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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리틀루이스 Apr 08. 2023

사랑은 감정만이 아니다.

누군가를 생각하면 가슴이 벅차오르고, 짜릿한 흥분감이 들고, 긴장이 풀려 가슴이 몽글몽글 해지거나 혹은 역으로 긴장이 서는 것만 같을 때

우리는 그 사람을 ‘좋아한다’ 혹은 ‘사랑한다’고 여기게 된다.


행간에는 상기와 같은 마음이 여러 사람에게 자주, 혹은 동시다발적으로 생겨나는 사람을 ‘금사빠’라고 지칭하기도 한다.


영화, 드라마 등을 보면 주인공이 자신의 마음에 드는 상대에게 “사랑해”하고 고백하는 것을 자주 볼 수 있기도 하다.


이 글을 읽는 독자들 또한 누군가에게 ‘사랑하다’고 고백한 때가 있었을 것이고(필자도 그렇다.), 그 때는 감정의 영향을 받아 고백했던 때가 대부분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우리 안에는 ‘사랑 = 감정’이라는 공식이 은연중에 자리 잡고 있는 것이 아닐까.


그러나 그 반대의 경우를 생각해보면 위의 공식이 일부분은 맞지만 완벽하게 맞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누군가로부터 사랑을 받다가 더 이상 사랑을 받지 못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던 적이 있던가. 독자들 중에 그런 쓰디쓴 경험을 해본 사람이 있다면 이 글을 더 잘 이해할 것이라고 본다.


상대방이 나를 더 이상 사랑하지 않는다고 깨닫는 경우는 상대방의 감정이 느껴지지 않아서가 아니라(상대의 감정이 어떤지 우리는 판단하기가 어렵다.), 상대방의 행동과 언어가 이전과 달라진 것을 목격했을 때다.

   

상대방이 배려가 있고, 양보를 하고, 목소리를 높이지 않으며, 불편해도 참아주고, 상냥하며, 잘 웃고, 호쾌한 목소리로 대해주다가

자신의 필요만 내세우고, 무뚝뚝하고 심드렁하게 굴며, 화를 터뜨리거나 혹은 대화를 피하며, 연락이 줄어들게 될 때, 혹은 잘 대해주고 웃어주지만 어딘가 어색할 때(평소에는 자기 목소리를 잘 내다가도 어느 순간 모두 동의하며 동조해주는 모습에 이상한 낌새를 느낄 때),


우리는 그 사람이 ‘이젠 나를 좋아하지 않는 건가?’ ‘더는 날 사랑하지 않나?’ ‘그 사람 마음에 무슨 변화가 생겼나?’하고 생각하게 된다.(구체적인 언어로 생각지 않더라도 은연중에 느끼게 된다.)




상기 상황을 해석함으로써 두 가지의 결과를 얻을 수 있었는데

첫째, ‘날 사랑하는 것이 맞는 가’ 싶은 의구심 = 여러 모습들을 보고 분석하여 얻어진 결과

둘째, ‘여러 모습들은 단지 하나의 감정이 아님’을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첫째는 설명의 여지가 없을 정도로 명쾌하다. 그리고 필자는 둘째에 대한 설명이 필요함을 느낀다.

  

누군가가 우리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느끼는 모습들은 [자신의 필요만 내세우고, 무뚝뚝하고 심드렁하게 굴며, 화를 터뜨리거나 혹은 대화를 피하며, 연락이 줄어드는 것]이라고 상단에서 말하였다.


이것들은 우리가 서론에서 다룬 ‘가슴이 벅차오르는 감정’ 하나만 있다고 해서 해결되는 것들이 아니다.


물론 두근두근 거리고 가슴이 몽글몽글해지는 ‘감정’은 상대방을 포용하거나, 잘못을 용서하거나, 뜻이 다른 상대방의 결정에 동의해주는 것에 도움을 준다. 중요한 것은 ‘도움을 주는 것’에 그친다는 것이다.


*두근두근거리고 가슴이 몽글몽글해지는 감정을 앞으로는 ‘호감’이라 표현하겠다.


상대에 대한 호감이 줄면 상대를 너그럽게 대하던 우리들의 태도 또한 변하게 된다. 상대를 포용하고, 용서하고, 내 뜻을 접고 상대의 뜻을 들어주는 것이 전보다 어렵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호감을 잃은 우리는 사랑을 잃어버린 것일까?


아니다. 절대 아니다.




필자는 삼십 대 중반을 조금 넘은 나이로, 주변 친구들이 대부분은 결혼했으며 얼마 전에 결혼한 친구는 이제 막 돌을 지난 자녀를 두었고, 일찍 결혼한 친구는 초등학생 자녀를 두고 있다.


