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왜 아빠와 딸은 곰배령 설피마을로 오게 됐을까?
47세 남성인 나는 1977년 서울 강서구 신정동에서 태어나서 신월동에서 자랐다. 당시엔 이 지역이 양천구로 분구되기 전이어서 강서구였다. 학교도 강서국민학교에 다니고 졸업했다. 지금도 양천구 신월동에 강서국민학교가 있는 이유다. 당시는 서울로 인구유입이 굉장히 많이 일어나던 시기였다. 학교는 오전반/오후반으로 나눠서 수업을 했음에도 책상 의자가 모자라 마룻바닥에 앉아서 공부를 해야하던 그런 상황이었다. 학교 신관을 새로 짓고 주변 동네에 새로 국민학교가 생기면서 상황은 차츰 나아지기는 했다.
서울 변두리 지역. 굉장히 공터가 많았고, 공사장도 많았다. 남부순환도로를 건너가면 양계장, 논밭, 야산에는 연못이 널려있었다. 자연히 벌레와 새와 짐승들이 많이 살았을테고 말이다. 겨울엔 눈싸움을 하고 여름엔 물놀이를 했다. 동네를 흐르는 개천은 썩어서 똥천이 됐지만 아이들은 커다란 고무통에 물을 받아놓고 물총 싸움, 물바가지 싸움 이런 걸 하면서 놀았다. 고무통으로 잠수하면 머리털이 곤두설 정도로 굉장히 시원했던 강렬한 기억이 있다. 개구리, 잠자리, 메뚜기를 쫓아다니고 야산에 눈이 쌓이면 토끼를 잡는다고 설쳤다. 물론 토끼를 잡지는 못했다. 참새를 잡는다고 마당에 작대기 받친 소쿠리로 함정을 만들고 쌀알을 뿌려놓기도 했다. 이것도 한번도 성공하지는 못했다.
대학에 들어가니 서울과 지역에서 방귀 좀 뀌었다고 하는 친구들이 모여들었다. 술 좀 마시고 친해지니 자연히 어린시절 놀았던 이야기를 하게 됐는데, 내가 이런 걸 하고 놀았다고 하면 지역 출신 친구들은 "서울에 그런데가 어디있어"라며 믿지 않았고, 서울(강남, 도심) 출신 친구들도 "서울에 그런데가 어디있었어"하면서 믿지 않았다. 행정구역은 서울이었지만 실질적으로는 시골 같았던 서울 강서구 신월동/신정동 출신의 독특한 유년기였던 셈이다.
아이가 생기고 과천에 살게 됐다. 과천은 양재천이 관악산과 청계산 사이를 흐르는 굉장히 자연히 풍부한 도시다. 아이와 함께 연주대에 오르면서 뱀과 도마뱀을 발견하고, 관악산에서 내려오는 계곡에서 물고기를 관찰하고, 양재천으로 날아오는 왜가리와 백로, 가마우지를 볼 수 있었다. 아이는 과천의 자연을 즐겼다. 아이가 초등학교 3학년이었던 가을 무렵, 오랫동안 알고 지내던 우리나라 야생동물 권위자인 한상훈 박사님이 솔깃한 제안을 주셨다. 강원도 인제군에서 산골생태유학 프로그램을 진행하는데 지원해보라는 취지였다.
당시 내가 다니던 미디어 벤처는 사업을 접을 논의를 하고 있었고, 다음해에 나는 무소속으로 지낼 확률이 굉장히 높았다. 자연에 깃들어 살고 싶은 생각이 강했던 나에게는 좋은 기회였다. 관건은 딸아이와 아내였다. 일단 아내와 상의를 했다. 이런이런 기회가 있는데 어떻겠냐고 의견을 물었다. 직장생활을 하는 아내는 강원도로 함께 옮길 수 없기 때문에 생태유학이 성사된다면 아내는 반 강제로 '기러기 엄마'가 되어야 하는 셈이었다. 그렇지만 며칠 고민하더니 아이의 뜻에 맡기겠노라고 했다.
딸 아이는 예전부터 자연 속에서 살고 싶어했다. 마당이 있는 집에서 반려동물과 농장동물을 키우면서 자연을 벗삼아 뛰노는 그런 상상을 그림으로 그리기도 했다. 아이에게 물었다. 선뜻 가겠다는 대답이 나올 줄 알았지만 아이는 많이 흔들렸다. 익숙한 과천 환경과 친구들, 학교를 떠날 생각을 하니 겁이 나는 모양이었다. 아이의 판단을 돕기 위해 생태유학 후보 학교들인 인제군 용대초, 월학초, 진동분교를 함께 답사했다. 밤에는 근처 펜션에 묵으면서 쏟아지는 별을 보고 숲을 만끽했다.
신청 마감일까지 이십일 정도 고민하던 딸아이에게 마지막으로 물었다. "네가 결정하는 게 중요해. 아빠는 네가 간다면 같이 가서 도와줄게. 네가 간다면 가는 거고, 안 간다면 안 가는 거야. 가든 안 가든 네 결정을 존중해." 그날 밤 딸아이는 생태유학을 떠나기로 결정했다. 지원서를 써내면서 희망 배정학교를 용대초-월학초-진동분교 순으로 적어냈다. 진동분교와 월학초는 두메두메산골에 들어있는 점이 마음에 걸렸고 특히 진동분교는 전교생이 7명일 정도로 너무 작아 괜찮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얼마 뒤 산골생태유학 관계자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딸아이가 생태유학 대상자로 선정이 됐는데 학교를 진동분교로 다닐 수 있겠냐고 물었다. 진동분교에 아이와 같은 학년인 여자아이가 한명 다니고 있는데 같이 친구하면서 다니면 어떻겠냐는 거였다. 고개가 갸웃거려지기는 했지만 가족 상의 끝에 진동분교에 가기로 결정했다. 지금 돌아보면 이 결정이 정말 신의 한수였다.
과천초 선생님과 생태유학에 대해 의견을 구한 적이 있었다. 그때 그 선생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경진이에겐 더 넓은 세상을 보여주고, 지적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는 게 필요할 것 같아요." 이 말씀은 지금 경진이에겐 더 넓은 자연과 생태계, 생태 감수성을 일깨워주는 설피마을에서 생물에 대한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는 걸로 현실화됐다. 시간이 더 지나고 돌이켜 볼 날이 오겠지만, 이 시간을 후회하지는 않을 것 같다. 단 1%도 말이다. 하루에 충실하고 일주일에 충실하고 순간순간에 충실한 이 시간이 정말 소중하다.
생태유학, 그게 뭐냐고, 왜 그런 걸 하느냐고, 또는 좀 더 과격하게 미쳤냐고 할 사람들이 꽤 많다는 걸 잘 알고 있다. 그런데 말이다. 그런 분들에게 꼭 한마디 해드리고 싶다. "한 번 와서 살아보시라"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