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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탐구와여정 Dec 11. 2020

[1] 사랑의 배신을 대하는 법

오페라 '라마무어의 루치아' '카발레리아 루스티카나' '가면무도회'

사랑은 정절을 바탕으로 한다. 정절이 깨지는 순간 그 관계는 파탄이 나는 것이다. 그리하여 배신으로 인한 연인의 절망과 상대에 대한 증오는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다. 오페라의 단골 주제도 사랑과 배신, 그리고 복수인 경우가 많다. 강렬하고 달콤한 사랑의 감정과 서로에 대한 애틋한 마음만큼이나 아름다운 장면은 흔하지 않기 때문이다. 사랑의 고백 또는 사랑의 환희를 담은 아리아가 흘러나오기에 더없이 안성맞춤인 것이다.


도니제티의 오페라 ‘루치아 디 라마무어’ 속 루치아는 이러한 강렬한 사랑의 주인공이다. 어머니의 죽음에 상심하여 공원으로 야간 산책을 다니던 루치아 앞에 나타난 사나이, 그로부터 마음의 위로와 안정을 얻게 된 루치아는 그를 사랑하게 된다. 

메트로폴리탄 오페라(Met Opera) '라마무어의 루치아' 한 장면

문제는 그가 루치아 가문의 정치 숙적인 레이븐스우드가의 아들, 에르가르도였던 것. 하지만 두 사람 사이의 사랑은 어떠한 장애물도 뛰어넘을 수 있을 정도로 이미 강렬해진 상태였다. 설상가상으로 가문이 무너져가는 위기에 처한 루치아의 오빠가 자신의 가문을 도울 수 있는 아루투로 경과 루치아를 결혼시키려는 계획을 세운다. 

루치아와 에드가르도의 연애를 알게 된 루치아의 오빠는 자신의 계획에 걸림돌이 되는데다 천하의 숙적인 라이벌 가문과의 연애를 가만둘 리가 없다. 오빠는 두 사람을 끊어놓으려는 계략을 세우고 아무 것도 모르는 루치아는 정치적 특명을 받아 프랑스로 떠나야 하는 에드가르도와 둘만의 결혼을 서약하고 반지를 주고받은 뒤 잠깐 동안의 이별을 마주한다.


에드가르도로부터의 소식을 손꼽아 기다리던 루치아에게 오빠는 모든 편지를 차단하고 심지어 사랑을 저버리는 내용의 편지를 마치 에르가르도의 편지인 양 루치아에게 건넨다. 배신감에 분노하고 좌절한 루치아는 오빠의 강권에 여전히 저항을 해보지만 결국 어쩔수 없이 아르투로 경과의 결혼을 진행한다. 결혼식 당일 배신으로부터의 충격에서 아직 벗어나지 못한 루치아는 얼이 빠진 상태로 아르투로 경과의 결혼 서약을 마친다.

루치아의 결혼 소식을 듣고 결혼식 연회에 나타난 에드가르도는 루치아의 배신에 몸을 떨며 루치아에게 저주를 퍼붓고 그녀의 손가락에서 반지를 빼내어 절망과 분노 속에 자리를 떠난다. 루치아는 배신으로 인한 충격에서 채 벗어나기도 전에 에드가르도의 모욕과 모든 진실 앞에서 망연자실하게 되고 정신을 놓아버리고 만다. 


폭풍우처럼 휘몰아치듯 일어난 일련의 사건들과 한꺼번에 그 전말을 드러낸 진실, 한 순간에 자신에게 퍼부어진 감정의 소용돌이, 이 모든 것들을 루치아는 혼자서 감당해야만 했던 것이다. 자신의 사랑을 방해한 오빠의 계략을 알고난 후의 분노, 그 꾀임에 넘어간 자신의 어리석음에 대한 한탄 등은 여러 감정 중에서도 주변부에 속하는 것들이다. 사랑의 배신으로 지쳐있던 루치아에게 날벼락처럼 날아든 연인의 비난은 순식간에 루치아를 배신을 당한 사람이 아닌 배신을 한 사람으로 만들어 버린 것이다.  


