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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탐구와여정 Dec 14. 2020

[2-1] 복수라는 이름

오페라 '일 트로바토레' '리골레토'

배신을 당하거나 부당한 처우를 받거나 모욕을 당하거나 했을 때 분노에 휩싸이고 복수를 결심하게 된다. 자신이 겪은 슬픔과 절망에 버금가는 고통을 받도록 하기 위해 동등한 값(이에는 이, 눈에는 눈)이나 또는 상대에게 가장 치명적일 수 있는 영역을 찾아 공격하는 방식이 될 것이다.

대부분 복수에는 이유가 있게 마련이므로 복수는 최소한 감정적으로는 공감을 불러 일으킨다. 따라서 법적으로는 복수로 인해 죗가를 치루게 되더라도 그것과는 별개로 애초에 잘못을 저지른 상대에게 복수를 하는 것에 대해 당사자에게 공감을 하는 경우가 많다. 심지어 인과응보라는 관점에서 복수가 가져오는 통쾌함을 느끼기도 하는 것이다. 



오로지 복수를 위해 살다


베르디의 오페라 ‘일 트로바토레’는 복수에 관한 이야기다. 한 여자를 두고 두 남자가 삼각관계로 얽힌 와중에 두 남자는 다름 아닌 어린 시절 헤어진(형은 동생이 죽은 줄로만 알고 있고 동생은 형의 존재 자체를 모르는) 형제 사이이다. 오페라의 시작은 바로 두 형제가 헤어지게 된 경위를 설명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흥미로운 이야기를 전달하는 베이스의 목소리는 긴장감이 가득한 음악과 어우러져 온 관심을 집중시킨다. 

백작 디 루나의 동생이 갓난 아기였을 때 어느 늙은 집시 여인이 집으로 들어와 아이의 침대 옆에 서 있는 것을 유모가 발견한다. 소스라치게 놀라 소리를 지르며 쫓아내지만 여인은 아이에게 주문을 거는 것을 멈추지 않는다. 이에 여인을 엄벌에 처해 장작 더미 위에서 불로 태워죽이는 형을 내리게 되고 여인의 딸은 이 장면을 바라보면서 오열과 탄식, 호소를 멈추지 않는다. 

늙은 여인은 타 죽어가면서 자신의 딸에게 복수를 부탁하고 딸은 분노와 광기에 휩싸여 갓난 아기를 납치한다. 가족들은 아기가 사라진 것을 알고 찾아나서지만 나중에 잿더미 속에서 아기의 시체를 발견하고 망연자실한다. 아기를 납치한 여인을 찾아내려고 하지만 결국 헛수고로 끝을 맺는다. 하지만 디 루나는 이 여인을 반드시 찾아내겠다는 집념이 강하다.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Met Opera) '일 트로바토레'의 한 장면


2막이 되어 집시들이 모여있는 아지트에서 여인 아주체나가 아들처럼 키운 만리코에게 자신의 과거 이야기를 들려준다. 바로 자신의 어머니가 억울하게 죽어간 이야기로 1막 시작에서 들려준 이야기가 이 여인의 입으로 다시금 전달된다. 하지만 엄청난 반전을 확인하게 되는데 바로 자신이 납치한 아기를 복수의 의미로 불더미 속에 던져 넣었지만 나중에 알고 보니 그 시체는 납치한 아기가 아니라 자신의 아기였다는 것이다. 

한꺼번에 어머니와 자신의 아이를 잃은 기구한 운명의 여인이라니. 과연 제 정신으로 사는 것이 가능했을까 싶을 정도로 엄청난 고통을 겪은 여인은 하지만 납치한 아이를 자신의 아이처럼 키운다. 이야기를 들려주는 메조 소프라노의 노래는 고통과 비참함이 뒤섞여 통렬하고 섬뜩하다.

https://youtu.be/vufhNTU97JM


여전히 그녀가 품고 있는 복수의 칼날은 무디어지지 않고 더욱 더 날카로워지고 있었다. 이제 자신이 복수를 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만리코가 자신의 형인 줄도 모르고 정적이자 연적이 되어 으르렁거리는 와중에 백작 디 루나를 죽여주기를 바라는 것이다. 

