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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탐구와여정 Oct 15. 2024

진정 원하는 그림을 그리다(2)

[노년의 화가는 무엇을 그렸나] - 존 싱어 사전트

존 싱어 사전트는 유럽에서 모더니즘이 발아하던 시기에 그 기운을 흠뻑 받아 활동한 미국인 화가다. 미국인 화가라고는 하지만 부모가 미국인이라는 사실 외에는 오히려 이탈리아에서 태어나고 파리와 영국에서 주로 활동했기에 그의 정체성은 유럽인에 가까울 지도 모른다. 하지만 보수적인 유럽에서 모더니즘이 푸대접을 받는 중에도 미국에서는 그의 명성이 높이 쌓여갔고 노년기 즈음엔 보스턴 라이브러리의 벽화 작업을 위해 미국에 오래 머물기도 했으므로 그에게서 미국인이라는 뿌리를 ‘굳이’ 찾아주고자 하는 것이 그리 어색하거나 억지스러운 일은 아닐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미국에서의 그의 명성은 유럽의 귀족 사회를 열망하는 미국의 상류층에 의해 형성되었다. 따라서 유럽에서 활동하는 미국의 뿌리를 가진 작가에 대한 후한 점수가 매겨진 결과임을 부인할 수는 없다. 하지만 사전트의 인기가 그의 태생이나 정체성, 활동 무대에서 기인한 것만은 아니었다. 초상화로 이름을 날린 그의 그림에는 확실히 매력적인 무언가가 있었다. 

요즘으로 치면 실물 크기의 입간판을 연상시키는 전신 초상화의 압도적인 크기는 물론 마치 그림에서 걸어나올 듯한 인물의 생동감, 다소 상기된 얼굴과 경계를 늦추지 않는 듯 여유로운 중에도 힘이 느껴지는 자세 등 전체적으로 인물의 얼굴은 사실적이면서도 이상적으로 묘사하면서도 인물이 가진 분위기를 환상적으로 신비롭게 전달하는 것이 마치 연극의 한 장면을 보는 듯 극적이면서도 감상적이다.

그가 그린 초상화를 보고 있으면 그에게 초상화를 의뢰한 인물이 그림 속 자신의 모습을 보며 얼마나 만족스러워했을지 확신하게 된다. 특히, 단순히 기록용이나 보관용이 아닌, 상류층의 과시용으로 사용될 초상화로 이보다 더 완벽한 것은 없어 보인다. 비록 그의 초상화가 기존의 정교하고 화려한 선과 색의 사용이나 매끈한 화면 처리 부분에서 볼 때는 다소 거칠고 부족하게 보일 수는 있으나 모더니즘 화가에게 이러한 전통적인 접근은 실력의 문제가 아니라 선택의 문제였다. 

새로운 시대가 열리고 새로운 사회가 조성된 19세기 유럽의 화가들은 그림을 그리기 위해 시선을 과거가 아닌 현재에 두었다. 정형화된 틀 속에서 모두가 똑같은 그림을 그리기 보다는 날 것 그대로의 생생함과 순수함을 표현하기 위한 노력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를 위해 가장 필요한 것은 인물이든 풍경이든 그 정수를 순간적으로 포착하는 일이었다.

마네에서부터 시작된 모더니즘의 열기는 이후 인상주의, 후기인상주의로 다양하게 뻗어나갔고 존 싱어 사전트도 이러한 흐름에 동참하게 되었다. 살롱에 출품한 초기작 ‘엘 할레오(El Haleo, 1882)’는 스페인 무희의 힘찬 움직임을 강렬하게 표현한 작품으로 센세이션을 불러일으켰으나 중심에서 벗어난 구도와 다소 밋밋한 색, 무엇보다도 내러티브의 부족으로 좋은 평가를 받지는 못했다. 특별한 인물이나 스토리도 없고 오히려 평범하다 할 수 있는 대중적인 무대의 한 장면은 당시의 기준에서 그림의 가치가 떨어지는 것이었다. 역시나 비슷한 맥락에서 그려진 마네의 ‘올랭피아’를 루브르에 입성시키기 위해 노력한 존 싱어 사전트의 몸부림은 자신의 그림이 추구하는 바가 무엇인가를 유감없이 웅변하기에 충분했다.

