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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말 자연인 Nov 21. 2022

어느 날의 캠핑

윈디라는 어플에서 바람이 잔잔한 날을 골라 네 식구가 슈필라움으로 캠핑을 떠났다. 육아휴직 중이라 평일이든 주말이든 상관없다. 회사 복직일이 곧 다가옴에 따라 날씨가 좋을 때 자주 캠핑을 해야겠단 생각을 했다.


슈필라움에 도착하자마자 넷이서 산책을 했다. 아들은 빨간 자전거를 탔고 딸아이는 유모차에 태웠다. 바람이 불지 않아 따뜻했다. 아내와 내가 번갈아가며 유모차를 밀었다. 가을 앞바다는 한 층 더 파래진 것 같아서 기분이 좋았다. 가슴이 뻥 뚫리는 것 같았다.


슈필라움 뒤쪽으로 돌아가면서 이제는 색이 바랜 막바지 단풍을 올려다보며 인생무상도 느꼈다. 절정이 있으면 내리막도 있음을 또 알겠다. 겨우내 버티면 또다시 봄이 올 것임을 알기에 희망을 가져본다. 백가지는 넘을 것 같은 초록색의 변주로 앞산도 다시 채워질 것이다.


우리는 조금 더 뒤로 넓은 간척지의 빈 논을 구경하며 길을 걸어갔다. 뜨거운 여름날의 찰랑거리는 진한 초록색 벼를 봤던 것이 엊그제 같은데 잘 구획된 논들이 황금색 들판으로 물들었다가 이제는 밑동만 휑하니 남았다. 산책로와 맞닿은 논에서 노부부가 기계로 수확하고 남은 볏짚을 정리하고 있었다. 중장비와 대형 농기계만 보이면 흥분하는 아들은 이리저리 작업하는 모습을 구경하느라 발걸음이 느려지고 급기야 멈춰서 노부부에게 큰 소리로 안녕하세요를 외친다. 몇 살이냐고 묻는 할머니에 도윤이는 네 살이라고 답했다. 손주와 동갑이라며 좋아하셨다. 객지에 나가 있는 자식들의 자식이 잠시 생각나셨나 보다.


시원한 길을 계속해서 걸어갔다. 작은 선착장을 잠시 둘러보고 저녁시간이 되기 전에 슈필라움으로 되돌아왔다. 새 나뭇잎으로 치장한 비파나무에 꽃망울이 제법 많이 달렸다. 곧 터질 기세였다. 나는 평소 꽃냄새를 좋아하지 않지만 비파 꽃 냄새는 과하지 않고 은은해서 좋아한다.


아내는 저녁밥을 준비하고 나와 아들은 톱과 마대자루, 물통 세 개를 자동차 트렁크에 싣고 목적지 없이 출발했다. 지나는 길에 쓰러진 잘 건조된 나무를 찾아 길가에 차를 대고 톱질을 했다. 팔이 너무 아팠다. 장작 값을 아껴보려다 몸살 날 것 같았다. 그래도 몸으로 때우고 돈은 굳혔다. 또 옆에서 생각 없이 힘들게 하는 아들이 얄밉다. 그렇게 장작 한 가마니를 들고 물을 길어 복귀했다.


저녁밥을 먹기 전에 먼저 토치로 화목난로 본체와 연통을 살짝 달구고 장작에 불을 피웠다. 쏟아질 것 같은 밤하늘 별들 사이로 흰 연기가 운치 있게 솟아올랐다. 아들이 좋아하는 샤부샤부가 끓는 동안 딸아이를 안고 아들과 함께 슈필라움 전경을 구경했다. 차광막을 벗겨낸 트램펄린과 정글짐이 눈에 들어왔다. 흐뭇했다. 딸아이를 안고 흰색으로 칠한 그네를 타며 다음 날 아침에 놀이기구를 즐길 아들과 딸 생각에 올 한 해 고생한 보람을 느꼈다.


딸아이가 카라반 침대에서 굴러 떨어져도 아프지 않도록 바닥에 매트리스와 침낭을 깔아 두고 나와 아내는 쉘터에서 놀았다. 쉘터에 들어가 은은한 조명을 켜고 잔잔한 음악을 들으며 화목난로에 다 떨어져 가는 장작 몇 개를 채워 넣었다. 나는 무중력 의자에 누워 읽기 시작한 지 일주일이 넘은 카타리나 브룸의 잃어버린 명예를 읽었고 아내는 못 본 환승연애라는 예능을 봤다. 한 번씩 이름만 알던 소설을 시간이 날 때 틈틈이 읽는 재미가 있다. 이번 소설은 기자가 한 개인과 그 주변을 어떻게 파멸로 이끌어가는지를 이야기했다. 주제의식은 분명했지만 글을 독해하기가 조금 어려웠다. 딸아이가 우는 소리가 들려 들어가 보니 침낭 위에 떨어져 있었다. 다행히 아픈 것 같진 않았다. 우리도 정리하고 곧바로 카라반에 들어가 잤다.


다음 날 아침 화목난로에 불을 피워 몸을 녹이며 아침밥을 먹고 이제 막 벽을 잡고 서기 시작한 딸아이를 정글짐에 올려놓았다. 딸아이가 천진난만하게 웃으며 좋아했다. 떨어지지 않을까 나와 아내만 노심초사했다. 아들 녀석은 지붕 위에 올라가 자기 멋있냐며 어떻게든 딸에게 치우친 부모의 관심을 끌려고 노력했다. 트램펄린에도 들어가 딸아이 두 손을 잡고 둥둥 튕기며 놀았다. 아들도 곧바로 따라 들어와 딸아이는 아랑곳하지 않고 일부러 더 크게 방방 뛰었다. 그네도 환상적이었다. 앞을 보고 타면 잔잔한 바다가 보였고 뒤를 보고 타면 작은 동산 밑에 갈대가 하늘하늘거렸다. 잠시 즐긴 뒤 아내는 딸아이 잠을 재우고 나는 아들과 함께 모래놀이를 했다. 그렇게 어느 가을날의 우리 가족 캠핑은 고요하고 평화로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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