하지만 만리코는 결투에서 디 루나를 죽일 수도 있었지만 왠지 모를 끌림에 차마 죽이지 않고 살려준다. 이후 디 루나는 만리코 무리가 머무는 요새를 포위한 상태에서 아주케나를 생포한다. 그녀가 자신이 찾던 집시 여인이라는 사실을 알아차리고 그녀를 불태우기 위한 장작더미를 준비하자 만리코 무리가 그녀를 구하러 오지만 결국 만리코마저 잡히게 된다.

만리코를 구하기 위해 레오노라가 자신을 던져가며 애를 쓰지만 결국 실패하게 되고 디 루나는 만리코를 처형한다. 이에 아주체나는 어머니의 복수를 드디어 이루었다며 큰 소리로 외친다. 


평생을 복수의 칼날만을 갈며 살아온 아주체나의 삶은 만신창이였을 것이고 광기 그 자체였을 것이다. 오죽하면 비록 원수의 아들이지만 자신이 아들처럼 키운 만리코의 죽음을 보고 안타까워하기 보다는 복수에 성공했다고 탄성을 지르다니 말이다. 

물론 복수를 이룸으로써 자신의 고통스러웠던 삶이 보상을 받는 듯한 느낌이 드는 것은 물론일 것이다. 복수를 위해 저지른 죄의 값으로 자신의 생명을 잃게 될지라도 목숨을 걸고 반드시 성공하겠다고 다짐한 무서운 집념이 그 결실을 맺은 셈이다. 

자신의 태생이나 혈육도 모른 채 끝까지 아무것도 알지 못하고 죽은 만리코의 죽음이 아주체나의 계략에 의한 것은 아니었기에 사실 복수가 성공했다기 보다는 복수가 이루어지는 것을 눈 앞에서 목도한 것에 가깝다. 물론 그 자체로 자신을 짓누르던 원한과 증오가 풀렸을 것이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이 오페라가 해피엔딩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마침내 복수에 성공했으니 해피엔딩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오히려 비극이라고 할 수 있다. 복수에는 성공했을지 모르지만 그녀에게 남은 것은 단 하나도 없으며 자신의 목숨마저도 사라지게 되었으니 말이다. 


어차피 아무 의미도 없이, 죽는 것만도 못한 삶을 어떻게든 버티며 살아온 것은 오로지 복수를 위한 것이었을테니 여한이 없을 것이다. 자신이 겪은 슬픔과 고통을 디 루나에게 남겨주고 그에게 죽는 것만도 못한 삶을 남겨주었으니 복수에는 성공했다. 

하지만 아무 상관도 없는 사람이 보기에도 복수로 얽힌 인간 군상들의 모습은 참으로 지켜보기가 힘이 든다. 복수에만 전념하게 되면 결국 자신의 삶은 물론이요 심지어는 자신의 생명보다도 더 소중한 것을 잃을 수도 있다는 사실은 과연 복수가 어떠한 의미가 있는지를 생각하게 해준다.



성공하지 못한 복수, 끝나지 않는 비극


복수가 가져온 뜻하지 않은 고통을 담은 오페라 베르디의 ‘리골레토’. 인간 이하의 취급을 받으며 온갖 수난과 모욕을 당하는 삶을 살아가는 리골레토는 더 이상 잃을 것도 없는 삶이기에 한편으로는 공작의 광대로 두려움없이 남들을 깎아내리고 놀리면서 살아간다. 

하지만 그에게는 자신의 목숨보다도 더 아끼는 딸 질다가 있었다. 리골레토는 모든 이들에게 이를 비밀로 하고 질다를 과잉보호하면서 그 누구와의 접촉도 피하도록 한다. 특히, 자신이 섬기는 공작은 천하의 바람둥이로 요주의 인물이다. 


운명의 장난처럼 순수하고 열정적인 질다는 공작의 꼬임에 속수무책으로 넘어가 버린다. 아버지의 과잉보호 속에서 세상의 질곡을 알지 못하는 질다는 공작과의 사랑으로 열병을 앓고 행복에 젖어 주체할 수 없는 감정으로 사랑의 아리아를 부른다. 

한편, 질다가 리골레토와 함께 있는 것을 본 사람들은 질다를 리골레토의 애인으로 오해한다. 리골레토의 비수와 같은 모욕으로 상처를 받은 사람들은 리골레토를 골탕먹이려는 의도로 질다를 납치해 공작에게 넘긴다. 

이러한 기회를 놓치지 않고 공작은 질다를 능욕하고 질다는 자신의 순수한 사랑이 파괴된 것에 대해 슬퍼한다.

