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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리틀루이스 Jan 22. 2023

관계에 벽이 생기는 일은 막을 수 없다.

  

1. 관계에 벽이 생기는 일은 막을 수 없다.


필자는 웬만해서는 타인과 얼굴 붉힐 일을 만들려 하지 않는다. 

당시의 상황이나 감정이 타인을 향한 비난이 정당하다 외쳐댈지라도 정말 웬만해서는 참으려고 노력한다. 그러고는 유순한 태도로 상대를 대하려고 노력한다.


왜냐하면 감정과 자존심이 시키는 그대로 말하고 행동했다가 낭패를 봤던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필자는 처음에는 자신의 목소리를 낼 줄 모르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성인이 된 후로 자기 목소리를 내기 위해 노력을 기울였고, 나중에는 본인의 감정과 생각을 충실히 따르는 목소리를 낼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그것이 과해져 때론 상대를 비방하고, 인격을 내리누르는 언사가 나오게 되는 경우도 더러 보이는 것이었다. 그래서 이제는 자기표현에 집중하기 보다는 상황에 맞는 표현을 유도리 있게하려 한다.)


그런데 최근에 들어서 새로이 경험하는바가 있는데, 서로가 아무리 노력하더라도(친구나 가족관계에서든, 직장에서는 더더욱) 벽은 어떻게든 생긴다는 것이었다.

  

먼저 언급하고 싶은 것은 필자 자신만 노력하고 상대방은 노력하지 않는 게 결코 아니란 거다. 


만약 이 글을 읽고 있는 사람이 자신이 속한 집단 안에서 ‘나 혼자만 노력한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면, 그 생각은 틀렸다는 말을 해주고 싶다.

왜냐면 노력하지 않는 사람은 없기 때문이다.(관계에서 있어서 특히) 다만, 그 강도와 중심가치가 다를 뿐이다. 아주 이기적인 사람도 타인을 향한 일말의 연민은 있다.(바늘구멍보다 작은 정말 일말의 연민일 수 있다.) 대신에 연민을 품는 것보다 자기중심적으로 생각하고 행동하여 자기 유익을 챙기는 것을 더 중요하게 여기기 때문에 이기적인 모습을 띠는 것이다. (만약 우리가 그 작은 연민을 인정해주지 않는다면 그에게는 갱생의 여지가 전혀 없어지게 되는데, 그러면 그가 아무리 세상의 모든 것을 다 가졌더라도 너무 불행한일 아니겠는가.)     

필자 주변의 사람들, 가족, 연인, 친구들, 직장사람들 모두가 다 필자와 잘 지내기 위해 애쓴다. 이따금씩(아니, 자주) 필자 자신만의 생각에 갇혀 시야가 좁아져 다른 사람들은 나와 잘 지내기 위해 애쓰지 않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들은 노력하고 있다.


그렇다면 일차적인 결론은, 필자도 그렇고 필자의 주변 사람들도 그렇고 모두가 애쓰고 있다는 것이라 할 수 있겠다.


하지만 정말 이상하게도 누군가와 함께 무엇을 하며 시간을 보내다보면 벽이 생기는 것을 목격하게 된다.

  





2. 대부분은 벽을 보강하려 든다


직장 상사라고 해서 그의 지시가 전부 합당한 것은 아니며, 모든 질책들이 인격모독을 비껴가는 것도 아니다. 가족이라고 해서 한 눈에 척하고 다 이해하고 공감하고 포용되는 것이 아니다.(인정하기 보다는 그냥 무시해버릴 때가 더 많지 않던가) 친구라고 응당 요구하는 것들을 기꺼이 다 들어줄 수 있는 것도 아니다.(짜증이 날 때가 더 많지 않던가)


앞선 불편한 상황들을 인지하는 순간 벽은 이미 우리 안에 세워져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우리는 상대의 이미지를 떠올릴 때마다 거추적대는 그 감정을(시기와 미움, 염증 등) 부풀리게 된다.

