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사람과 연을 맺고 살아간다.
사회와 단절된 삶을 사는 사람들이 늘어가고는 있다.(필자도 사회와 완전한 단절을 원하며 자연인으로 살아가려는 준비를 했던 때가 있다.)
하지만 그들 또한 다른 사람들이 제공하는 1~4차 산업의 재화(서비스)를 소비하고 있으며, 이 모든 것은 ‘다른 사람들’에 의해 주어지는 것이기에 ‘그들’은 사람들과 완전히 단절 됐다고는 할 수 없다.
서론에서 말하고 싶은 것은, ‘사람으로부터 완전히 독립적인 인간은 없다’는 것이다.
이 부분에 동의한다면 다음 논의로 넘어가고자 한다.
인간이 이 땅의 ‘기존 자연’들과 가장 크게 다른 것이 있다면 ‘자아’가 있다는 사실이 아닐까 싶다.
(기존 자연들이라 함은 물리법칙에 해당하는 모든 것을 뜻한다. 식물, 동물, 광물, 흙, 공기, 햇빛, 바람,
건축/토목 시설물, 책상, 자동차 등등.. 거기에는 ‘인간의 몸’도 포함되어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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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갑작스레 거시적인 논점으로 뛰어들어 미안하다. 필자는 인간에게 자아가 있다는 점을 증명해내는 작업은 건너뛰었다. 인간에게 자아가 있다는 것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암묵적으로 동의하고 있을 만큼 자명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약 그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그 ‘동의하지 않음’이 그에게 자아가 있는 증거라고 말해주고 싶다. 그 이상을 원한다면 파스칼의 [팡세]를 읽어보라고 권해주고 싶다.)
자아가 있다는 것은 우리가 아무리 동일한 물리적 상황에 있을지라도 사람에 따라 생각하는 바와 결정하는 바가 달라질 수도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같은 사무실에 있더라도 먹고 싶은 점심메뉴가 다를 수 있고, 원하는 출근시간과 퇴근시간이 다를 수 있다.
같은 공원을 산책하더라도 누구는 얼굴에 스치는 햇빛과 바람을 느끼기도 하며, 누구는 저기 옆 텐트에서 흘러나오는 치킨냄새에 홀려 있을 수 있다.
절친한 친구든, 형제든, 자매든, 남매든, 쌍둥이든 의견이 갈리는 부분은 ‘절대적으로’ 생기기 마련이다.
(필자는 아직 결혼하지 않았지만, 부부는 말할 것도 없다고 생각한다. 평생 다른 문화권에서 살아온 두 사람이 한 몸으로 만났는데 어떻게 의견이 갈리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의견이 갈릴 때 그 상황을 해결하는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는데, 원만하게 해결되는 경우가 있는 반면 앙금이 남게 되는 경우도 있다.
필자는 타인과 원하는 것이 다른 상황에서 이를 원만하게 해결하는 방법을 모르는 사람이었으며, 그 상황을 지나오면서 필자 안에 앙금이 남거나 혹은 필자가 타인에게 앙금을 남기는 경우가 허다했다.
타인과 원하는 것이 다를 때 필자가 취했던 방법은 고집을 피우거나, 강제하거나, 괜찮다고 하면서(타인이 필자보다 높거나 강할 때) 따라주는 척하다가 마음으로는 거리를 두며 결국 관계를 단절하는 쪽으로 향하는 것이었다.
필자는 자기 목소리를 내야 하는 용기가 필요한 상황을 회피하였고, 타인의 용기 있는 목소리 또한 두려워했었다. 따라서 논의와 협의를 할 줄도 몰랐고, 겉으로는 양보를 하면서도 마음속으로는(자기 목소리를 내지 못함 때문인지) 상대를 미워하고 아쉬운 감정을 품게 됐다.
위의 4번과 같은 상황들을 지나며 우리는 타인을 향한 불편한 감정을 품게 된다. 그리고 3번에서 말한 것처럼 불편한 감정들이 만들어지는 상황은 일상 가운데 늘 있기 마련이다.
이 불편한 감정들을 내면에 쌓아놓고 그것들을 ‘음미’하거나, 음미까지는 아니더라도 지속적으로 생각하는 습관(그것을 끊어내고 다른 것에 집중하지 못하는 습관)을 지니게 되면, 불편한 감정들은 더 커지게 된다.
혹은 4번에서 말한 것보다 훨씬 더 고통스런 상황을 당한 경우(예로 사기를 맞거나, 폭행이나 따돌림을 당하거나, 모욕을 받은 경우)에는 내적 고통은 말로 형용하기 어려우며, 우리는 우리에게 피해를 준 사람을(정확하게는 그 사람의 이미지를) 미워하고 증오하고 상상 속에서 그들에게 똑같이 정서적 물리적 폭력을 행사하고 심지어는 ‘죽이기까지’한다.
상대가 눈앞에 없더라도 스스로의 마음속에 타인의 이미지를 그려내며 미움과 증오와 분노와 공포(필자는 공포를 느끼는 경우도 더러 있었다)를 느끼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
필자는 평생 한 사람을 증오해왔다. 그 사람을 향한 증오는 국내에 있든 해외에 있든 필자를 따라다녔다. 홀로 방에 있을 때도, 붉게 물든 황혼의 바다를 바라볼 때도, 친구들과 어울려 놀 때도 그 사람에 대한 이미지와 증오는 불쑥불쑥 내면에 솟아올랐다. 그래서 어디에서 뭘 하든지 미움, 증오, 침울함 등의 감정들이 필자를 뒤흔들어 놓았던 것이다.