결국 루치아는 아르투로 경과의 첫날밤에 그를 칼로 찔러 죽이고 피로 흥건한 순백의 드레스 차림으로 나타나 정신이 나간 상태로 광란의 아리아를 부른다. 이 장면에서 루치아는 에드가르도와 이루어지지 못한 사랑에 대한 한풀이라도 하듯이 달콤한 사랑의 말을 속삭이다 이내 절망에 빠져 쓰러져 죽는다. 

https://youtu.be/92jiitUEahg

루치아에게 퍼부은 에드가르도의 비난과 모욕은 사랑의 배신으로 인한 절망과는 또 다른 차원의 절망을 가져왔음에 분명하다. 루치아는 사랑의 배신에 대한 절망을 스스로 온전히 감당하고 있었다. 제발 사실이 아니기를, 사실이라 하더라도 어쩌면 자신에게 되돌아오기를 바랐을지도 모른다. 시간만 허락된다면 기다렸을 것이다. 

하지만 시간에 쫓겨 서둘러 결혼을 하게 되었고 난데없이 들이닥친 에드가르도의 비난 앞에서 속수무책 당할 수밖에 없었다. 자신이 감당할 수 있는 절망과 고통의 수준을 넘어서는 충격으로 미치지 않을 수 없었던 루치아에 대해 연민의 감정을 느끼는 것은 당연한 것이리라.


한편으로는 사랑의 배신에 대한 에드가르도의 반응이 아쉬운 것은 어쩔 수 없다. 과연 사랑의 배신 앞에서 연인에 대한 저주가 최선이었을까. 배신에 대한 감정은 슬픔과 분노를 넘어선 충격으로 다가올 것은 틀림없다. 사랑의 크기가 큰 만큼 그 충격은 더욱 더 엄청날 것이다. 그리고 이는 어떠한 형식으로든지 복수를 불러올 수도 있다. 결혼식 연회장에서 루치아에 대한 공개적 비난도 에드가르도의 복수였다. 하지만 과연 이러한 식의 복수가 최선이었을까. 



최선의 복수란?


사랑과 배신을 다룬 또 다른 오페라를 보자. 마스카니의 ‘카발레리아 루스티카나’는 1막으로 구성된 짧은 오페라다. 서정적이고 평화로운 간주곡이 유명한 이 오페라는 하지만 사랑과 배신, 복수라는 처절하고 비극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 

연인 관계인 산투자와 투리두는 하지만 투리두가 예전 연인이었던 유부녀 롤라와 사랑을 나누면서 파국을 맞이하게 된다. 투리두가 군대에 간 사이 알피오와 결혼한 롤라로 인해 절망과 슬픔에 빠져 있던 투리두는 산투자와 만나 새로운 사랑을 하면서 그 아픔을 치유한 바 있다. 

하지만 예전 연인을 잊지 못하는 룰라가 투리두를 사귀는 산투자에 대해 질투를 하면서 노골적으로 투리두를 유혹하여 다시 사랑을 나누게 되었던 것이다. 투리두의 배신으로 고통스러운 나날을 보내던 산투자는 어떻게 해서든 연인 투리두를 되돌리기 위해 호소도 해보고 애원도 해보지만 투리두는 거들떠 보지도 않는다. 오히려 함부로 대하면서 모욕을 하고 차라리 떠나가라고 소리지른다. 

자신을 꾀어 사귀어 놓고는 예전 연인에게로 돌아간 투리두를 더 이상 두고 볼 수 없어 산투자는 룰라의 남편에게 모든 사실을 알린다. 분노한 알피오는 투리두에게 결투를 신청하고 결국 투리두는 알피오의 칼에 죽임을 당하고 만다. 


