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의 다방 : 그레이네상스, 다시 피어나는 꽃
“응애, 응애!”
아기 울음소리에 최영자(66세) 씨는 반사적으로 눈을 떴다.
허리가 끊어질 듯 아팠다. 손목엔 파스가 덕지덕지 붙어 있었다.
“아이고, 우리 강아지 왜 울어. 할미 여깄어.”
맞벌이하는 아들 며느리를 대신해 손주를 봐준 지 벌써 3년.
‘황혼 육아’.
친구들은 "애 봐주면 골병든다"고 말렸지만, "어머니 아니면 저희 직장 그만둬야 해요"라며 울상 짓는 며느리를 외면할 수 없었다.
내 자식 키울 땐 젊기나 했지. 지금은 안아주기만 해도 무릎이 시큰거린다.
아기를 겨우 재우고 소파에 쓰러지듯 누웠다. TV에선 ‘시니어 모델’ 선발 대회 재방송이 나오고 있었다. 꼿꼿한 허리, 당당한 워킹.
나도 저렇게 늙고 싶었는데. 똥 기저귀가 아니라 예쁜 옷 입고 싶었는데.
잠결에 들려오는 자장가 소리.
“자장 자장 우리 아가...”
눈을 떠보니 아기 침대가 놓인, 포근한 파스텔 톤의 방이었다.
[시간의 다방 - Grandma’s Care]
침대 옆 흔들의자에 우아한 은발의 여인이 앉아 있었다.
캐시미어 숄을 두르고, 손에는 뜨개질 바늘이 들려 있었다.
그녀의 얼굴... 영자의 어머니였다. 영자가 직장 다닐 때 아이들을 키워주셨던, 늘 허리 두드리며 “괜찮다” 하시던 어머니.
“엄마...”
영자는 엄마 품에 안겨 엉엉 울었다.
“엄마, 나 너무 힘들어. 허리도 아프고, 내 시간도 없고... 엄마도 이랬어? 나 때문에 이렇게 힘들었어?”
어머니는 영자의 등을 토닥였다. 거칠지만 따뜻한 손길.
“힘들었지. 삭신이 쑤셨지. 근데... 니 새끼가 웃으면 그게 다 녹더라. 니가 맘 편히 일하는 거 보면, 내 허리 좀 굽어도 괜찮다 싶더라.”
어머니가 쟁반을 내밀었다. 젖병과 커피.
“자, 우리 딸 선택해라.”
“젖병을 들면, 손주가 마법처럼 순둥이가 돼. 밤에 잠도 잘 자고, 떼도 안 쓰고. 육아 스트레스 싹 사라지고, 그냥 인형 놀이하듯 예쁜 손주 재롱만 보면서 살게 해 줄게.”
“사직서를 내면, 육아 해방이다. ‘나 이제 못 한다’ 선언하고 짐 싸서 나와. 며느리가 곤란해하든 말든, 니 인생 찾아 떠나. 문화센터 다니고 친구들 만나고.”
“아무것도 안 하면... 넌 내일도 파스 붙이고 아기띠 매야 해. 허리는 더 굽어질 거고, 손목 터널 증후군은 심해질 거야. 그래도 니 손으로 키운 생명이 자라나는 경이로움은 볼 수 있겠지.”
영자는 젖병을 보았다. 편한 육아. 꿈같은 이야기다.
하지만 문득, 어제 손주가 처음으로 “함미” 하고 불렀던 순간이 떠올랐다. 그 옹알이 한마디에 3년의 피로가 눈 녹듯 사라졌던 기적 같은 순간.
그리고 퇴근한 며느리가 “어머님, 감사합니다” 하며 건네준 용돈 봉투와 손편지.
‘어머님 덕분에 제가 버텨요. 존경합니다.’
내 허리는 굽어가지만, 내 아들 가정은 꼿꼿하게 서고 있었다. 내가 엄마에게 받았던 그 사랑의 빚을, 이제 내리사랑으로 갚고 있는 것이다.
“엄마.”
영자는 젖병을 내려놓았다.
“나 안 도망가. 힘들어도 내 손주야. 내 핏줄이야.”
“안 아프겠냐? 니 허리.”
“아프지. 근데 엄마, 나 시니어 모델은 못 돼도, 우리 손주한테는 슈퍼 모델이야. 얘가 나만 보면 웃잖아. 나 좋다고 달려들잖아. 그럼 된 거지.”
영자는 블랙커피를 들었다.
“그리고 며느리가 이번 주말에 나 자유시간 준대. 그때 마사지나 받지 뭐.”
영자는 커피를 마셨다. 쓴맛 뒤에 오는 달달함. 믹스커피의 그 익숙한 맛이었다.
“오냐, 내 딸 장하다. 아프지 말고 해라.”
어머니가 영자의 허리를 쓸어주셨다. 그 온기가 뼛속까지 스며들었다.
다시 현실. 아기 울음소리가 들렸다.
“응애~”
영자는 벌떡 일어났다. 이상하게도 허리가 덜 아픈 것 같았다.
“오구오구, 우리 똥강아지 깼어?”
영자는 아기를 번쩍 안아 올렸다.
창밖으로 석양이 내려 앉고 있었다. 영자의 굽은 등 위로 햇살이 따뜻하게 내려앉았다. 그것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곡선이었다.
[작가 노트]
맞벌이 자녀를 위해 '황혼 육아’를 전담하는 5060 세대의 고충과 사랑. '손주병’이라는 신조어가 생길 만큼 육체적으로 고되지만, 주인공 영자는 편안함이나 회피 대신 가족을 지탱하는 버팀목으로서의 삶을 받아들입니다. 이는 단순한 희생이 아니라, 부모에게 받은 사랑을 다음 세대로 이어주는 '내리사랑’의 실천이라고들 합니다. 굽은 등 뒤에 숨겨진 자부심과, 손주의 웃음에서 찾는 행복을 따뜻한 시선이 아름답습니다. 하지만 저 역시 부족한 잠에 시달리시고, 자주 있지도 않던 친구 모임을 포기하곤 하셨던 부모님을 떠 올려보면 '과연 나는 같은 마음으로 해낼 수 있을까?' 싶은 생각이 듭니다.
본 소설은 허구이며, 등장하는 인물, 단체, 지명, 사건 등은 실제와 관련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