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주인과 세입자의 변기 전쟁
임대인이 단독주택을 사서 가는 바람에 전세를 시세보다 싸게 놓은 집인데,
사건은 임차인이 입주청소를 맡기면서부터 시작되었다.
청소업자가 화장실 청소를 하다 보니 변기에 금이 가 있었다.
임차인이 사진을 찍어보내며 변기를 당장 교체해 달라고 했다.
임대인한테 전달했더니
"제가 이사 들어올 때부터 그렀는 데 사용하는데 아무 문제가 없었어요.
문제가 있다면 교체했겠죠. 그냥 쓰라고 하세요."
남이 쓰던 변기는 멀쩡해도 교체하기도 하는데 왜 금까지 간 변기를 그냥 썼는지....
임차인한테 전달했더니 당연히 난리가 났다.
'변기에 앉아서 일을 보다가 변기가 망가져서 발목이라도 다치면 어떡하냐 당장 교체해 달라고 해라.'
그러나 임대인은 완강했다.
양쪽 다 계약 당사자는 남편 명의임에도 젊은 여자분들이 나섰는데,
계약 시부터 신경전이 있었고 급기야는 장미의 전쟁이 되었다.
아이고..... 더 이상 전화로 중재하는 걸 포기하고 있었더니
임차인이 '변기값 알아보니 20만 원이라는데 반반씩이라도 하자!'라고 제안했다.
전쟁 돌입 후 약 3시간 만에 나온 제안인데 임대인한테 이야기했더니,
그분은 이미 제2라운드 '자존심 싸움'에 돌입한 상태였다.
"망가지면 내가 교체해 줍니다. 지금은 반반이고 뭐고 안 합니다"
둘 다 눈빛만으로도 수박을 썰어 화채로 만들 포스였다.
반반치킨도 아니고 반반부담을 거부했다는 말도 전하기 싫어서 그냥 있었더니, 임차인한테서 문자가 왔다.
변기 문제가 해결이 안 되면 잔금 안 치르겠다는 선언!
읽고 모른 척하았더니 다시 전화가 왔다.
임차인: 주인한테 변기 안 고쳐주면 잔금 안 치른다고 전했는가?
중개사: 안 전했다
임차인: 왜 안 했느냐
중개사: 지금 그 말 전하면 감정이 극에 달한다 그러니 내일 얼굴 보고 이야기하자
그랬더니 중개사가 중개를 안 하고 어쩌고 저쩌고 하길래 나도 폭발했다.
"자기 입장이 항상 옳은 건 아니에요. 그쪽 가족들은 그런 변기로 어떻게 사냐고 당장 교체해주지 않으면 잔금 치르지 말라는 게 중론이면, 다른 사람들은 주인이 교체해 주면 좋겠지만 당장 못 쓰는 건 아니니 쓰다가 망가지면 그때 교체해 달래지 뭐,라고 넘어갈 수도 있어요."
그래도 절대 잔금 안 치르겠다고 해서
'우리나라 주택임대차보호법은 임차인을 보호하는 주택임차인보호법이다.
그래서 임차인한테 불리한 건 효력이 없다. 그러나 민법에서는 계약해제 조건에 대해서 엄격히 규정하고 있다. 변기에 금이 간 걸로 잔금 안 치르면 당신 책임으로 계약해제 되는 것이고 그러면 당신은 계약금을 포기해야 한다.
변기가 폭삭 주저앉아서 쓸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해도 주인한테 수리의무가 주어지고 수리비를 청구할 수 있을 뿐 잔금을 치르지 않을 사유가 되지는 않는다.
참고로, 매매거래에서 거실 천장이 무너진 경우에도 계약의 목적을 달성할 수 없는 경우에 해당하지 않아
손해배상만을 청구할 수 있다는 판결이 난 사례도 있다.'
그러자 한참을 훌쩍거리더니,
임차인: 그러면 내일 계약서에다 변기로 인해 상해 사고가 났을 경우 임대인이 피해보상해 준다는 내용을 적어주세요.
중개사: 못해요. 변기에 금이 간 거랑 변기로 인해 상해사고가 나는 것은 인과관계가 약하고 그런 내용을 적자는 건 싸우자는 뜻이에요.
임차인: 그래도 적어주세요.
중개사: 계약서에는 양측이 동의한 내용이 아니면 적을 수 없어요. 임대인이 동의하지 않은 내용을 적으면 계약서 위조가 돼요. 계약서 위조에 대한 모든 법적 책임을 진다는 확약서를 먼저 써주면 고민해 볼게요.
