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화. 유모차 부대와 명박산성

시간의 다방 : 디지털 유목민의 고군분투

by 공감디렉터J


“어르신, 여기는 집회 신고 구역이 아닙니다. 돌아가세요.”

2024년 광화문 광장. 경찰관이 정중하게 길을 막았다.
김정우(56세) 씨는 멋쩍게 촛불을 든 손을 내렸다.
“아, 예. 알겠습니다. 그냥 구경 좀 하느라...”

돌아서는 발걸음이 무거웠다.


2008년. 그 뜨거웠던 여름밤. 이 광장은 촛불의 바다였다.
미국산 소고기 수입 반대. 광우병 파동.
정우는 그때 유모차에 네 살배기 딸을 태우고 거리에 나왔었다.
“우리 아이들에게 안전한 먹거리를!”
'유모차 부대’라 불리던 엄마, 아빠들. 그리고 그들 앞을 가로막았던 거대한 컨테이너 장벽, ‘명박산성’.

정우는 딸 지민이를 생각했다. 이제 대학생이 된 딸.
“아빠, 그때 나 데리고 시위 나갔다며? 기억도 안 나는데.”
딸은 무심히 말했지만, 정우에게 그날은 긍지이자 상처였다. 아이를 지키겠다고 나섰지만, 결국 정치 싸움에 휘말려 '좌빨’이니 '선동’이니 하는 비난을 들어야 했으니까.

골목길, 전경 버스가 주차되어 있던 자리에 낯선 포장마차가 보였다.

시간의 다방 - 촛불 1호점


천막을 걷고 들어가자 매캐한 최루액 냄새 대신 고소한 군밤 냄새가 났다.
라디오에선 '아침 이슬’과 ‘헌법 제1조’ 노래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테이블엔 앳된 얼굴의 의무경찰 한 명이 앉아 컵라면을 먹고 있었다.

“아저씨... 저 좀 쉬었다 갈게요. 다리가 너무 아파서요.”

의경이 헬멧을 벗었다. 땀에 젖은 머리카락, 겁에 질린 눈빛.
정우는 숨을 들이켰다.
2008년 그날 밤, 대치 상황에서 정우와 눈이 마주쳤던 그 어린 의경이었다. 방패를 들고 있었지만 손을 바들바들 떨고 있었던, 내 조카뻘 되는 아이.
정우는 그 아이에게 "너희들도 시민이야! 방패 내려!"라고 소리쳤었다.

“미안하다... 너도 명령받아서 나온 건데. 내가 너무 몰아붙였지.”

정우가 사과했다. 의경은 쓴웃음을 지으며 라면 국물을 마셨다.

“아녜요. 저도 무서웠어요. 아저씨들이 나쁜 사람 아닌 거 아는데... 위에서는 막으라고 하고.”

의경이 쟁반을 내밀었다. 양초와 커피.


“자, 촛불을 켜시겠습니까?”

“촛불을 켜면, 2008년으로 돌아가 그 거대한 산성을 무너뜨립니다. 시민의 힘으로 컨테이너를 치우고 청와대 앞까지 행진하는 거죠. 역사를 바꾸는 승리감에 취해볼 수 있습니다.”

“촛불 끄기를 하면, 그냥 집에서 TV나 보는 방관자가 됩니다. ‘정치병’ 걸렸다는 소리 안 듣고, 편안하게 주말 예능이나 즐기는 삶.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든 내 밥그릇만 챙기는.”

“그냥 두면... 아저씨는 여전히 ‘그때 우리가 옳았나?’ 고민하는 시민으로 남습니다. 세상은 쉽게 바뀌지 않는다는 무력감, 하지만 그래도 목소리를 내야 한다는 의무감 사이에서 끊임없이 갈등해야 합니다.”

정우는 양초를 만지작거렸다.
이기고 싶었다. 그 산성을 넘고 싶었다. 내 딸에게 "아빠가 세상을 바꿨어"라고 자랑하고 싶었다.
하지만... 정우는 의경의 눈을 보았다.
그날 우리가 산성을 넘었다면? 이 아이들과 몸싸움을 벌이고, 누군가는 다치고, 거리는 또다시 폭력으로 얼룩졌을지도 모른다.
비록 산성은 넘지 못했지만, 우리는 평화롭게 노래했고, 유모차를 끌며 '비폭력’을 외쳤다. 그 모습 자체가 민주주의의 교과서였다.

“학생.”

정우는 촛불을 내려놓았다.

“나 안 돌아가. 산성? 못 넘었지. 근데 우리 마음속 벽은 넘었어.”

“네?”

“너랑 나랑, 이렇게 마주 보고 라면 먹을 수 있잖아. 방패 내리고, 헬멧 벗고. 그때 우리가 평화를 지켰기에 지금의 우리가 있는 거야.”

정우는 블랙커피를 들었다.

“세상은 한 방에 안 바뀌더라. 조금씩, 아주 천천히... 촛불 하나하나가 모여서 어둠을 밀어내는 거더라.”

정우는 커피를 마셨다. 씁쓸했지만 따뜻했다.
그날 밤, 아스팔트 바닥에서 마셨던 식은 커피보다 훨씬 깊은 맛이었다.

“수고하세요, 아저씨. 따님 잘 키우시고요.”

의경이 거수경례를 했다.
정우는 미소 지으며 포차를 나왔다.


2024년의 광장. 여전히 시위는 있고, 갈등은 있다. 하지만 정우는 안다. 이 소란스러움이 살아있는 민주주의의 증거라는 것을.
그는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냈다.
[지민아, 아빠 집에 간다. 갈 때 촛불 말고 통닭 사 갈게.]

광장의 바람이 시원하게 불어왔다. 정우의 발걸음은 2008년보다 훨씬 단단하고 여유로웠다.




[작가 노트]
주인공 정우는 '명박산성’이라는 거대한 벽 앞에서 느꼈던 무력감과, 의무경찰과의 대립 속에서 느꼈던 미안함을 회상합니다. 과거의 승리를 탐하는 대신, 비록 더디지만 평화적인 방법으로 민주주의를 학습해온 과정을 긍정하는 성숙한 시민 의식이 여전히 자랑스럽습니다. "세상은 한 방에 바뀌지 않고, 촛불 하나하나가 모여 어둠을 밀어낸다"는 메시지는 여전히 유효한 희망입니다.


"본 소설은 허구이며, 등장하는 인물, 단체, 지명, 사건 등은 실제와 관련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