사실 초상화는 화가에게 있어 부와 명성을 가져다 주는 일종의 도구적인 측면이 있었다. 살롱에 출품하는 작품은 크게 역사화와 초상화로 나뉘었는데 왕족이나 귀족을 그린 초상화의 출품은 초상화 의뢰를 받기 위한 좋은 통로가 되었다. 물론 역사화를 통한 살롱에서의 입선이 대규모의 공식적인 커미션으로 이어지는 가장 확실한 성공의 열쇠임에 분명했으나 초상화의 의뢰 또한 화가로서의 부와 명성을 쌓는 데 확실히 도움이 되었다. 이를 감안할 때 살롱에 출품하는 초상화는 분명 매력적인 것이어야만 했다. 자신의 테크닉을 확실히 보여줄 뿐 아니라 인물을 매력적으로 보이도록 하는 능력이 요구되는 것은 당연했다. 

물론 모더니즘의 선구자로 투쟁적인 길을 걸어온 마네는 살롱에 출품하는 초상 작품까지도 자신의 부모나 동료 등 주변의 인물을 사실적으로 그림으로써 성공을 위한 과정으로서가 아닌 자신의 생각을 보여주기 위한 무대로 삼았다. 마찬가지로 마네를 추앙하고 따르는 무리 중 하나였던 존 싱어 사전트 또한 역시나 같은 듯 다른 방식으로 자신의 길을 찾아가고 있었다. 즉, 분명히 매력적이기는 했지만 살롱의 기호에는 맞지 않는 사실성과 즉흥성, 과감함이 존재했던 것이다.

다행인 것은 존 싱어 사전트는 살롱 외에 다른 루트가 있었다. 비록 비공식적이고 소소한 것이긴 했으나 그가 가진 예술인 친구들의 네트워크는 힘든 시기를 견디는 데 정서적으로나 실질적으로 큰 도움이 되었다. 지인을 통해 초상화 의뢰를 받은 존 싱어 사전트의 초기 초상화는 기존의 딱딱하고 전형적인 것에서 벗어난 자연스러움과 생동감, 그리고 독특함이 있었다.  


그의 작품 ‘Madame Edouard Pailleron’(1879)는 정원을 거니는 전신의 파이에롱 부인을 그린 것으로 야외에서의 편안하면서도 우아한 모습을 포착하는 데 성공적이었던 토마스 게인스보로의 작품을 연상시키면서도 인물의 지위와 성격을 보여주는 것을 넘어 마치 살아숨쉬는 듯한 생동감을 잘 표현하고 있다. 실내에서의 모습을 그린 남편의 초상화보다 훨씬 강렬한 주목을 받은 그녀의 초상화는 이후 존 싱어 사전트가 초상화로 명성을 이어가게 되는 중요한 계기가 되는 작품이다.

사전트가 그린 초상화들. 좌로부터 [에두아르 파이에롱 부인](1879), [집에 있는 파찌 박사](1881), [마담 X](1884)

이후 존 싱어 사전트는 초상화에 두각을 나타내며 자신만의 독특한 스타일로 특색있는 작품들을 만들어냈다. 역시나 공식적이라기 보다는 네트워크에 의한 의뢰가 주를 이루었는데 당시 유명세가 있던 외과 의사 ‘Dr Pozzi’1881)의 초상화는 기존에 보던 초상화와는 확연히 다른 스타일로 특히나 강렬한 인상을 주기에 충분했다. 피처럼 새빨간 가운을 걸치고 자신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메스를 손에 든 채 역시나 빨간 비단 슬리퍼를 신고 있는 포찌의 모습은 직선적이라기 보다는 교묘하고 표면적이기 보다는 은밀하다. 잘 나가는 의사의 자신감 넘치는 포즈를 통해 완벽주의적인 속성을 드러내는 한편 온 몸을 감싼 실크 재단의 하늘하늘한 가운은 섬세하면서도 예민한 감성을 보여준다. 직업적인 속성과 인간적인 속성이 교차하면서 이중적이고 상호 배반적인 듯한 이질감이 건장한 몸에 걸친 실크 가운으로 정교하게 표현되었다. 최면과 정신을 의술에 접목하여 센세이션을 불러일으킨 그의 초상은 마치 의사라기 보다는 마법사에 가깝게 느껴질 정도로 다소 충격적이면서도 신선하다.  