 

예시로 필자가 앓았던 부정맥을 들려 한다.(완벽한 예시는 못 되니 감안해달라.) 필자는 평소에 심장이 뛰는 것을 느끼지 못한다. 아마 대부분이 그럴 것이다. 하지만 부정맥이 뛰면 심장이 어떻게 뛰고 있는지 아주 잘 느껴지고, 무엇보다 무척이나 거슬리게 된다. 부정맥이 뛰는 것이 거슬리기 시작하면 부정맥은 하루 종일 느껴진다. 매 시간마다 부정맥이 뛰는지 뛰지 않는지 집중하게 된다. 그럴수록 부정맥은 더 악화되는 것 같은 느낌을 받게 된다. 점점 딜레마에 빠지는 것이다.


웬만하면 우리는 우리 목소리를 내고 우리가 덜 귀찮고 우리가 편한 것이 ‘좋은 것’이라는 생각을 하기가 쉽다.


그렇게 품게 되는 마음은 “당신 말 중에는 틀린 부분도 있어” 혹은 “방금 질책에는 일 외에도 인격을 비하하는 말이 섞여 있었어” 혹은 “왜 맨날 꼭 저런 식으로 해야만 할까” 혹은 “저 xx는 생각이 없나?”하는 의미를 품은 심상들이 많다.


해야 할 말을 적절히 하는 것은 응당 옳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하지만 상단의 말들, 꼭 말로 표현하지는 않더라도 상단에 해당하는 마음(감정)을 품고 있노라면 우리는 자연스레 무뚝뚝하게 굴거나, 차갑게 굴거나, 상냥하게 대하는 듯 하면서도 거리를 두거나, 아예 상종을 하지 않으려 들게 된다.


벽은 ‘그 힘’을 받아 점점 견고해진다. 관계에 벽이 아니라 선을 그은 사람이라면, 그 선은 점점 더 또렷해지고 두꺼워지게 되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그 힘’이란, 앞에서 말한 ‘심상이나 감정들’이 아니다.

‘당신이 틀렸다’ ‘나를 비하했다’ ‘생각이 없나?’하는 그러한 심상들 그자체가 ‘그 힘’이 되지는 못한다. ‘그 힘’은 이 심상들을 일궈낸 기저에 위치해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내가 가장 중요하다]는 자기중심적인 생각이다.


자기중심적인 생각은 굳이 노력하지 않아도 내면에 쉽게 생성된다. 따라서 제아무리 인격이 성숙한 사람일지라도 관계에서의 실수를 범하게 되는 것이다. 자기중심적인 사고는 반죽에 들어간 효모와도 같아서 아무리 새로운 반죽을 덧대더라도 빵 전체가 부풀도록 만든다.


더군다나 근래 들어 어디서든 쉽게 들을 수 있는 말이 “너 자신을 사랑하라”인데, 이 말 뜻은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그 의미가 하늘과 땅 차이로 갈라질 수 있다.


나 자신을 사랑한다는 것이, ‘나를 증오하고 단죄하고 저주하는 마음을 내던지고, 내가 잘 되기 위해 나 자신에게 필요한 것을 찾고 나를 사랑해주는 사람을 사랑하고, 풍요로움으로(꼭 물질적인 부가 아니더라도 마음으로도) 가득한 삶을 향해 나아가라’는 뜻이라면 정말 좋은 의미이다.     
하지만 이렇게 이해되는 경우도 있는데 ‘나를 힘들게 하는 것은 무엇이든 집어치우고, 나 편한 데로, 나 즐거운 데로, 내가 원하는 데로 살아가리라’하고 받아들여진다면, 이건 정말 스스로를 끝없는 고통과 외로움 가운데로 내던지는 마음이라 할 수 있다.     


