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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말 자연인 Nov 18. 2023

외할아버지

외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고 동생에게 연락이 왔다. 이 주 전에 찾아뵈었던 것 같은데 사진을 찾아보니 두 달 전 추석이었다. 이번 추석에 본 할아버지는 살이 좀 붙고 정정해 보이셨는데 최근에 병원에 입원한 상황도 아니고 오늘 갑자기 돌아가셨다 하니 당황스러웠다.


추석에 문밖에서 배웅하는 할아버지의 손을 두 손으로 꾹꾹 누르면서 다시 오겠다고 했었다. 할아버지를 안아달라고 아내가 도윤이와 나에게 말했는데 도윤이는 왕할아버지가 무섭다고 하면서도 와락 안겼고 나는 새삼스럽게 뭘 그런 걸 하냐며 포옹하진 않았다. 그게 마지막이었다. 할아버지의 손이 두툼하고 꽤 힘이 있어서 마지막 인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외할머니가 돌아가셨을 때는 내가 막 취업을 하고 일에 한창 시달리고 있을 때여서 그런지 정말 별로 슬프지가 않았다. 그런 내가 당황스러울 정도였다. 내가 사는 도시에 서시장이라는 큰 시장이 있는데 평상시 그곳에서 시골 고향으로 가는 버스를 탄다. 시내에서 놀다 버스 정류장에 가는 길에 정말 우연히 시장 골목에 쭈그리고 앉아 조개를 팔고 있는 외할머니를 봤다. 할머니는 반갑게 나의 등을 쓰다듬고 내 새끼 하며 등허리를 툭툭 치며 그날 바지락 두 소쿠리를 판 돈 전부인 오천 원을 꾸깃꾸깃 내 손에 쥐어줬다. 할머니가 손자를 바라보는 진짜 마음은 내가 할아버지가 되어봐야 알 수 있을 것 같다.


할아버지는 집 바로 옆에 있는 대기업과 오염물질 방류 때문에 갯벌에 피해가 생긴다며 싸우기도 했다. 국민학교도 졸업하지 못한 할아버지는 까막눈이었는데 신문을 읽기 위해 한글공부도 하고 소송을 마을 대표로 하는 것을 보면서 대단하다고 생각했었다. 말솜씨도 힘 있고 항상 확신이 있었다. 그래서 외갓집 한쪽에 할아버지가 청년시절 받은 시장, 대통령 등에게 받은 표창장이 많이 있다.


잘은 모르지만 할아버지는 소싯적에 목수를 하며 나쁜 짓을 조금 하고 다닌 것 같다. 내가 대학을 졸업하고 조선소에서 족장이라는 일을 한 적이 있는데 명절 전에 월급이 조금 늦어진다는 말을 했더니 할아버지가 이제야 내가 벌을 받는다며 자책하셨다. 아직도 그날을 생각하면 웃음이 나는데 할아버지가 동료 목수들의 돈을 많이 떼먹으신 모양이다.


외갓집은 어렸을 때부터 나의 판타지였다. 창고에 할아버지의 공구가 많았고 티브이 옆에 있는 서랍은 보물 창고였다. 온갖 희귀한 물건이 많았다. 맥가이버칼, 호두 손바닥마사지기, 사진기, 인주 등등. 이런 게 그렇게 있어 보이고 멋지게 보이고, 신기했던 시절이 있었다. 그런 생각에 외갓집 창고에 있던 할아버지 손때가 묻은 줄자를 작년에 한 개 가져왔었다.


군대를 전역하고 어문회 한자 1급을 따고 나서는 할아버지는 꼭 나에게 족보를 보여주며 읽게 하셨다. 진주강씨의 시조는 강이식이며 이런저런 내용이 사실 내 알바가 아니었다. 나는 김씨다. 족보를 보며 외할아버지의 아버지의 항렬, 외할아버지의 항렬, 외삼촌들의 항렬을 보며 다음 항렬이 무슨 자인지 나에게 몇 번씩 물어보곤 하셨다. 외손자가 아니라 친손자를 내심 바라셨던 것이다. 오늘 할아버지가 돌아가셨으니 결국 친손자를 못 보시고 하늘나라로 가시게 되었다.


할아버지는 또 개똥 철학자셨는데 무조건 운이 좋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항상 어떻게 해야 운이 좋아지는지에 대한 방법론은 없었지만 어쨌든 운이 좋아야 한다고 했다.


내가 가지고 있는 어린 시절 사진 대부분이 할아버지가 찍어준 것이다. 요즘말로 하면 조금 거창하지만 할아버지의 취미가 출사지 않았을까 싶다. 유명한 연육교를 올라가자면 다리가 후들거리는데 소주 몇 잔이면 거뜬하다며 그렇게 올라가서 찍은 사진도 있는 것 같다.


장례식장에서 아내와 아이들을 데리고 절을 할 때 조금 흐느꼈고, 입관식에서 편안해 보이던 할아버지의 모습을 보고 코끝이 찡해 눈물이 조금 났다. 화장터에 관이 올라가는 모습을 보고 입구가 닫히고 블라인드가 내려갈 때 슬펐다. 장례식장에서 아이들을 신경 쓰느라 친척들과 소통은 별로 하지 못했다. 그날 도윤이는 이종사촌 여동생의 상냥함이 맘에 들었는지 나와 아내도 모른 체하고 하루 종일 붙어서 쫓아다녔다. 도윤이는 마지막 날 배웅인사를 하지 못해 대성통곡했다.


할아버지는 외할머니 옆에 묻히셨다. 트렁크에 있던 어린이용 삽을 도윤이에게 주었다. 그 삽으로 도윤이는 할아버지에게 따뜻한 이불을 덮어드린 다는 마음으로 흙을 뿌렸고 나도 그 삽으로 다연이와 함께 마지막으로 흙을 뿌렸다. 그렇게 할아버지와 물리적으로 영영 볼 수 없게 되었다.


애정을 쏟을 수 있는 힘에도 어떠한 한계가 있는지 내게 가족이 생긴 이후로 불현듯 누군가 생각났을 때 불쑥불쑥 누군가를 찾기가 힘들다. 갑자기 할아버지 생각이나 예고 없이 항상 늘 계시는 외갓집을 찾는다던지, 느닷없이 할머니 묘지를 방문한다던지 그런 생뚱맞은 일을 잘하지 못하겠다. 나도 가장이기 때문이다. 작년 육아휴직 중에 꼭 할아버지 집 앞에 카라반을 이주 정도 세워놓고 아들과 생활하려고 했는데 결국 하지 못해서 아쉽다. 할아버지에게 내 슈필라움을 보여드리고 싶었는데 그러지 못했다.


집으로 돌아오는 차에서 작은 이모에게 들었다며 아내가 그랬다. 도윤이가 할아버지를 안아줘서 좋았다고. 할아버지도 나를 제일 아끼셨는데 증손자를 안겨드렸으니 내 도리는 다 한 것 같다. 앞으로 잘 살면 되는 것이다.


할아버지가 할머니 곁으로 갔을 때 할머니를 자네, 임자, 누구 엄마라고 부를 진 모르지만 그 녀석의 아들 도윤이를 봤다며 할머니에게 자랑하실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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