이와 더불어, 가녀린 목과 어깨가 돋보이는 ‘마담X(Portrait of Madame X’(1884)는 그의 대표작으로 불리기에 손색이 없을 정도로 매력적이다. 도도하게 고개를 옆으로 돌리고 전신은 정면을 향하고 있는 도발적이면서도 연극적인 모습은 사교계 여왕의 초상화로 최적임에 틀림없다. 연기인 듯 다소 과장된 모습이지만 그녀가 뿜어내는 아우라는 주변을 밝히기에 조금의 모자람도 없다. 숨을 죽이고 그녀를 지켜보게끔 만드는 그녀의 우아한 자태는 순간의 집중력을 요구한다.

하지만 이는 파리의 보수적인 살롱에서는 통하지 않는 접근이었고 그의 그림은 호평은 커녕 악평에 가까운 스캔들을 불러일으키며 사전트의 입지를 흔들었다. 공식적인 자리에서 인정을 받는 일이 손쉽지 않게 되자 존 싱어 사전트는 자신의 활동지였던 파리를 떠나 영국에 정착했다. 파리보다는 유연했던 영국에서 그는 자신의 친구들과 함께 교외에 머물면서 여유로운 일상을 만끽했다. 그곳에서 존 싱어 사전트는 교류하던 많은 이들을 화폭에 담았다. 

존 싱어 사전트의 초상화는 전형성을 탈피함으로써 충격과 매력을 선사한다. 그가 이러한 접근을 취할 수 있었던 것은 물론 비공식적인 루트를 통한 의뢰에서 오는 유연성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이는 그가 자신의 친구들을 모델로 그린 초상화에서 더욱 빛을 발했다. 인물의 특징을 얼굴 표정이나 손, 옷이나 장신구 등 몇 가지로만 표현하는 대신 온 몸으로 등장 인물의 기운을 드러내는 듯한 그의 초상화는 마치 삶의 현장에서 한 장면을 정지시킨 듯한 느낌을 자아낸다. 내 눈 앞의 인물은 눈, 코, 입, 손, 옷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온전한 전체로 존재한다. 따라서 존재감 그 자체로 우선 압도당하는 듯한 느낌을 주는 존 싱어 사전트의 초상화는 자세히 들여다보기 위한 용도가 아니다. 보는 이가 초상화 앞으로 가까이 다가가 하나하나 살펴보도록 만드는 것이 아니라 초상화 속의 인물이 그림 밖으로 성큼 걸어나와 보는 이에게 다가오는 것 같은 인상을 준다. 

우연의 일치인지는 알 수 없으나 이러한 성격은 특히 여성을 그린 초상화에서 두드러진다. 그 중에서도 미국에서 그린 여인의 초상화들은 유럽의 그것들보다 더 활기차고 기운이 넘친다. 이는 유럽과 미국의 사회 분위기의 차이에서 비롯된 것일 수도 있고 계층의 차이에서 비롯된 것일 수도 있다. 분명한 것은 당시 미국 사회의 상류층 여성들은 집안에서의 수동적인 역할에서 벗어나 사회 진출에 활발하고 보다 적극적인 자기 표현이 두드러진 면이 있었고 이것이 인물의 특성을 날카롭게 포착한 존 싱어 사전트의 초상에 그대로 드러난 것이다.

초상화가로 명성을 쌓은 존 싱어 사전트는 하지만 자신의 재능이 초상화에서만 인정을 받는 것에 아쉬움과 서운함을 느꼈던 듯하다. 성공을 위한 지름길이자 화가로서의 생계 유지에 더없이 도움이 되는 초상화는 화가에게는 어쩌면 미끼 상품에 가까운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멋진 초상화를 통해 상류층의 주목을 받고 더 많은 기회를 얻고자 하는 마음은 화가라면 누구에게나 있는 것이다. 습작을 위해 자화상이나 주변 인물들의 모습을 끊임없이 그리는 수많은 화가들에게 초상화는 가장 기본적인 그림이자 더 큰 기회를 얻기 위한 발판이 되기도 한다. 

초상화로 두각을 나타내기는 했지만 다른 그림을 그릴 기회는 없이 초상화에만 전념해온 존 싱어 사전트에게는 초상화가 일종의 족쇄로 여겨졌음에 분명하다. 그만큼 초상화에 대한 인기가 너무 높아 그 수요가 끊이지 않은 데에서 온 행복한 고민이라고 할 수도 있지만 노년의 존 싱어 사전트에게는 더 이상 양보할 수 없는 지점에 다다랐음을 의미했다.

