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중개사의 천태만상 현장일기(12)

기억나지 않는 배려

by 양콩

6년 전에 70대 노부부가 찾아왔다.

여윳돈으로 30평대 아파트를 사서 월세를 놓겠다고 했다. 처음 보는 분들이라 타지에서 온 줄 알았는데 이 아파트에서 분양 시부터 살고 있다고 했다.


그러다 올봄에 세입자를 내보내고 집을 팔아달라고 했다. 당시에는 더 싸고 좋은 매물이 많아 이 집은 거의 신경을 못썼다. 실은 이 집이 매물로 나왔다는 사실도 거의 잊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이 노부부는 집이 어찌 되었느냐 왜 안 팔리냐 묻는 전화 한 통 없었기 때문이다.


오다가다 마주치면 가볍게 목례만 하고 지나갔다.

그리고 지나친 후에야 아 저 집도 나왔지? 어떻게 됐나? 팔렸나? 하고 갸우뚱할 뿐이었다.

혹시나 하고 집에 가서 비번을 눌러보니 여전히 공실이길래, 집을 딱히 안 팔아도 되나? 아님 내가 빨리 안 팔아주니 여러 부동산에 내놔서 나한테는 별로 기대를 안 하시나? 했다.


그러다 어제 아침 출근도 하기 전에 손님이 와서 기다리길래 이른 시간이라 다른 집 보여주기도 그래서 공실인 그 집을 보여주었다. 다른 매물에 비해 딱히 싼 것도 아니고 집도 전부 수리해야 하는 상태인데도 마음에 들어 하며 당장 계약하겠다고 했다.


매도인인 노부부한테 전화를 하기 전 나는 조금 주춤했다.

물건을 의뢰받은 후 통화한 적이 없어 혹시 팔렸을까 하는 불안함도 있는 데다, 매도인이 원했던 금액보다 내가 내려서 브리핑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다.


혹시 금액을 더 올려달라고, 이 금액에는 안 판다고 하면 어떡하지? 하는 생각에 조심스럽게 전화했는데 노부부는 말했다.


"아 그래요? 제가 내놓은 금액보다 더 받아주시는 거네요. 고맙습니다."


엥? 내가 더 받아주는 건가?

계약을 일사천리로 진행한 뒤 매수인도 돌아갔고 매도인인 노부부도 돌아갔다. 그런데 10분 후에 노부부가 다시 들어왔다.



"집이 몇 달째 비어있으니 다혈질에다 급한 성격이라 무지 신경이 쓰였는데 이렇게 잘 팔아주셔서 감사합니다''

"네? 급한 성격이시라구요? 재촉 한번 안 하셔서 그런 생각 못했는데요?"


했더니


" 6개월 전 집을 내놓을 때 중개사님이 '집은 임자가 있으니 때가 되면 계약이 될 거다 걱정 말고 기다리시라' 해서 군말 없이 기다렸어요"


엥?

내가 그런 말을 했었나. 만약 했다 해도 그건 그냥 상투적으로 하는 말 아닌가... 그런데 그 말 한마디에 몇 개월째 집을 비워놓은 채로 전화 한 통화 없이 기다렸다고?

70대 매도인이 말을 이었다.


" 2년 전 인근 OO지역에 지주택 아파트를 분양하면서, 분양가가 싸고 주변이 많이 개발된다고 하는 말을 듣고 저희 부부가 덜컥 계약금을 걸었잖아요. 그 후 부동산에 들렀더니 중개사님이 지주택 아파트에 대해 자세히 설명해 주셨죠? 그래서 다음날 분양사무소 쫓아가서 계약금을 환불받았어요."


당시에 교회 사람들이 많이들 가서 계약했는데 노부부만 내 말대로 계약을 해제했고, 결국 그 지주택 건은 무산돼서 계약금 건 사람들은 몇 년째 질질 끌려다니며 고생하고 있단다.

노부부는 환불받은 계약금으로 핫한 신도시 아파트 분양 신청을 했고 현재는 프리미엄이 수억 올랐다고 했다.


그래서 이 모든 게 다 부동산 대표님 덕분이라며, 그러니 뭐든지 내 말대로만 하면 된다고 서로 다독이며 몇 개월째 숨죽이며 기다렸단다.



기억이 가물가물한데 참 많은 일이 있었구나. 소싯적에는 기억력 좋고 총명하다는 소리를 듣기도 했는데, 요샌 내가 생각해 봐도 나는 아무 생각이 없다. 돌아서면 잊어버린다. 안 잊어 먹고 꼬박꼬박 제대로 하고 있는 건 하루 세끼 밥 먹는 것뿐이다.


그리고 그날은, 건강검진받은 후 결과 들으러 가야 하는데 계속 미루고 있단 생각이 들어서, 억지로 시간 내어 갔다. 1시간가량 기다렸다 만난 의사 선생님이 무슨 일로 왔냐고 물어서 건강검진 결과를 들으러 왔다고 했더니


"지난번 건강검진 하신 후에 바로 결과 다 말씀드려서 오실 필요가 없었는데요?"

했다. '제가 별 문제없다고 한 거 기억 안 나세요?' 해서 나는 건강검진을 한 건 기억나지만 의사 선생님을 만난 건 기억이 안 난다고 했다. 의사 선생님은 올 필요도 없는데 와서 장시간 기다렸다고 간호사한테 '진료비 받지 말고 그냥 가시게 해요~' 했다.


나는 많은 걸 잊으며 살고 있다.

아마 조금 있으면 뭘 잊어버렸는지 조차 기억해내지 못할 것이다. 그래도 나는 70대 노부부가 '너무 고마우니 잔금 때 중개보수 2배로 주겠다'라고 한 건 아마 안 잊을 것이다.


초과보수는 당연히 받으면 안 되고 안 받을 거지만 그 따뜻한 마음은 꼭 받아서 깊이 간직할 것이다.

언제부턴가 골치 아픈 건 저절로 잊어지고 내가 뭘 받거나 먹기로 한 건 꿈에라도 안 잊혀진다.


keyword
이전 11화중개사의 천태만상 현장일기(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