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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uswell Sep 20. 2020

영국 탈출

6년 동안 공부했던 곳에서 도망쳐야 하다니...

올해 2월, 장장 5년 반을 끌어온 석사/박사 과정의 끝이 보이기 시작하고 있었다. 지도교수님을 뵐 때마다 유학 전에 다니던 직장에 6월 말까지 복귀해야 한다고 징징댔더니 이제 교수님도 지치신 모양이다. 나는 박사과정 논문 시험을 위한 서류를 제출하였고 지도교수님은 구술면접시험(viva)의 면접관(examiner) 두 명을 섭외하셨다. 4월 논문 제출, 5~6월 구술면접시험의 일정이 확정되었다.


그러자 아내는 아이를 데리고 한국에 먼저 들어가겠다고 선언했다. 말도 잘 안 통하는 외국에서 집에서 혼자 아이를 키우는 생활에 지치지 않았다면 오히려 이상할 것이다. 어차피 논문 제출 직전에는 논문을 작성하느라 시간이 부족해 내가 육아를 도와줄 여유도 많이 없을 것이었다. 2월 마지막 주에 다 같이 귀국했다가 1주일 후 나 혼자 영국으로 돌아오기로 결정했다. 재작년 여름에 당시 10개월 된 아이를 데리고 런던까지 오는 비행이 워낙 험난했던 탓에 아내와 아이가 둘이서 한국에 가는 건 애초부터 선택지에 없었다.


논문 제출을 코 앞에 둔 중대한 시기인데도 칠칠치 못하게 오랜만에 한국에 간다는 사실에 묘한 설렘을 느끼고 있던 2월 하순, 갑자기 대구가 BBC 뉴스 머리기사에 등장하였다. 한국의 확진자 숫자는 하루가 다르게 늘어갔고 양가 부모님들을 비롯하여 지도교수님까지 한국에 갔다 오기로 한 계획을 걱정하시기 시작했다. 그 당시 확진자 증가 추세는 영국에서 조만간 한국인 입국을 거부할 수도 있겠다 싶을 정도로 심각했다. 결국 아내는 아이와 둘이서만 비행기를 타기로 결심했다. 다행히도 아이는 평생 할 효도를 10시간의 비행 동안 집중적으로 하며 너무나도 얌전하게 잘 버텨주었다고 한다.



이 결정이 신의 한 수였음을 알게 되는 데는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정확히 2주 만에 영국과 한국의 상황이 역전되어 버린 것이다. 3월 초에는 더 작은 집으로 이사하는 한편 지도교수님과 미팅을 하면서 논문의 마무리 방향을 설정하느라 금세 시간이 흘렀다. 4년여 동안 지도교수님과 가졌던 미팅 중 가장 깔끔하고 생산적이었던 미팅을 마친 직후 모든 수업이 온라인으로 전환된다는 소식을 들었다. 아마 이날이 WHO에서 팬데믹을 선언했던 날인 것 같다. 분위기가 심상치 않음을 감지하고 일단 당장 논문 작성에 필요한 자료를 인쇄, 백업하고 노트북에 급히 통계 프로그램을 설치했다. 다음 날에도 학교에 나가긴 했으나 사람들과 거의 마주치지 못했다. 점심때쯤 학교가 사실상 폐쇄될 예정이라는 메일을 받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날이 허무하게도 지난 5년 반 동안 다녔던 학교를 마지막으로 본 날이었다.


그날로 약 6주 동안의 반강제적 유폐 생활이 시작되었다. 첫 1주는 영국 정부에서 락다운(Lockdown)을 선언하기 전이었는데 후배 집에도 한 번 방문했고 친한 선후배들과 모여서 점심식사도 한 번 했었다. 락다운 이후에는 1주일에 2~3회 정도 오전 10시에 장을 보러 가고 매일 오후 3~4시 정도에 집 주변에 있던 리젠츠 파크나 하이드 파크에 짧은 산책을 가는 것을 제외하고는 바깥출입을 최소화했다. 나름 저 시간에 가장 사람이 적을 거라고 머리를 굴린 결과였다. 아마존에서 비싼 돈을 주고 구한 마스크 1개로 열흘 정도를 버티다가 한국에서 8개를 공수받고는 어느 정도 숨통이 트였다. 사망자 수가 조용히, 그렇지만 무서운 속도로 증가하면서 런던 길거리에 마스크를 쓴 사람이 조금씩 늘어나긴 했지만 그래도 마스크를 쓴 사람은 체감상 30~40% 정도에 불과했다. 한국 마트에 라면, 국수 등이 거의 동나버리고 쌀값이 하루 만에 급등하는 모습을 목격하기도 했다. 그리고 날씨가 안 좋기로 유명한 런던은 눈부시게 맑은 날씨를 보였다.


다행스럽게도 논문은 더딘 속도지만 어쨌든 마무리되어 가고 있었다. 나는 원래 침대 또는 이부자리가 책상 옆에 있으면 공부하다가 침대로 뛰어드는 종류의 인간형이라 무조건 학교에 가야만 공부를 하는 학생이었다. 따라서 처음에는 집에서 일하는 방식에 적응하는 데 시간이 걸렸지만 어떻게든 빨리 논문을 끝내고 이 지옥에서 탈출해야겠다는 마음가짐으로 흔들리는 집중력을 부여잡았다. 매주 Zoom으로 가졌던 지도교수님, 동료 학생들과의 연구모임(을 빙자한 신세 한탄 시간)이 중간중간 고비를 이겨내는 데 큰 역할을 했다. 거의 매일 연구에 대한 번뇌, 자기 합리화, 타협 또는 포기의 순간이 반복되었지만 국방부 시계가 거꾸로 매달아 놓아도 흘렀듯이 나에게도 최종 논문 제출의 시간이 다가왔다. 날짜도 잊지 못하는 4월 23일 목요일, 드디어 논문을 제출했다.



이전에는 한국에 오갈 때 돈을 아낀다고 주로 경유 항공편을 이용했었는데 이번에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아시아나항공은 운항을 중단했고 영국항공은 운항일이 불규칙적이었다. 평소 같으면 내 돈 주고는 절대 안 탈 대한항공을 탈 수밖에 없었다.


4월 25일 약 7주간 살았던 방을 정리하고 히드로 공항으로 출발했다. 여느 날과 마찬가지로 길거리에는 사람이 거의 없었고 패딩턴 역으로 가는 버스에도 두어 명만이 타고 있었다. 패딩턴 역에서 히드로 공항으로 가는 TfL 열차에서도 인적을 찾아보기 힘들었다. 히드로 공항 터미널 4에 있는 대한항공 카운터에 도착하는 순간 드디어 이 위험한 곳에서 탈출하는구나 하는 안도감이 밀려왔다. 지금까지 히드로 공항에 꽤 많이 드나들었지만 그렇게 텅 비어 있는 모습을 보는 것도 색다른 경험이었다. 그 날 저녁 히드로 공항 터미널 4에서 출발한 항공편은 이탈리아행 두 편과 서울행 뿐이었다. 공항에 있는 텔레비전에서는 영국 내 코로나 19로 인한 누적 사망자가 2만 명을 돌파했음을 알리는 뉴스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비행기가 이륙하는 순간 잠시 울컥한 감정이 들었다. 좋으나 싫으나 지난 6년 동안 살면서 정들었던 곳인데 친하게 지냈던 사람들에게 제대로 인사도 못하고 서둘러 도망치듯 출국해야 된다는 사실이 많이 아쉬웠던 것이다. 이렇게 길고 길었던 영국 유학생활이 끝나 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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