1905년 보스턴 라이브러리의 벽화를 그리는데 전념하느라 초상화를 그릴 시간적 여유가 없었던 것은 사전트에게 좋은 구실이 되었다. 급기야 사전트는 이제 초상화는 더 이상 그리지 않겠다고 선언하기에 이르렀다. 초상화로 명성을 얻었고 초상화에 누구보다도 재능을 보였으며 사실적이면서 아련한 분위기의 독특한 초상화로 많은 인기를 얻은 존 싱어 사전트는 비로소 초상화의 한계를 벗어나고 싶었던 것이다. 

사실 초상화라는 것이 인물의 외모는 물론 사회적 지위, 성격을 드러내는 일종의 기록의 의미가 있지만 무엇보다도 가장 중요한 것은 의뢰인의 마음에 들도록 그려야 한다는 사실이다. 사진이 등장했음에도 초상화에 대한 수요가 끊이지 않은 것은 사진이 전달하는 사실성을 뛰어넘는 그 무엇을 그림을 통해 얻고자 하기 때문이다. 그것이 그 사람만이 가진 독특한 분위기이든, 포토샵과 같은 외모의 보정이든, 그림을 통해서는 사진의 평등한 사실성에 대한 왜곡 또는 윤색된 진실이 가능해진다. 

실제로 사진을 통해서는 특별한 기능이 추가되지 않는다면 모든 것이 강약이나 명암없이 있는 그대로 보여진다. 시선을 끌어모으는 독특한 특징도, 차별성도 찾아보기 힘들다. 하지만 그림의 경우 화가가 특별히 강조하고자 하는 바를 명암이나 색감, 구도 등의 기술을 이용하여 얼마든지 표현할 수 있다. 물론 초상화의 경우 그 범위가 한정되기는 한다. 기껏해야 얼굴 표정이나 손 동작, 자세 등이 전부이지만 놀랍게도 훌륭한 화가의 초상화에는 사진에서는 볼 수 없는 강렬함과 아우라가 느껴지는 것을 경험하게 된다. 

존 싱어 사전트는 이런 면에 있어 특히나 뛰어났다. 그의 초상화는 살아숨쉬는 듯 사실적이면서도 흐릿하거나 아련한 분위기가 흘러넘치는 서로 상반된 느낌이 드는 것이 특징인데 이는 그가 얼굴을 표현함에 있어서는 주름 하나, 힘줄 하나, 피부의 결 하나하나를 세심하게 표현하는 동시에 옷이나 배경 등 얼굴 이외의 것은 마치 인상주의를 연상시키듯 거친 붓질로 채워나갔기 때문이다. 이렇듯 시선이 가야할 곳을 정확히 고정시키고 나머지 부분은 흐릿하게 표현한 것은 실제로 우리의 눈이 사물을 바라볼 때 경험하는 시선의 고정과 분산 작용과 일치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의 뛰어난 관찰력과 표현력이 단지 초상화에만 국한되어 나타나는 것은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더군다나 초상화의 경우 그림을 의뢰한 인물이 만족하도록 그려야한다는 일종의 압박감과 더불어 그림을 완성하기까지 의뢰인과 대치하고 있어야 하는 상황이 그리 즐겁기만 한 경험은 아닐 것이다. 자신의 친구나 친밀한 관계의 사람을 그리는 일이 아닌 이상 비즈니스로 인한 대면은 짧을수록 좋지 아니한가. 

그렇다면 존 싱어 사전트가 진정으로 그리고 싶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바로 풍경이었다. 인물이 중심이 아니라 인물도 전체 풍경 속에 하나의 대상으로 자리하는 그러한 풍경 말이다. 예전부터 존 싱어 사전트는 의뢰를 받은 그림이 아닌 경우에는 언제나 인물보다는 배경이 더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그림을 그리곤 했다. 그것이 야외든, 실내든 그 속에 자리한 인물이 압도적인 위치를 점하지 않는다. 그림 속 인물들은 그림으로 그려지기 위해 인위적인 자세를 취하지 않고 그저 자연스러운 모습을 하며 일상을 살아가고 있다. 그 어느 누구도 자신이 그림으로 그려지고 있다는 사실을 자각하거나 신경쓰는 이가 없다. 자신의 일에 몰두하거나 아무 생각없이 무언가를 응시하고 있을 뿐이다. 사전트는 그림 속 인물을 만족시키기 위한 그림을 그리기 보다는 화가 자신이 그리고자 하는 것을 그리며 스스로 만족하고 있었던 것이다.

