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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리틀루이스 Jul 07. 2024

정리 되지 않았던 생각

최근 몇 주 사이에 머릿속에 맴돌지만 정리되지 않는 생각(갈망)이 하나 있어 글로 풀어내보려 한다.


일상이 많이 버거워졌다. 버겁다는 말로는 표현이 잘 안 되는 거 같은데..

우선 일이 많다. 야근을 자주 한다. 주말도 일한다.

일이 실무적으로만 많은 게 아니고 관리적 차원으로서도 많다.

관리적 차원의 일이 많아지면서 내 실무는 퇴근 시간 이후에 하게 된다.


회사의 운영과 살림을 챙기면서도 회사를 어떤 방향으로 이끌어 나갈지 기획을 한다.

기획에는 회사 운영 관련 기획(전사적 KPI구축, 안전보건경영 시스템 구축을 현재 중점 사안으로 기획해 나가고 있다.)이 있으면서도, 사업적인 기획들도 있다.


현재 새롭게 시작하고 있는 사업만 4개다.

준비된 자료도, 담당자도 없이 홀로 총괄을 맡아 진행하고 있다.


근래에는 대외활동도 나가게 됐다.

모임, 교류활동, 교육 등의 행사가 있을 때는 대부분 가야만 한다.


더군다나 9월부터는 일 관련 석사 수업을 듣게 됐다.

강의는 수요일 토요일에 있다.

그런데 또 9월부터 10월까지 매 주 화요일 목요일은 비즈니스 매니징 관련 수업이 다른 곳에서 진행된다. 

거의 하루 종일 들어야 한다.


이 와중에 CEO에게 일을 충분히 못 해내고 있다고 질책을 듣는다.

내가 완벽하게 일을 처리하지 못하고 있다고 스스로도 생각하고 인정한다.


하지만, 물리적으로 시간과 일손이 충분치 않은 상태에서 객관적인 판단을 통해 질책을 듣고 있다고는 생각지 않는다. 그게 참 마음을 어렵게 한다.


그리고 회사에서 나는 주로 직원분들에게 애로사항과 고충과 불만을 듣는 편이다.

누가 누굴 심하게 욕하는 것도 들어야 한다. 서로간의 오해도 풀어줘야 한다.

그런 포지션에 있다.


물리적으로 정서적으로 잘 지치고 고갈된다.




그러고 있던 최근,     

아내와 함께 시간을 보낼 때면 드는 생각이 있다.


“시간이 이대로 멈춰버렸으면 좋겠다. 더는 다른 일들이 벌어지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것이다.


무슨 거창한 활동을 하다가 그러는 것도 아니다.


그냥 산책할 때, 드라이브 나가서 저녁 먹고 집에 갈 때, 같이 차 안에서 빗소리 들으면서 ‘빗소리 좋다’하고 서로 공감하고 있을 때, 소파에 앉아서 나초 과자를 요거트에 푹 찍어먹으면서 다큐멘터리 시청할 때,


그냥 그럴 때 그런 생각이 든다.


그렇다고 일을 가치 없게 여기고 있는 것은 아니다.


또 그렇다고 일을 너무 중요하게 여겨서 일중독이 되거나 성취주의가 되어서는 안 되도록 주의하고 있다.

성취를 이루느라 자신뿐만 아니라 주위를 파괴하는 사람들을 봐왔으며, 그들이 성취를 이뤘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끝까지 그들에게 안위를 주는 것도 아닌 모습을 많이 봐왔기 때문이다.

성취에 붙들린 사람들은 그 성취를 놓칠까봐 얼마나 노심초사 하는지 모른다.

     

지금과 같은 생각에, 그리고 이런 감정에 깊게 침잠 될 때는 허무주의에 빠지지 않게 경계해야 하기도 한다.(지금의 나는 허무주의보다 성취주의에 더 가까워진 거 같지만..)


“그냥 다 됐고, 다 필요 없으니까. 관둘련다.”하는 정도까지 가지 않도록 정서와 생각의 밸런스를 잘 잡아야 한다.     

그리고 위에 말했던 ‘시간이 멈춰버렸으면 좋겠다’와 같은 메시지가 나를 지배하게 둬서도 안 된다.



 

바로 위와 여기는 2주의 간극이 있다. 