돌이 막 지난 아이를 키우는 친구 부부를 보면 아이에 대한 너그러움과 포용, 웃음, 기쁨이 가득한 것을 볼 수 있다. 그들은 아이에 대한 ‘호감’으로 가득하다.


반면 초등학생 자녀를 키우는 친구 부부는(생각만 해도 웃음이 난다) 자녀를 대할 때 애정보다는 단호함이, 수용보다는 질책의 언어가 더 많다. 야단을 자주 친다. 이 친구들도 처음부터 이랬던 것은 아니다.


그렇다고 초등학생 자녀를 키우는 가족이 불행해 보이지 않는다. 그들이 사는 모습을 보면 얼마나 단란하고 유쾌한지, 필자는 그 친구네 놀러갈 때마다 같이 흥에 젖어 기분 좋게 돌아오곤 한다.


첫째 집은 아기를 향한 호감이 더 강하고, 둘째 집은 호감보다는 애정이 더 강하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이것을 가지고 어느 집은 사랑이 넘치고, 어느 집은 사랑이 덜 하다고 판단할 수 없다.




사랑은 상대를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아는 것과 그것을 행하는 의지다.

(본인 스스로에게도 해당된다.)


사람의 감정은 수시로 바뀐다. 누군가를 향한 감정이 호감에서 싸늘한 미움으로 바뀌는 것을 우리는 각자의 모습 가운데서 보지 않았던가?


만약 감정을 사랑의 기준으로 삼는다면 우리는 정말 무작위의 사람을 사랑할 수 있을 것이며, 사이가 가까운 사람들을 아주 쉽게 사랑하지 않는다고 말하게 될 것이다.(특히 가족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생각하게 될 것이다.)


사랑은 상대가(혹은 자신이) 잘 되기를 바라는 것이며, 그것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게 되는 초석이다.


여기서 ‘잘 됨’이란 무엇인지 설명하고 싶으나 아직 준비도 안 됐고, 글도 장황해질 거라서 간략하게만 말하고 넘어가려 한다.


사람이 잘 됨은 돈을 많이 버는 것이 아니다.(돈을 많이 버는 것은 좋지만 그것이 최우선의 목적이 되면 우리는 범죄를 저지를 수도 있다.) 돈 많이 가졌다고 그 사람이 정말 잘 됐다고 확신할 수 있는가? 돈 많은데 여러 사람 인생 망치고, 자기 인생도 망친 사람을 우리는 쉽게 떠올릴 수 있다.


그렇다면 건강은? 권력은? 명성은? 과연 무엇이 사람이 정말 ‘잘 됨’의 기준이 될 수 있을까. 

 

사람의 잘 됨은 그 사람이 

‘사람과 더불어 잘 지낼 알고, 주위 사람들이 그 사람과 함께 살고 싶어 하는 것’이다.

필자는 이 내용을 이렇게 해석하기도 한다.

‘사랑할 줄 알고, 사랑 받을 줄 아는 것’ 




한 사람이 다른 사람들과 더불어 잘 지낼 줄 알고, 주위 사람들이 그 사람과 함께 살고 싶어 하는 일에는


수개월이 걸리든 수년이 걸리든 오랫동안 참아주는 것과

어떤 일에도 온화하게 대함과(큰 문제일수록 온화하게 대함이 도리어 상대를 당혹시킨다)

그 사람과 타인에 대한 비교와 시기를 말로든 생각으로든 하지 않음과

자신에 대해서든 타인에 대해서든 자랑을 늘어놓지 않음과

‘내가 왜 이런 것까지?’싶은 높은 마음을 품지 않음과

상대의 자존심이 상할만한 언어와 행동을 보이지 않음과

자기 자신의 이익을 챙기려는 마음을 내려놓는 것과(이것이 참 어렵지만, 외려 나중에는 사랑을 알게 된 주위 사람들이 먼저 챙겨주려는 모습을 보며 감사하게 될 것이다.)

화가 나더라도 참고 화를 나게 하는 생각에 붙들리지 않고, 내가 먼저 용서하고 손 내미는 것이 벽을 허물고 서로가 하나 되는 길임을 알며 그렇게 행하는 것과

약속과 질서를 어기며 불의를 벌이는 사람들에게 동조하지 않으며(그것이 가족일지라도), 아주 보잘 것 없어 보이는 사람이 작은 약속을 지키고 질서를 만들어가는 것을 보고 기뻐함과     

모든 것을 참고, 이 모든 일들을 견딜 때 결국 사랑이 이루어지리라는 것을 믿고 바라는 것이다. 


그렇게 우리는 평생 사랑을 배우고 깨닫고 알고 행하며 살다가 가게 되는 것이다.


남녀노소,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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