1900년대 초반부터 존 싱어 사전트는 베니스를 무대로 풍경화를 그리기 시작했다. 그림 속 풍경에서는 더 이상 사람이 주인공이 아니다. 사람이 등장하지 않는 풍경이 대다수이고 사람이 등장한다 해도 풍경의 일부일 뿐이다. 그림 속 풍경의 주인공은 베니스 그 자체다. 베니스를 수놓은 아름다운 건축물과 항구에 정박한 배들, 운하를 타고 가다 보이는 다리와 길을 가다 마주친 건물의 벽, 하늘을 올려다보니 보이는 건물의 장식물 등 눈길이 닿는 베니스의 모든 장면들을 화폭에 담고자 하는 놀라운 의지와 뛰어난 관찰력이 돋보이는 작품들이다. 

사전트가 그린 베니스의 풍경들. [그랜드 커날](1902-1904), [곤돌리어들의 시에스타](1904)

존 싱어 사전트에게 있어 풍경이 가지고 있는 의미는 무엇이었을까. 언제나 묵묵히 그 자리를 지키고 있는 것들, 시간이 흐르고 세월이 지나도 변함없이 건재하고 있는 것들, 언제든 다가가 마음껏 보고 담아낼 수 있는 것들이 아니었을까. 그 자체로 그림이 되는 것들,  더도 덜도 아닌 눈에 보이는 그대로의 것들, 어떠한 규칙도, 규정도 필요없이 보이는 대로 그리고 그리는 대로 그림이 되는 풍경은 존 싱어 사전트에게 더 없는 자유와 평안을 안겨주었는지도 모른다.

  그런 그에게도 초상화는 여전히 자신의 정체성과도 같은 것이었던가 보다. 노년이 되어 그토록 거부하던 초상화를 마지막으로 다시 한 번 그리게 된 사전트. 그가 그린 것은 그 누구도 아닌 바로 자신의 가장 친한  친구인 소설가 헨리 제임스의 초상이었다. 자신과 비슷한 처지로 유럽에서 활동한 미국인이었던 헨리 제임스는 존 싱어 사전트가 영국에서 정착하도록 강하게 어필하고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그리고 이후 두 사람은 지속적으로 서로 의견을 나누고 격려와 위로를 건네면서 삶과 커리어를 지탱하는 힘이 되어 주었다. 그런 그를 위해 자신이 해줄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이 바로 초상화를 그리는 일이었던 것이다. 

[헨리 제임스의 초상](1913)

노년의 소설가이자 자신의 가장 친한 친구에 대한 존 싱어 사전트의 선물은 과연 그 무엇보다도 묵직하고 진중한 것이었다. 깊게 패인 미간의 주름은 세월의 깊이와 고뇌를 보여주고 아래로 향한 시선과 입술은 쉽게 굴하지 않겠다는 단호한 의지를 보여준다. 자켓 안에 입은 조끼의 겨드랑이께를 쥐고 있는 왼손은 캐주얼하면서도 자연스럽게 느껴지며 화면을 가득 채운 육중한 몸매는 강인함과 카리스마를 풍긴다. 더불어 이 그림을 그리면서 존 싱어 사전트가 느꼈을 친밀함과 긴장감은 초상화가 가진 날카로운 양날의 매력이 아니었겠는가. 그를 평생 따라다닌 초상화가라는 타이틀은 이 순간 그 절정에 달하며 존 싱어 사전트는 비로소 깨닫지 않았을까. 그의 꼬리표인 초상화가는 족쇄가 아니라 날개였음을 말이다. 그가 말년에 그린 친구의 초상화는 남을 만족시키기 위한 것도 아니었고 성공을 위한 발판으로 삼은 것도 아니었으며 테크닉을 뽐내기 위한 것도 아니었다. 오로지 자신의 마음을 담은 친구를 위한 초상화, 즉 그림을 그린 자신과 그림 속 친구가 교감하는 듯한 초상화, 이것이야말로 진정 사전트의 필생의 역작이라 하지 않을 수 없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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