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화. 잊지 않겠습니다, 노란 리본

시간의 다방 : 디지털 유목민의 고군분투

by 공감디렉터J


2014년 4월 16일.
대한민국의 시간이 멈췄던 날.
박진희(58세) 씨는 안산 화랑유원지를 걷고 있었다. 벚꽃이 눈처럼 흩날리는 4월. 잔인하게도 봄은 아름다웠다.
가방에 매달린 낡은 노란 리본이 바람에 파르르 떨렸다.
진희는 유가족은 아니다. 하지만 그날 TV 속에서 기울어져 가는 배를 보며 발을 동동 구르던, '전 국민적 트라우마’의 당사자였다. 당시 고등학교 2학년이었던 아들이 생각나서, 밥을 먹다가도 울컥 목이 메었던 날들.

“벌써 12년이 지났네...”

추모관 앞을 지나는데, 하얀 국화꽃 향기 사이로 낯선 텐트 하나가 보였다.
팽목항에서 보았던 그 자원봉사자 천막.

시간의 다방 - 4.16


천막을 걷고 들어가자 짭조름한 바다 냄새와 향 냄새가 섞여 났다.
안에는 교복을 입은 학생과, 그 학생의 손을 꼭 잡고 있는 중년 여성이 앉아 있었다.
여성의 얼굴은 눈물로 얼룩져 있었지만, 표정은 평온해 보였다.

“어서 오세요. 따뜻한 차 한 잔 드릴까요?”

여성이 진희를 보며 미소 지었다. 그녀의 가슴에도 노란 리본이 달려 있었다.
단원고 학생의 어머니. 아이를 가슴에 묻은, 하지만 결코 잊지 않은 사람.

“어머니... 괜찮으세요?”

진희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어머니는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지는 않아요. 평생 안 괜찮겠죠. 하지만... 견디는 거예요. 잊지 않겠다고 약속했으니까.”

그녀 옆의 학생이 진희에게 쟁반을 내밀었다. 핫팩과 따뜻한 유자차, 그리고 커피.

“이모, 선택하세요.”

“설탕을 타면, 2014년 4월 15일로 돌아가요. 배를 못 뜨게 막아요. 안개 때문에 출항 취소라고 거짓말을 해서라도. 그럼 우린 제주도로 수학여행 못 가고 투덜대겠지만, 살아서 엄마 밥 먹고 대학 가고 연애도 했겠죠.”

“프림을 넣으면, 그날의 기억을 지워드려요. 세월호? 그냥 교통사고였지, 하고 무덤덤하게 넘길 수 있게. 4월이 와도 가슴 아프지 않게.”

“블랙커피를 드시면... 이모는 계속 미안해해야 해요. 어른이라서 미안하고, 지켜주지 못해서 미안하고. 그 부채감을 안고 평생 노란 리본을 달고 다녀야 해요.”

진희는 학생의 손을 잡으려다 멈췄다. 잡을 수 없는 손.
돌아가고 싶다. 미치도록 돌아가서 그 배를 멈추고 싶다.
"가만히 있으라"는 방송 대신 "빨리 탈출하라"고 소리치고 싶다.

하지만...


진희는 어머니의 눈을 보았다. 깊은 슬픔 속에 담긴 단단한 심지.
그날 이후, 대한민국은 변했다. 아니, 변하려고 몸부림쳤다.
안전 불감증에 분노하고, 국가의 역할이 무엇인지 묻기 시작했다.
비록 더디고 답답하지만, 우리는 그 아이들의 희생 위에서 조금씩 더 안전한 사회를 향해 나아가고 있다.

“얘야.”

진희는 설탕을 밀어냈다.

“이모가... 미안해서 못 돌아가겠다. 너희를 살리지 못한 그 죄책감, 그거 잊으면 안 될 것 같아. 그게 아프고 쓰라려야, 다시는 이런 일이 안 생기게 눈 부릅뜨고 감시할 거 아냐.”

진희는 블랙커피를 두 손으로 감쌌다.

“이 쓴맛, 평생 기억할게. 내 아들한테, 내 손주한테 부끄럽지 않은 어른이 되도록 노력할게. 그게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속죄니까.”

어머니가 진희의 손을 잡았다. 따뜻했다.

“고마워요. 잊지 않아 줘서. 함께 기억해 줘서.”

학생이 환하게 웃었다.
“이모, 우리 엄마 잘 부탁해요. 가끔 안아주세요.”

천막이 바람에 펄럭이며 사라졌다.


다시 화랑유원지.
벚꽃 잎이 비처럼 내리고 있었다. 진희는 가방의 노란 리본을 다시 단단히 묶었다.
그리고 핸드폰을 꺼내 아들에게 전화를 걸었다.
“아들, 밥 먹었어? 그냥, 목소리 듣고 싶어서. 사랑해.”

전화를 끊고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파란 하늘에 구름 한 점이 배 모양으로 떠가고 있었다.
“잊지 않을게. 영원히.”
진희의 눈가에 맺힌 눈물이 햇살에 반짝였다. 그것은 슬픔이 아니라, 약속의 빛이었다.




[작가 노트]
2014년 우리는 '어른으로서의 책임’과 '부채의식’을 가장 뼈아프게 남긴 사건을 겪었습니다. 주인공 진희는 판타지적 구원이나 망각 대신, 고통스럽지만 기억하고 연대하는 길을 선택합니다. "미안함을 잊지 않아야 다시는 이런 일이 안 생긴다"는 다짐은, 참사 이후 우리 사회가 나아가야 할 방향이자 산 자들의 의무임을 역설합니다. 슬픔을 넘어 안전한 사회를 향한 약속으로 말이죠.


"본 소설은 허구이며, 등장하는 인물, 단체, 지명, 사건 등은 실제와 관련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