아픈 실패를 인정하고 현재의 소소한 행복을 지키는 모습은 투기 열풍이 여전한 2026년의 우리들에게도 묵직한 여운을 전해줍니다. "깡통 소리가 내 인생의 알람시계였다"는 메시지는 실패조차 삶의 자양분으로 삼는 중년의 단단한 내공이 아닐까요?


"본 소설은 허구이며, 등장하는 인물, 단체, 지명, 사건 등은 실제와 관련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