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화. 존엄하게 떠날 권리, 사전연명의료의향서

시간의 다방 : 그레이네상스, 다시 피어나는 꽃

by 공감디렉터J


“삐- 삐- 삐-”

중환자실의 기계음. 산소호흡기에 의지해 가쁜 숨을 몰아쉬는 노인.
김영철(64세) 씨는 병상에 누운 아버지를 바라보았다. 앙상하게 마른 팔에 꽂힌 수많은 주삿바늘. 의식이 없는 채로 3년째.
'아버님... 이제 그만 편해지셔도 돼요.'
영철은 마음속으로 수백 번 되뇌었지만, 차마 입 밖으로 내지 못했다.
"자식 된 도리로 어떻게 산소호흡기를 떼냐"는 친척들의 비난이 두려워서. 그리고 혹시라도 기적이 일어날까 하는 미련 때문에.

병원을 나와 집으로 가는 길. 국민건강보험공단 앞을 지나는데, 로비 한구석에 상담 부스 같은 곳이 보였다.


[시간의 다방 - Well-Dying]

문을 열자 차분한 국화차 향기가 났다.
내부는 하얗고 고요했다. 창밖으로 노을이 지고 있었다.
테이블 맞은편엔 검은 두루마기를 입은 남자가 앉아 있었다. 갓을 쓰고 창백한 얼굴을 한, 영락없는 저승사자였다.
하지만 무섭기보단 어딘가 쓸쓸해 보였다.

“김영철 님. 본인 상담이십니까, 부친 상담이십니까?”

저승사자가 서류를 넘기며 물었다.

“둘 다요. 아버지... 저렇게 보내드리는 게 맞나 싶고. 저도 나중에 저렇게 될까 봐 무섭고.”

“죽음은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찾아오지만, 그 마지막 모습은 선택할 수 있죠.”

저승사자가 쟁반을 내밀었다. 서류 한 장과 인주, 그리고 커피.
서류의 제목은 [사전연명의료의향서].

“도장을 찍으면, 당신의 마지막을 스스로 결정하게 됩니다. 무의미한 연명 치료를 거부하고, 고통 없이 존엄하게 생을 마감할 권리를 갖죠. 자식들에게 '효도라는 이름의 고문’을 강요하지 않게 됩니다.”

“서류 파기를 하면, 죽음에 대해 생각하지 않게 해 드립니다. 그냥 닥치면 닥치는 대로, 운명에 맡기며 사는 거죠. 죽음이 두려워 외면하는 삶.”

“아무것도 안 하면... 당신은 아버지처럼 마지막 순간까지 기계에 묶여 있어야 할지도 모릅니다. 자식들이 당신의 생사를 두고 싸우는 모습을 영혼으로 지켜보면서.”

영철은 서류를 내려다보았다.
‘임종 과정에 있는 환자가 연명 의료 시행 여부를 스스로 결정...’
아버지는 이걸 쓰지 못하셨다. 건강하실 때 "나는 줄 주렁주렁 달고 살기 싫다"고 말씀하셨지만, 막상 쓰러지시니 자식들은 그 말을 따를 용기가 없었다.
그 결과가 저 고통스러운 3년이었다.

나도 그렇게 되고 싶은가? 내 딸이 나 때문에 죄책감을 느끼며 살길 바라는가?

“사자님.”

영철은 인주를 묻혔다.

“저, 찍겠습니다. 이건 자살이 아니잖아요. 자연스럽게, 인간답게 가겠다는 선언이잖아요.”

“후회 안 하시겠습니까? 1분 1초라도 더 살고 싶지 않으세요?”

“기계 힘으로 숨만 쉬는 건 사는 게 아니죠. 내가 내 의지로 눈 맞추고,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을 때까지만 살고 싶어요. 그게 내 자존심이고, 내 가족에 대한 마지막 배려입니다.”

영철은 꾹, 하고 도장을 찍었다.
붉은 인주 자국이 선명하게 남았다. 이상하게도 마음이 가벼워졌다. 죽음을 준비했는데, 오히려 삶이 더 또렷해지는 기분이었다.

“훌륭한 선택입니다. 당신의 죽음은 슬픔이 아니라, 아름다운 마침표가 될 겁니다.”

저승사자가 커피를 건넸다.
영철은 커피를 마셨다. 깊고 그윽한 향. 인생의 마지막에 맛보고 싶은 평온한 맛이었다.

“그리고 아버님 걱정은 마십시오. 곧 편안하게 모셔가겠습니다.”

저승사자의 말이 바람처럼 흩어졌다.


다시 병원 앞.
영철은 주머니 속에서 방금 등록한 사전연명의료의향서 등록증을 만지작거렸다.
그리고 핸드폰을 꺼내 딸에게 전화를 걸었다.
“지민아, 아빠랑 이번 주말에 맛있는 거 먹자. 할 말이 있어.”

영철은 하늘을 보았다. 노을이 아름답게 지고 있었다.
해는 지지만, 내일 다시 떠오른다.
아름답게 지는 법을 아는 사람만이, 내일의 해를 두려움 없이 맞이할 수 있다.




[작가 노트]
고령화 시대의 화두인 '웰다잉(Well-Dying)'과 '존엄사’. 아버지의 고통스러운 연명 치료를 지켜본 주인공 영철이 자신의 마지막을 스스로 준비하는 과정을 통해, 죽음을 삶의 일부로 받아들이는 성숙한 태도를 엿볼 수 있었습니다. 사전연명의료의향서 작성은 죽음을 재촉하는 것이 아니라, 남은 삶을 더 존엄하고 주체적으로 살겠다는 진지한 '선언’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본 소설은 허구이며, 등장하는 인물, 단체, 지명, 사건 등은 실제와 관련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