몇 주 만에 쓰다가 만 내용을 다시 읽어보는데, 내 머릿속이 얼마나 복잡했는지(지금도 복잡한지) 알 수 있을 거 같다.


무엇 하나 명확한 방향 없이 ‘이래도 안 된다.’ ‘저래도 안 된다.’ 하고 있으니.

이럴 때는 어떡해야 하는지 배운 것이 하나 있다.


무엇이 기준이 되고, 무엇부터 해야 하는지 찾고,
그것을 하는 것이다.


소극적인 이유로 상황을 판단하고 결정하고 행동에 옮기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인 이유가(그것도 아주 명확하고 확실한) 중심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일에 너무 매몰되지 않으면서, 또 허무주의나 쾌락주의나, 내가 편하려는 나를 챙기려는 자기 중심적인 사고(이에 대해서는 다른 글에서 여러 번 썼다.)에서 자유롭기 위해서는


더 상위의 논리에 나의 존재와 일상을 세워야 한다.


돈이 중요하네, 일이 중요하네, 지식이 중요하네, 여가가 중요하네, 관계가 중요하네, 정서적 안녕이 중요하네, 자아실현이 중요하네, 먹고 마시고 입는 것이 중요하네, 어떤 집에 사는지 중요하네 하고 온통 떠드는 언론과 사회와 내 머릿속의 목소리들을 뒤로 하고


내 과거가 어떠했는지, 또 미래에는 어떤 일들이 들이닥칠지 고민하느라

자기연민에 증오에 빠지거나 두려움에 휩싸이는 일들도 집어 치우고

(지나가고 만 것에 매여 있더라도 결국에는 더 이상 매여 있을 수 없는 시간은 다가오며, 내가 좋아하는 일들만 일어나더라도 그것들은 지나가고 말 것이며, 상상했던 것보다 더 크고 무서운 일이 일어나더라도 그것도 지나가기 마련이기에.)


‘생명의 시작과 끝’은 나 자신도 사회도 인류도 손댈 수 없는 영역임을 인정하고,

그래서 ‘그 영역’에 종속되어 있는 하부의 것들은 전부 다 

그것들을 있게 한 ‘능력(말씀)’의 주권 아래에 있으며 그것을 미세하게나마 볼 줄 알고

그 능력 안의 질서(order or law)를 따르는 것이

내게 ‘주어진’ 이 삶을 가장 자유롭게 사는 것이 된다.

 

그렇다고 삶을 자유롭게 살기 위해서 힘 안의 질서를 따름을 추구해서는 참 자유를 누리지 못하게 된다. 

이것은 말과 마차의 위치가 바뀐 것이기 때문이다.


자유가 우선인 것이 아니라, 순종이 우선되는 것이다.


부부가 우선 자유로워야지 서로 사랑이 깊어지는 것이 아니라, 서로 더 사랑할 때에 서로의 자유를 인정하는 것처럼 말이다.




그래서 도대체 내가(필자) 힘들어하는 상황 가운데 구체적으로 뭘 하라는 것이냐고

지금 무슨 소리 하고 있는 것이냐고 물어보고 싶은 사람도 있을 것 같다.


필자는 기도할 것이다.

기도 밖에 없다.


‘이것을 주세요.’ ‘저것을 해결해 주세요.’하고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 더 잘 아시고 내 주위에 있는 모든 일들과 관계를 허락하시고

이 생명과 사회와 지구와 우주를 허락하신 하나님께,


‘힘이 듭니다. 그만두고 싶습니다. 그냥 예전처럼 바닷가 구석 어딘가 숨어들어 사람 안 만나고, 먹고 싶을 때 먹고, 쉬고 싶을 때 쉬고, 노래하고 싶을 때 노래하고, 글 쓰고 싶을 때 글 쓰면서 살고 싶습니다. A직원이 의심이 듭니다. B는 도대체 언제까지 저러나 싶습니다. 힘듭니다. 하나님. 그리고 내 욕심으로는 더 가지고 싶습니다. 지금 하고 있는 프로젝트가 꼭 됐으면 좋겠습니다. 어깨에 힘 좀 들어갔으면 좋겠습니다. 우리 기업이 지금보다 100배는 넘는 영향력을 가졌으면 좋겠습니다.’와 같이 기도하다가 이렇게 또 기도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성경에 어떻게 말씀하셨는지요. 그리고 저는 그 말씀을 따라 어떻게 하면 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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