- 필자가 [부서진 자의 소망]이라는 시에다가 타인을 미워하고 두려워하는 사람의 삶이 어떠하였는지를 담아두었으니 궁금하면 읽어보길 바란다.
타인을 향한 증오는 필자가 원해서 생긴 것이 아니다. 필자는 타인에게 가해자였던 경우도 참 많았지만, 그 가해는 필자가 ‘피해의식’에 사로잡혀있는 사람이었기에 더 심하게 벌어진 것들이었다.
그렇게 의도치 않게 타인을 미워하거나 혹은 두려워하는 삶을 살게 된 필자는 타인을 향한 증오가 스스로에게 얼마나 ‘독’이 되는지 비로소야 깨닫게 되었다.
어디를 가든지 따라오는 이 ‘독’은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필자를 자기 생각 속에 가둬버린 것이다.
문제는 아무리 발버둥 치더라도 증오에서 빠져나와지지가 않았다는 것이다. 오히려 발버둥 치면 칠수록 미움과 자기연민의 늪으로 빨려 들어가고 말았던 것이다.
삶은 고통이었다. 아주 지독한 고통이었다.
필자는 자유롭지 못했다. 필자의 몸에 꽉 맞는 관 속에 들어가 살고 있는 기분이었다. 숨 쉬는 것조차 버거운 순간들도 많았다.
그 사람이 곁에 있지도 않은데, 아주 멀리 있는데, 미워서 너무 미워서 필자가 큰 피해를 입어서 다 부수고 찢고 뜯고 박살내고 싶었다.
그런데 아무리 증오해도, 미워해도, 도저히 해소가 되지 않는 것이었다.
때로는 필자가 받은 피해들이 가득 떠오르고, 때로는 필자가 타인에게 저지른 잘못들이 떠올라 증오와 공포가 왔다갔다 반복했다.
필자는 자유롭고 싶었다.
자유를 찾기 위해 떠오른 첫째 방법은 자살이었다.
내게서 내 몸을 완전히 벗어버리는 것, 어딜 가든 따라오는 이 지독한 감옥에서 탈출하는 방법으로 자살 말고는 떠오르지 않았던 것이다.
두 번째 방법은 필자 내면에 남아있는 증오의 단초를 제공한 ‘당사자가 사라져 버리기’를 바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결국 첫째 방법도, 둘째 방법도 해답으로 다가오지 않았다.
왜냐하면(둘째 것에 대한 이유부터 말하자면), 증오의 단초를 제공한 당사자가 ‘물리적으로’ 사라져 버린다 하더라도, 나는 얼마든지 그의 이미지를 내면에 불러내어 증오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자살이 왜 도망침의 방법이 되지 않느냐면 그것이 ‘자살’이기 때문이다.
(현재 쓰려고 하는 말은 지금 당장 생각나는 대로 적는 것이기 때문에 ‘맞다 혹은 옳다’라고 결론지을 수 없음을 감안해주기를 바란다.)
자살은 자아가 있는 존재만이(간혹 동물들 중에 자살을 하는 경우가 있는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그것이 실제로 ‘자살’인지, 혹은 자연의 법칙에 따른 것인지는 증명할 필요가 있다.) 행할 수 있는 행위이며,
물리적인 요소가 완전히 사라지더라도, 물리적인 요소들을 지배하고 있던 ‘자아’의 행방은 어떻게 될는지 알 수 없다.
그리고 필자는 그 자아의 행방이 물리적 삶의 죽음으로 끝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혹은 믿는다.)
그렇기에 한 자아가 타인을 증오하는 매커니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상태라면, 그는 물리적 몸을 벗어나든, 관계적인 결속에서 단절이 되던, 지속적으로 증오와 맞닿아 있게 된다고 보는 것이다.
증오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단 하나였다.
필자는 누군가를 증오함이 스스로를 벼랑 끝으로 내모는 것임을 최근에서야 알게 됐으며,
그 증오 때문에 나도 누군가에게 피해를 주고, 사람을 신뢰하는 기본 세팅이 깨지고, 세상을 미워하고 두려워하고 그렇게 숨어버리는 자신을 보았다.
어떻게든 증오에서 벗어나려 했지만, 벗어나지지가 않았다. 어떤 방법도 통하지 않았다.
증오는 증오를 부풀렸고, 자기연민은 자기연민을 부풀렸다.
그러다 마침내 자유를 얻게 된 경로는 ‘용서’였다.
용서함이 자유로움으로 가는 길이란 것을 알게 된 경로는 성경이었다.
성경과 그 성경을 토대로 삶을 살면서 깨달음을 얻은 사람들이 쓴 글이었다. 결국 그 중심은 성경이다.
아 그러나, 이게 가장 중요한 사실인데
필자는 용서가 답인 줄 알면서도 용서가 되지 않았다.
말로만 “용서하겠습니다.”했을 뿐이지 전혀 용서가 안 됐다.
도리어 자존심이 상하고, 억울하고,
심지어 내 자아가 죽는 것 같았다.
그럼에도 ‘증오의 굴레의 갇혀 피 말리는 삶을 사는 것’보다는 용서하는 것이 낫다는 판단이 들었다.
증오의 노예로 사는 것이 어떤 삶인지 너무나도 잘 알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필자는 기도의 방법을 바꿨다.
“용서할 수 있게 해주세요. 도와주세요. 살려주세요.”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