여기에서 의문이 하나 생긴다. 왜 룰라의 남편 알피오는 자신의 아내에게 복수를 하지 않고 투리두에게 결투를 신청한 것일까. 이 오페라의 제목이 ‘카발레리아 루스티카나’라는 사실을 상기하자. 시골 기사도라는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기사도로 상징되는 남성의 덕목은 명예와 용맹, 정의와 미덕, 약자에 대한 보호에 있다. 즉, 기사도 정신에 입각하여 남성은 남성과 대결을 하는 것이다. 

남성이 여성에게 복수를 하는 것, 특히나 직접적으로 폭력을 행사하는 것은 기사도의 정신에서는 절대 용납될 수 없는 것이다. 배신에 대한 복수의 대상은 두 명이다. 즉,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것에서 배신은 시작된다. 따라서 남자의 입장에서 배신자는 아내이지만 복수의 대상은 아내와 더불어 아내가 사랑하는 남자에게까지 확장되는 셈이다. 

조그만 시골 동네에 사는 사람들 사이의 갈등이기에 모두가 아는 사람들이고 따라서 아는 사람에 의해 자행된 배신은 더욱 더 큰 실망감으로 다가올 수밖에 없다. 이러한 의미에서 남자끼리의 대결은 사랑을 건 싸움인 동시에 공개적인 인민재판에 해당된다고 할 수 있다. 설사 배신의 상대가 이긴다 할지라도 그 사람은 동네에서 정상적으로 살아갈 수는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렇듯 남자 친구의 배신에 대한 복수로 산투자는 룰라의 남편에게 그 사실을 알리는 것으로 간접적인 복수를 한 것이다. 하지만 산투자는 남자 친구가 죽임을 당하기를 바라는 마음은 아니었을 것이다. 남자 친구의 모든 잘못을 감싸안고 다시 시작할 마음으로 자신에게 돌아오라고 애원을 했는데도 돌아오지 않고 오히려 자신을 모욕하고 내팽개치자 분노한 것이었다. 

https://youtu.be/n6D5ZNwqYB0

어쩌면 룰라의 남편이 겁을 주면 남자 친구가 단념하고 자신에게 돌아올 것이라 생각했을 수도 있다. 어찌 되었든 자신이 할 수 있는 부분을 하고 주변 사람들을 이용해 남자 친구의 마음을 되돌리려는 생각이었을 것이다. 물론 상대에게 자신이 직접 복수하는 것이 가장 깔끔하고 정당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산투자는 남자 친구에게 복수를 하고 알피오는 자신의 아내에게 복수를 하면 될 것이다. 



남자의 복수, 여자의 복수 


사실 남자가 배신한 여자에게 행할 수 있는 복수는 다양한 편이다. 남자가 배신한 여자에게, 특히 부부의 경우 정절을 의무를 저버린 아내에게 남편이 할 수 있는 복수는 아내를 버리거나 스스로 죽기를 요구하거나 심지어 죽이기까지 한다. 마치 정절의 의무는 여자에게만 있다는 듯이 여자에 대한 남자의 복수는 많은 경우 잔인하다. 

베르디의 오페라 ‘가면무도회’에서 안카르스트롬 공작은 자신의 친구이자 왕인 구스타브와 자신의 아내 아멜리아가 자신을 배신한 것에 대한 복수를 담고 있다. 


빈 오페라하우스 '가면무도회' 한 장면

그 누구보다도 충신인 안카르스트롬은 왕을 시해하려는 모든 음모를 차단하고 왕을 지키기 위해 노력해왔다. 그러한 와중에 왕과 자신의 아내가 밀회를 즐기는 장면을 목도하게 된 것이다. 안카르스트롬에게 처음에 든 생각은 자신의 아내에게 자결을 요구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내 안카르스트롬은 자신의 복수의 대상이 아내보다는 왕 구스타브에게 가야 합당하다는 결론을 내리게 된다. 

