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화. 이게 나라냐, 광장에 다시 선 중년

시간의 다방 : 디지털 유목민의 고군분투

by 공감디렉터J


2016년의 겨울은 유독 추웠다. 하지만 광화문은 뜨거웠다.
박현수(60세) 씨는 옷장 깊숙한 곳에서 두툼한 패딩을 꺼냈다. 등산 갈 때나 입던 옷.
그리고 주머니에서 양초 한 자루와 종이컵을 발견했다. 그을음이 묻은 컵.
2016년 광화문 촛불집회 때 썼던 것이다.

“이게 나라냐.”

당시 현수는 대기업 임원이었다. 보수적인 성향이었고, 시위라면 혀를 차던 사람이었다.
하지만 딸이 물어봤다.
“아빠, 대통령이 주사 아줌마한테 주사 맞고, 무당 말 듣고 국정 운영했다는데... 이게 맞아?”
현수는 대답할 수 없었다. 평생을 '원칙’과 '상식’을 믿고 살아온 자신의 세계가 무너지는 기분이었다.
그래서 그는 패딩을 입고 광장으로 나갔다. ‘꼰대’ 소리 듣기 싫어서가 아니라, 어른으로서 최소한의 도리를 하고 싶어서.


퇴근길, 광화문역 지하도. 시위대의 함성 소리가 환청처럼 들려왔다.
지하철 연결 통로 구석, 셔터가 내려진 상가 앞에 촛불 하나가 켜져 있었다.

시간의 다방 - 100만 번째 촛불


문을 열고 들어서자 영하의 칼바람 대신 수만 명의 체온이 만들어낸 훈훈한 열기가 느껴졌다.
“하야하라! 하야하라!”
함성 소리가 배경음악처럼 깔리고, 테이블엔 핫팩과 김밥 한 줄이 놓여 있었다.
맞은편엔... 대학생 딸이 앉아 있었다. 9년 전, 스물한 살의 딸 지은이.
손이 꽁꽁 언 채로 촛불을 들고 있는 딸.

“아빠? 아빠가 여기 웬일이야? 집에서 뉴스나 보지.”

딸이 놀란 눈으로 물었다. 냉소적인 말투. 평소 현수와 정치 이야기만 하면 싸우던 딸이었다.

“지은아. 아빠도... 화나서 나왔다. 쪽팔려서.”

현수는 딸의 언 손을 자신의 핫팩으로 감싸주었다.

“내가 평생 투표한 사람들이 이 모양 이 꼴이라니. 너한테 미안하다. 이런 나라 물려줘서.”

딸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아빠의 입에서 '미안하다’는 말을 처음 들었으니까.

“아빠...”

딸이 쟁반을 내밀었다. LED 촛불과 커피.


“자, 선택해. 아빠.”

“설탕을 넣으면, 그냥 집으로 돌아가. 따뜻한 방에서 ‘원래 정치가 다 그렇지 뭐’ 하면서 혀나 차고 있어. 그럼 딸이랑 싸울 일도 없고, 추위에 떨 일도 없어. 그냥 보수적인 아저씨로 편하게 살아.”

“프림을 넣으면, 이 사태를 모른 척하게 해 줄게. 뉴스 끄고, 귀 닫고. 그냥 골프나 치러 다니면서 ‘내 인생만 잘 살면 되지’ 하는 이기적인 중년으로.”

“아무것도 안 넣으면... 아빠는 이 추운 광장에 서 있어야 해. 발가락이 얼어붙고 목이 쉬도록 소리 질러야 해. '내가 널 잘못 뽑았다!'라고 자아비판 하면서. 그리고 인정해야 해. 딸의 말이 옳았다는 걸.”

현수는 딸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맑고 정의로운 눈빛.
자신이 젊었을 때 가졌던, 하지만 먹고 사느라 잊어버렸던 그 눈빛.

“지은아.”

현수는 LED 촛불을 집어 켰다. 반짝.

“아빠는 꼰대지만, 비겁한 꼰대는 안 할란다.”

“어?”

“내가 잘못 찍었으면, 내가 책임지고 고쳐야지. 그게 어른이지. 쪽팔리다고 숨으면 그게 진짜 망신이지.”

현수는 블랙커피를 들었다.

“그리고... 너랑 같이 서 있고 싶다. 이 역사적인 현장에. 나중에 네가 '그때 우리 아빠도 촛불 들었어’라고 말할 수 있게.”

현수는 커피를 마셨다. 광장의 찬 바람 맛이 났다. 하지만 가슴속은 뜨거웠다.
딸이 빙그레 웃었다.

“올~ 박현수 씨 좀 멋진데? 이리 와, 아빠. 같이 부르자.”

딸이 현수의 팔짱을 꼈다.
“어둠은 빛을 이길 수 없다~ 거짓은 참을 이길 수 없다~”
현수도 서툰 솜씨로 따라 불렀다.

다방의 풍경이 수많은 촛불의 파도로 변해 넘실거렸다.


다시 2026년.
현수는 집으로 돌아와 TV를 켰다. 뉴스가 나오고 있었다. 여전히 시끄러운 정치판.
하지만 현수는 더 이상 혀를 차지 않는다.
“지은아, 이번 선거 누구 찍을 거야? 아빠랑 토론 좀 할까?”
주방에서 딸이 나왔다.
“오, 아빠 준비됐어? 치킨 시켜놓고 한판 붙자.”

현수는 웃었다. 정치는 여전히 엉망일지라도, 우리 집의 민주주의는 건강하게 살아 숨 쉬고 있었다.
그 겨울, 광장의 추위가 아빠와 딸을 가장 뜨겁게 이어주었으니까.




[작가 노트]
2016년 촛불혁명 당시 보수 성향의 중장년층조차 거리에 나오게 만들었던 '상식의 붕괴’와 '어른의 책임’을 이야기합니다. 주인공 현수는 자신의 정치적 실패를 인정하고, 딸과 함께 광장에 서는 것을 선택합니다. 이는 세대 갈등을 넘어선 '시민으로서의 연대’이자, 자녀 세대에게 부끄럽지 않은 어른이 되려는 5060의 성찰입니다. 촛불은 단순히 정권을 바꾼 것이 아니라, 아빠와 딸의 관계를, 그리고 가정 내의 민주주의를 회복시킨 계기가 되었습니다.


"본 소설은 허구이며, 등장하는 인물, 단체, 지명, 사건 등은 실제와 관련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