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의 다방 : 그레이네상스, 다시 피어나는 꽃
“회원님, 솔직히 말씀드리면 이 조건으로는 매칭이 좀 힘듭니다.”
결혼정보회사 상담실. 박미숙(62세) 씨는 얼굴이 화끈거렸다.
“나이가 있으신데 자녀분들도 출가 전이시고, 재산 분할 문제도 있고... 요즘 재혼 시장이 냉정하거든요.”
커플매니저의 말은 비수처럼 꽂혔다. 사별 후 10년. 외로워서 용기를 냈는데, 돌아온 건 '노년의 사랑도 스펙 싸움’이라는 현실이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미숙은 씁쓸한 마음에 눈물이 핑 돌았다.
‘내가 바란 건 그냥 따뜻한 밥 한 끼 같이 먹을 사람이었는데... 그게 그렇게 큰 욕심인가.’
호텔 로비 라운지를 지나는데, 그랜드 피아노 선율이 흘러나왔다.
연주자는 보이지 않고 피아노 건반만 저절로 움직이고 있었다.
홀린 듯 다가가니 피아노 위에 칵테일 한 잔과 초대장이 놓여 있었다.
[시간의 다방 - Last Romance Invitation]
초대장을 집어 드는 순간, 주변 풍경이 영화 <라라랜드>의 한 장면처럼 보랏빛 조명으로 바뀌었다.
그리고 맞은편 소파에 턱시도를 입은 중년 신사가 앉아 있었다.
조지 클루니를 닮은 은발의 신사. 그가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미숙 씨,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당신의 마지막 로맨스를 위하여.”
“당신은... 누구세요?”
“당신이 꿈꾸던 이상형입니다. 현실의 조건 따위 묻지 않는, 오직 당신의 영혼을 사랑해 줄 남자.”
신사가 쟁반을 내밀었다. 빨간 장미꽃, 계약서, 그리고 칵테일.
“선택하십시오, 당신의 사랑을.”
“빨간 장미를 잡으면, 영화 같은 연애를 선물해 드립니다. 20대로 돌아간 것처럼 심장이 터질 듯한 설렘, 밤새 통화하고 싶어 안달 나는 열정. 자식들의 반대? 재산 문제? 그런 건 사랑의 불꽃으로 다 태워버리게 해 드리죠.”
“계약서를 쓰면, 아주 쿨하고 합리적인 '졸혼 파트너’를 매칭해 드립니다. 감정 소모 없이, 여행 가고 싶을 때만 만나고 각자의 사생활은 터치하지 않는 서구적인 관계. 외로움은 덜고 자유는 지키는 최적의 솔루션입니다.”
“칵테일을 마시면... 다시 그 깐깐한 결혼정보회사로 돌아가야 합니다. 조건에 맞춰 억지로 만난 아저씨와 등산이나 다니며, ‘이게 사랑인가 정인가’ 헷갈리는 미지근한 연애를 해야 하죠.”
미숙은 계약서를 쳐다봤다. 졸혼 파트너. 편할 것 같긴 했다.
하지만... 그녀의 가슴속엔 아직 꺼지지 않은 불씨가 있었다.
남편과 사별하고 10년 동안 잊고 살았던 ‘여자 박미숙’.
누군가에게 예뻐 보이고 싶고, 설레서 잠 못 이루고 싶은 그 마음.
미지근한 숭늉 같은 사랑 말고, 마지막으로 한 번쯤은 데일 듯 뜨거운 에스프레소 같은 사랑을 해보면 안 될까?
‘그래, 나도 여자야. 늙어서 주책이란 소리 들어도 좋아. 한 번은 미쳐보고 싶어.’
미숙은 떨리는 손으로 빨간 장미를 집어 들었다.
“저... 뜨겁게 사랑할래요. 나중에 상처받더라도, 지금 이 심장 뛰는 거 느껴보고 싶어요.”
신사가 자리에서 일어나 정중하게 손을 내밀었다.
“탁월한 선택입니다, 레이디. 당신은 충분히 사랑받을 자격이 있습니다.”
미숙이 신사의 손을 잡는 순간, 왈츠 음악이 웅장하게 울려 퍼졌다.
눈을 뜨니 스페인 바르셀로나의 광장.
미숙은 빨간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 그리고 옆에는...
“미숙 씨, 오늘따라 더 아름답군요.”
사진 동호회에서 만났던, 평소 호감을 가지고 있던 김 작가님이 멋진 슈트 차림으로 서 있었다.
현실에선 소심해서 말 한마디 못 걸었던 그분이, 여기선 미숙의 허리를 감싸 안았다.
“우리, 춤출까요?”
두 사람은 광장 한가운데서 춤을 췄다. 사람들의 시선 따위 상관없었다.
마치 영화 주인공이 된 것 같았다.
그날 밤, 두 사람은 샹그리아를 마시며 밤새 이야기를 나눴다.
자식 걱정, 노후 걱정은 없었다. 오직 서로의 눈빛과 숨결만이 존재했다.
“사랑해요, 미숙 씨.”
“저도요...”
꿈에서 깬 미숙은 침대에 누워 있었다.
창밖으로 아침 햇살이 비쳤다.
꿈이었을까? 하지만 베개 맡에 낯선 폴라로이드 사진 한 장이 놓여 있었다.
바르셀로나 광장에서 김 작가님과 환하게 웃으며 찍은 사진.
그때 핸드폰이 울렸다. 사진 동호회 단톡방.
김 작가: 오늘 날씨가 참 좋네요. 출사 끝나고 차 한잔하실 분 계신가요?
미숙의 심장이 쿵쿵 뛰었다. 꿈속의 그 설렘이 현실로 이어지고 있었다.
미숙은 거울을 보며 립스틱을 발랐다. 평소보다 조금 더 붉은색으로.
“그래, 해보는 거야. 내 인생의 로맨스는 아직 엔딩 크레딧이 안 올라갔으니까.”
미숙은 핸드폰을 들고 답장을 썼다.
저요! 저 시간 돼요, 작가님.
전송 버튼을 누르는 미숙의 손끝이 20대 소녀처럼 파르르 떨렸다.
오늘, 그녀의 인생 2막 로맨스 영화가 크랭크인 했다.
[작가 노트]
무조건 참고, 기다리고 인내하는 건 이미 평생 해왔습니다. 인생은 선택의 연속이라는데 이상하게도 부모가 된 순간부터 모든 것이 확정되어 버린 것처럼 꼼짝할 수 없는 순간들이 많은 것 같습니다. 사랑이든, 모험이든, 새로운 일에 대한 도전이든, 더 이상 주변의 눈치 보지 않고 가슴이 이끄는 방향으로 가보는 것도 좋지 않을까요? 되돌아갈 시간보다 앞으로 나아갈 시간이 우리에게 더욱 더 소중해지고 있으니까요.
본 소설은 허구이며, 등장하는 인물, 단체, 지명, 사건 등은 실제와 관련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