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언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생각보다 큰 용기가 필요한 일이다. 실제 사랑의 모습을 상상해 보면 그 실체는 남루하기 짝이 없다. 당신이 어제 본 로맨스 영화처럼 현실은 그리 아름답지 못하다. 이성 간의 사랑을 예로 들었을 때 사랑은 호르몬 작용에 지대한 영향을 받는다. 사랑에 빠지면 도파민, 페닐에틸아민, 옥시토신, 세로토닌 등 행복과 만족감, 쾌감 등을 자극하는 각종 호르몬이 분비된다.
대표적으로 도파민은 사랑을 할 때도 나오지만 맛있는 음식을 먹거나 이루고자 했던 것에 도달했을 때, 심지어 마약을 하거나 도박을 했을 때도 활성화돼 쾌감과 활력 상태를 지속시킨다. 또한 페닐에틸아민은 상대방의 단점이 잘 보이지 않도록 해준다. 흔히 콩깎지가 씌었다는 표현이 여기서 나오는 것이다. 이때 상대방을 위해서는 하늘의 별이라도 따줄 기세로 전투력(?)이 상승하는데 페닐에틸아민은 뇌의 이성을 마비시키고 정상적인 판단을 가로막는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호르몬 분비는 강한 내성성을 가진다. 채 몇 달을 넘기지 못하고 호르몬이 분비되지 않은 우리의 뇌는 권태에 빠지고 사랑은 더 이상 황홀하게 다가오지 않는다. 여기서부터 대부분 문제가 시작된다.
당신이 사랑을 겁내고 있다면 최근 이별을 경험했기 때문일 확률이 높다. 사랑의 종착점은 결국 이별이다. 이것이 진리인 이유는 인간이 유한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모든 사랑은 헤어짐을 전제로 시작되고 진행된다. 즉 모든 사람은 살면서 한 번은 이별을 경험하고 종국에는 사랑에 용기를 잃고 모든 세상을 타자화하기 쉽다. 심지어 애정을 갖던 오래 쓴 낡은 물건, 키우던 강아지, 가족에게까지 마음을 닫아버리는 경우도 있다. 반면 우리는 내가 알지 못하는 제3자의 부재에는 큰 감정의 동요를 느끼지 않는다. 다시 말해 모든 사람을 타자화한다면 슬픔의 감정 또한 없는 것이다. 과연 이 상태는 괜찮은 것일까.
해답을 찾기 위해 '어린왕자'를 오랜만에 펼쳤다. 생텍쥐페리의 소설 어린왕자에서는 길들이는 것에 대해 이야기한다. 길들인다는 의미는 ‘그’가 ‘너’가 되는 과정이다. 즉, '서로에게 익숙해지는 것', '서로에게 특별한 존재가 되는 것'을 말한다. 서로에게 익숙해지고 특별한 관계가 됐을 때 비로소 사랑을 할 수 있다. 길들인다는 것은 제3자인 타자를 2인칭의 관점으로 확장시키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대사회를 관통하는 키워드 중 하나는 '인간소외'다. 서로가 서로를 길들이려고 하지 않는다는 정도로 해석할 수 있을 듯싶다. 우리는 상처 받지 않기 위한 방어기제를 펼치면서 혹은, 사회적으로 물성화되면서 분절 과정을 겪는다. 나의 모든 열정을 쏟아부은 대상의 부재에서 오는 고통과 상처를 뇌가 기억하고 스스로 문을 닫아버리는 것이다.
또한 자본주의 사회에서 개인이 물성화를 통해 인간성 상실을 경험하고 결과적으로 관계의 단절, 소통의 부재, 물질만능주의로 귀결되기도 한다. 최근에는 사회적으로 일컫는 다양한 유형 또는 무형의 가치를 위해 가족까지 살인하는 극단적인 경우를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는데 이 같은 경우가 대표적 예다. 성숙한 인간관계에서 비롯돼 사람-사람 간 관계에서만 볼 수 있는 본연의 의미는 찾아보기 힘든 지 오래다.
모두를 타자화하는 사회에서 인간은 점차 파편화된다. 개개인이 목적이 되기보다는 수단으로 전락하는 까닭이며 사회적 상호작용이 부재한 탓이다. 파편으로 표류하는 인간은 어떤 관계의 책임 속에 존재하지 못하며 결국 사회적으로 자유로울 수 없다. 이에 대해 생텍쥐페리의 소설 ‘어린왕자’ 속 여우는 어린왕자에게 길들이는 것, 관계의 책임성에 대해 이야기한다. '책임'은 길들여진 관계에 대한 예의이며 약속이다. 내가 사랑하는 가족, 친구, 이 사회가 소중한 이유는 유한한 내 삶의 일부를 기꺼이 공유했기 때문이다. 책임은 인간을 인간답게 만들고 보잘 것 없이 가볍고 유한했던 나를, 세상에서 가장 무겁고 가치 있는 존재로 변화시키는 것이다.
사랑과 책임의 관계에서 원래부터 특별했던 사이는 없다. 용기를 내고 서로에게 관심을 쏟았기 때문에 특별한 사이가 되어 가는 것이다. 사랑은 지극히 주관적인 것이고 책임은 주관의 주체(나)에 의해 결정된다. 때문에 사랑은 나로부터 시작해 나에게서 끝나며 인간을 가장 실존적 존재로서 재탄생시키는 이상향으로써 의미를 가진다. 인간성의 회복, 즉 살아갈 수 있는 삶의 원동력으로써 사랑은 인간을 오롯이 완성한다. 이 얼마나 허무하고도 고귀하며 아름다운 일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