그 누구보다도 믿었던 친구이자 충성을 바친 왕 구스타브가 자신의 아내를 연모하는 것은 금쪽같은 우정을 배신하는 것이자 자신의 충성에 대한 터무니없는 보상이 아닐 수 없었던 것이다. 분노에 차 복수를 다짐하며 부르는 안카르스트롬의 아리아는 아름다웠던 날들에 대한 회상으로 애잔하다가도 이내 피의 복수를 예고하는 처절한 몸부림으로 끝을 맺는다.

https://youtu.be/GtzvmfDACFU


하지만 반대로 이미 마음이 떠난 남자에게 여자가 할 수 있는 복수란 그리 많지 않다. 공개적으로 모욕하거나 망신을 주는 것 말고는 딱히 없다. 하지만 정절을 지키지 못한 것에 대한 모욕이나 망신이 사회 통념상 여자들에게 더욱 치명적이었기에 남자들에게는 이러한 복수가 그리 효과적인 복수가 되지 않을 수 있다. 이러한 방법이 주로 남자들이 여자들에게 행하는 복수에서 많이 쓰였다는 사실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물론 오페라에서 남자가 이러한 방법을 사용한 경우 대부분은 남자가 너무 가혹하다고 생각하고 여자를 측은하게 생각하는 경향이 강하다. 역시나 ‘라 트라비아타’에서 알프레도 아버지의 부탁으로 그를 떠난 비올레타에게 배신감을 느낀 알프레도가 파티에 찾아가 그녀를 공개적으로 모욕하는 장면은 모든 이들의 공분을 사기에 충분했다. 


그렇다면 남자의 배신에 대해 여성이 할 수 있는 최선의 복수는 무엇일까. 남자가 배신을 해도 여전히 그를 사랑하며 그가 돌아오기만 기다리다 스스로 희생하거나(‘나비부인’, ‘리골레토’) 남자가 배신한 것으로 오해했지만 그럼에도 남자를 끝까지 기다린 끝에 오해를 풀고 다시 결합하는(‘아이,퓨리타니’) 방식의 지고지순한 사랑, 인내와 희생만이 해답일까.


‘카발레리아 루스티카나’의 산투자처럼 자신을 배신한 상대에 대한 불타는 분노로 그에 대한 복수를 위해 다른 사람을 이용하여 죽음을 맞이하게 할 것인가. 알피오에게 룰라의 불륜을 알리자 분노한 알피오가 투리두와 결투를 하러 떠나고, 뒤늦게 양심의 가책으로 괴로워하는 산투자의 모습은 복수의 끝이 기쁨이 아니라 고통이라는 사실을 이야기하는 것만 같다. 



한없이 가벼운 배신, 자신까지 파괴하는 복수, 과연 정답은?


사랑의 배신에 대해 상대에게 행하는 어떠한 형식의 복수든 오페라에서는 많은 경우 그 결과가 가혹하거나 잔인하거나 비겁한 모습으로 그려지곤 한다. 또한 복수를 행한 자에게도 그 결과가 결코 좋지만은 않다. 더 나아가 배신을 당한 슬픔으로 인해 스스로를 희생한다면 이는 일어나서는 안될 엄청난 비극이다.

 

배신은 한 없이 가볍다. 그것을 무겁게 받아들이는 순간 복수는 시작된다. 그리고 무거운 복수는 결국 비극을 낳는다. 그 비극이 누구의 비극이 될 것인지는 철저히 배신을 당한 자에 의해 결정된다. 배신한 자에게는 결정권이 없다. 배신의 대가는 처분을 기다리는 것뿐이다. 

단지 바라는 바는 배신을 가볍게 여기는 자는 무겁게 받아들이고, 배신을 무겁게 여기는 자는 가볍게 받아들였으면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배신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고, 복수라는 이름으로 자신을 파괴하는 일도 없을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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