이 사실을 알게 된 리골레토의 절망과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다. 거짓과 능욕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공작에 대한 사랑이 식지 않은 질다에 대한 안타까움과 한낫 유희의 대상으로 질다를 이용한 공작에 대한 분노로 리골레토는 복수를 결심하게 된다.


신체적인 결함으로 인간적인 대우를 받지 못하고 살아온 인생 속에서도 삶의 모든 고통과 우환은 오로지 자신이 감당하고 딸에게만은 좋은 것만 경험하게 하고 싶었던 아버지의 희망이 산산조각나면서 리골레토는 참담한 심경이다. 

살인청부업자를 고용해 공작을 살해하려고 결심한 리골레토는 청부업자의 여동생과 도락에 빠져있는 공작의 실체를 질다가 두 눈으로 목도하도록 한 뒤 공작을 잊으라고 한다. 하지만 공작에 대한 사랑이 너무도 깊은 나머지 다시 공작이 있는 곳으로 몰래 온 질다는 공작을 살해하려는 모든 계략을 알게 되고 공작도 살리고 아버지도 살리기 위해 자신이 대신해서 죽음을 맞게 된다.

딸의 죽음을 알게 된 리골레토는 비통함 속에 눈물을 흘리고 ‘여자의 마음은 갈대와 같이 항상 변한다’는 공작의 파렴치하고 후안무치한 아리아는 무심하게 무대를 가득채운다.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Met Opera) '리골레토'의 한 장면


과연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인지 리골레토의 인생을 보면 안타까움이 든다. 그의 인생은 그리 자랑할 만하다거나 칭찬할 만하다거나 하지는 못하고 오히려 비난을 받을 만하다고 할 수 있지만 그가 척추장애인으로 살면서 받았을 고통을 생각하면 그의 고된 인생이 측은하게 느껴지는 면도 없지 않다. 

더구나 자신의 잘못에 대한 응징이 자신이 아닌 자신이 가장 사랑하는 대상에게로 향할 때 그에 대한 정당성은 빛을 잃게 되고 오히려 그 잔인함과 부당함에 치를 떨지 않을 수 없게 된다. 딸이 납치되어 공작에게 넘어간 것을 알고 공작이 있는 곳으로 찾아가 딸을 납치한 사람들에게 호소하는 리골레토의 울부짖음은 애끊는 부정을 느끼기에 충분하다.

https://youtu.be/LQ4plxpIlTU

‘내 딸은 당신들에게는 아무 것도 아니지만 나에게는 전부다’라며 딸을 자신에게 돌려달라고 애원하는 장면에서 리골레토는 모든 것을 내려놓는다. 자신의 자존심 따위는 중요하지 않고 딸을 구할 수만 있다면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아버지는 그러나, 할 수 있는 것이 없어서 애가 탈 뿐이다. 


이러한 심정을 알기에 리골레토의 복수에 대해 충분히 이해가 간다.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 사랑으로 엮인 관계는 뜻하지 않은 변수로 실타래가 더욱 꼬이게 마련이다. 아무리 그래도 자신보다도 사랑했던 딸을 대신해 복수를 하려던 아버지에게 복수를 허락하기는 커녕 오히려 딸을 잃게 만들다니. 

물론 리골레토 자신이 극의 초반에서 딸의 잃어버린 명예를 복수하기 위해 공작을 찾아온 아버지를 조롱하고 모욕한 죗가를 치른 것이라 생각할 수도 있겠다. 그의 저주로 시작된 리골레토의 가혹한 운명은 자신의 목숨보다도 아끼는 딸을 잃는 것으로 끝이 나면서 너무도 처참하다 하지 않을 수 없다. 

복수가 성공해도 그 죗가와 더불어 어김없이 찾아올 허무함으로 그 효용가치가 논쟁의 대상이 되곤 하는데 하물며 복수도 하지 못하고 복수를 하려다 오히려 더 큰 절망에 빠져든 리골레코를 보며 마음은 한없이 복잡해진다. 도대체 무엇이 어디에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똑 부러지게 대답할 수 없어 더욱 착잡하다. 


복수는 누구의 것이든 될 수 있다. 누구든 복수를 꿈꿀 수 있다. 물론 모두가 복수에 성공을 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성공을 한다 하더라도 복수의 고리는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이다. 결국 누구를 위한 복수인지, 이를 잘 생각해야 할 것이다. 자칫 그 누구를 위한 것도 아닌 복수가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2-2에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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