가뜩이나 사람은 자기중심적인 사고를 하는 존재인데, 누군가가 ‘나를 사랑하라’는 말의 의미 중 후자의 의미를 받아들이게 된다면, 그는 자기가 파낸 동굴 속으로 들어가 또 굴을 파내고 또 굴을 파내며 더 깊고, 좁고, 습하고, 어두운 곳으로 들어가는 삶을 살게 되는 것이다.

    





3. 벽을 인정하고 부숴나가면 된다.


관계에 문제가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끝까지 문제를 보지 못한다.


관계의 문제를 보았지만 그것을 직면하지 않고 우회적인 방법으로(모른 척하기, 일부로 더 바빠지기, 어떻게든 시간 끌기, 다른 사람 시키기, 아픈 척하기, 용돈주기, 아부하기 등) 비겁하게 굴면 당장의 사태는 넘어가는 듯 보이지만 그 안에는 곪은 염증이 크기를 부풀리게 된다.


무엇보다 본인 스스로가 문제를 직면하지 못하는 성정을 가만히 내버려두고 있다면, 곪아서 터져버리게 될 문제들을 삶의 미래에 차곡차곡 적립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

 

위에서 말했듯이 서로가 아무리 노력을 하더라도 벽이 생기는 일은 막을 수 없다.


만약 당신이 타인과 본인 안에 세워진 벽을 인지하고 있다면(상대방이 얄밉거나, 그의 잘못만 보이는 것이 아니라), 걸리적거리는 무언가가 관계를 가로막고 있는 것을 느끼고 있다면, 당신은 타인과 건강한 교류를 할 수 있는 초석을 이미 다지고 있음을 알았으면 좋겠다.

(벽을 보지 못하고 상대를 미워하고, 상대의 잘못만 보는 사람이 허다하다.)


이때 자기중심적인 사고를, 거기서 나온 생각과 감정을 따른다면 벽은 더 높아지고 두꺼워질 것이다.


벽은 더 높고 두꺼워져서 부수기 어렵기 전에, 초장에 부숴버리는 것이 가장 현명하다.

왜냐하면, 자존심을 내세워봤자 결국 마주하는 것은 ‘홀로 내버려짐’이기 때문이다. 그 누구도 심지어 가족도 자기중심적인 사람과 함께하기를 좋아하지 않으며, 사랑하기는 더더욱 어려워한다.

 

그래서 사람은 방법을 찾기는 했다. 수지타산적인 사람의 마음을 이용하여, 권력과 부를 쌓아 영향력을 키우고 그것으로 사람들의 관심과 사랑(겉치례적인)을 받는 것이다.

그러나 수지타산적으로 관심과 사랑을 받는 사람은, 그보다 더 깊고 숭고한 사랑을 받을 수 없다. 그리고 그렇게 사랑할 줄도 모르게 된다. 수지타산적으로만 대우 받다가 수지타산 적으로 떠나게 되는 것이다.     


관계에 벽이 생겼다면 먼저 다가서고, 먼저 손 내밀라.

져주고, 품고, 끈덕지게 참고, 이야기를 들어주라.

사과하고 용서를 받고, 용서를 받기 전에 먼저 용서하라.


이것은 미치도록 힘든 일이다.

나 자신이 죽는 것처럼 힘들게 느껴질 수도 있다.


그러나 돈과 규모와 숫자로 다 해결되는 이 시대에 그것으로도 어떻게 해볼 수 없는,

‘가치’가 내면에 자리 잡게 됨을 보게 될 것이다.


그 가치를 알면 고난이 복으로 여겨지게 된다.




ps - 3장에서 다룬 것처럼 벽을 부수고 나면, 벽이 허물어진 사이는 이전의 관계를 초월한 관계가 성립되게 된다. 사람과 사람을 톱니바퀴에 비유하자면, 그들은 예전보다 덜 삐그덕거리고 조금 더 잘 맞게 된다. 왜냐하면 당신이, 혹은 상대방이 서로에게 맞춰 스스로를 다듬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잘 맞춰 돌아가는 톱니바퀴는, 쉽게 빠지거나 흔들거리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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