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화. 돌려막기, 끝없는 빚의 굴레

시간의 다방 : 디지털 유목민의 고군분투

by 공감디렉터J


“고객님, 이번 달 카드 대금 결제일이 지났습니다. 연체 이자가 발생하오니...”

김경수(55세) 씨는 걸려 온 전화를 끊지도 않고 종료 버튼을 눌렀다.
가슴이 답답했다. 2026년의 경수는 어엿한 중소기업 부장이지만, '카드값’이라는 단어만 들으면 20여년 전 그 악몽 같은 시절로 소환된다.

2003년. 카드 대란.
“길거리에서 카드를 만들어줍니다!”
소득이 없어도, 대학생이어도 카드를 발급해주던 미친 시대. 경수는 사회 초년생의 패기로 카드를 긁었다.

차를 사고, 명품을 사고, 친구들에게 술을 샀다.
그리고 청구서가 날아왔을 때, 그는 다른 카드를 만들어 빚을 갚았다. ‘돌려막기’. 폭탄 돌리기 게임의 시작이었다.

퇴근길, ATM 기계 앞을 지나는데 현금 인출기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촤르르륵, 틱.
그 소리에 이끌려 들어간 곳은 은행 365 코너가 아닌, 낯선 다방이었다.

시간의 다방 - Credit & Cash


내부는 화려했다. 황금색 벽지에 샹들리에. 테이블 위엔 각종 신용카드들이 트럼프 카드처럼 펼쳐져 있었다.
맞은편엔 단정한 유니폼을 입은 상담원이 앉아 있었다. 무표정한 얼굴, 차가운 안경. 당시 매일같이 독촉 전화를 걸어오던 그 카드사 채권추심원 목소리의 주인공이었다.

“김경수 고객님, 현재 5개 카드사 연체 중이십니다. 신용불량자 등록 예정이시고요.”

상담원이 서류를 넘기며 건조하게 말했다. 경수는 식은땀이 흘렀다.
그때의 공포. 전화벨만 울리면 심장이 튀어나올 것 같고, 집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이불 속으로 숨었던 나날들.

“살려주세요... 갚을게요. 꼭 갚을게요.”

경수는 자신도 모르게 빌었다. 20년 전처럼.
상담원은 안경을 고쳐 쓰며 쟁반을 내밀었다. 가위와 현금뭉치, 그리고 커피.

“자, 채무 조정 시간입니다.”

“가위를 들면, 2003년으로 돌아가 그 모든 카드를 잘라버립니다. 지름신? 허세? 싹 다 오려내고, 체크카드만 쓰는 건실한 청년으로 다시 시작하세요. 빚 없는 삶의 가벼움을 누리시는 겁니다.”

“현금뭉치를 받으면, 로또 당첨금으로 빚을 한방에 청산해 드립니다. 갚는 고통 없이, 그냥 운 좋게 해결된 걸로. 하지만 돈 무서운 줄 모르고 또 카드를 긁게 될지도 모르죠.”

“아무것도 선택하지 않으면... 당신은 그 빚을 다 갚아야 합니다. 월급의 80%를 빚 갚는 데 쓰고, 친구들 다 만나고 다닐 때 혼자 컵라면 먹으며 버텨야 합니다. 신용 회복이라는 딱지를 떼기 위해 10년을 바쳐야 합니다.”

경수는 가위를 보았다. 싹둑. 잘라내고 싶었다. 그 철없던 시절의 과오를.
그 빚 때문에 결혼도 늦어졌고, 내 집 마련도 남들보다 10년이 늦었다. 잃어버린 10년이었다.

하지만...


경수는 자신의 지갑을 열었다. 지금은 한 장뿐인 신용카드. 그리고 빳빳한 현금 몇 장.
그는 빚을 갚으며 돈의 무게를 배웠다. 100원 하나가 얼마나 소중한지, 남의 돈 무서운 줄 알게 되었다.
그 혹독한 수업료 덕분에 지금의 경수는 회사의 재무팀장이 되었다. 누구보다 깐깐하게 자금을 관리하고, 1원 한 푼 허투루 쓰지 않는 '짠돌이 부장’이 되었다.

“저기요.”

경수는 가위를 내려놓았다.

“안 자를래요. 그 빚, 내가 만든 거잖아요. 내가 쓴 거잖아요.”

“후회 안 하십니까? 청춘을 다 바쳤는데.”

“후회하죠. 뼈저리게. 근데... 내가 도망쳤으면, 지금의 이 경제 관념, 이 책임감은 못 배웠을 거예요. 그 빚 갚느라 흘린 땀이 나를 사람 만들었어요.”

경수는 블랙커피를 들었다.

“이제 신용등급 1등급입니다, 나. 떳떳해요.”

상담원의 차가운 표정이 처음으로 풀어지며 미소가 번졌다.

“신용 회복을 축하드립니다, 고객님. 최고의 우수 고객이시네요.”

상담원이 쾅, 하고 도장을 찍어주었다. [완납]


다방을 나오자 밤하늘이 맑았다.
경수는 편의점에 들러 캔맥주 하나를 샀다. 체크카드로 결제했다.
“잔액이 충분합니다.”
그 기계음이 오늘따라 세상 어떤 음악보다 감미롭게 들렸다.
빚 없는 맥주 한 캔의 맛.
경수는 그 시원함을 들이키며 집으로 향했다. 발걸음이 깃털처럼 가벼웠다.




[작가 노트]
주인공 경수는 과거의 빚을 회피하거나 요행으로 해결하려 하지 않고, 정직하게 갚아나간 자신의 역사를 긍정합니다. "그 빚 갚느라 흘린 땀이 나를 사람 만들었다"는 고백은, 혹독한 대가를 치르고 성숙해진 5060 세대의 자화상입니다. 신용불량의 위기를 딛고 건실한 중년으로 일어선 모든 이들에게 박수를 보내드립니다.


"본 소설은 허구이며, 등장하는 인물, 단체, 지명, 사건 등은 실제와 관련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