했더니 마지막으로
임차인: 집에 주인이 놓고 간 쓰레기가 있는데 그거 당장 치워달라세요.
'알았다 내가 지금 가서 치우겠다' 하고 가서 쓰레기를 가져오려는데... 너무 무거워서 들 수가 없었다.
낑낑대며 현관 앞에 내놓고는 다시 차를 끌고 와서 싣고 집으로 갔다.
다음 날 잔금 시간은 2시.
밤새 잠을 못 잔 듯 다크서클이 코밑까지 내려앉은 임차인은 자리에 앉자마자
"아무리 생각해도 저 변기는 못쓰겠어요!"
임대인이 '내일이든 언제든 망가지면 교체해준다고 하지 않냐' 했더니,
그 내용을 계약서에 써달라고 했다.
알았다 하고 쓰고 있는데 다시 임차인이 '누가 다치면 피해보상 해준다' 고 써달라고 했다.
임대인이 그러라고 해서 일단 문구를 적고 있는 사이에 임차인이 다시 격앙된 목소리로
임차인: 우리 아이는 변기 위에 올라가서 뛰기도 하는데 당장 내일이라도 다칠까 걱정돼서 잠이 안 와요!
임대인: 변기 위에 올라가지 못하게 해야죠. 변기가 망가지거나 하는 건 해결해주겠지만 그 위에 올라가서 뛰다 다치면 그건 그쪽이 알아서 해야죠.
다시 임차인이 왕방울만 한 눈을 굴리며
"그럼 두 돌 된 아이를 못 움직이게 묶어 놓으라는 건가요?
참내 애를 낳아보고 키워봤어야 뭘 알지!"
얼씨구.... 임대인 부부는 아이가 없었다. 나가도 너무 나갔다. 이건 아니다 싶었다.
말릴 틈도 없이 봇물 터지듯이 쏟아지는 발언이 한계령을 넘어갔다.
임차인: 살다 살다 이렇게 치사한 집 처음 본다. 이런 집 끼고 살지 왜 세를 놓았냐. 집 가진 게 유세냐.
눈에 불꽃이 튀며 맞받아치는 임대인.
이거 원 머리채만 안 잡았지 위험수위를 넘나드는 발언을 하고 말들은 또 얼마나 빠른지 기어가던 개미가 놀라서 뒤집어질 형국이었다. 그만 좀 하라고 소리를 쳐도 소용이 없어서 결국....
정산서 다 뺏고 나는 오늘 잔금 안 할 거니 둘 다 그냥 가라고 했다.
"중개업 20년 해보니 이보다 더 험한 집도 있고 더 안 좋은 상황도 있었지만
변기 때문에 한치도 양보 안 하고 싸우는 팀은 처음 봤다. 나는 이런 잔금 하기 싫다.
중개사의 업무는 물건을 중개해서 계약서를 작성하여 중개대상물확인설명서, 공제증서와 함께 교부하면
사실상 끝이 난다. 오늘은 잔금 이행과 목적물 명도를 계약대로 이행하는지 관리할 뿐이다.
그런데 이 상태로는 하기 싫어졌다. 둘 다 당장 나가고 1시간씩 쉬었다 다시 와라."
갑자기 소리 지르며 나가라 했더니 눈만 동그랗게 뜨고 끔뻑거리길래
'나 지금 1시간 정도 쉬어야겠으니 빨리 나가라!
나가는 순간부터 카운트해서 1시간 후가 잔금 시간이다'
라고하고 문을 활짝 여니 둘 다 쭈뼛거리고 나갔다.
그리고 슈퍼에 들러 아이스크림을 두 개 사 와서 쭉쭉 빨아먹었다. 스트레스엔 당분이 필요해..
1시간이 지나니 양쪽 다 칼같이 와서 뻘쭘하니까 각자 폰만 들여다보고 있었다. 나는 다시 말했다.
"내 입장을 말하겠다. 나는 변기를 중개한 게 아니니 둘이 변기를 들고 싸우든 던지든 그건 둘이 알아서 하고, 나는 변기 때문에 계약서에 뭘 적고 어쩌고 하는 일은 안 하겠다. 그냥 계약서대로만 진행하겠다."
임차인: 내일이라도 누가 변기에 앉아있다가 변기가 깨져서 다치면 어떡하나?
중개사: 솔직히 저 정도 금이 갔다고 변기에 앉아있다가 깨져서 다칠 정도의 상황까지 오겠느냐.
온갖 경우의 수를 나열하자면 논문을 써야 한다.
임대인: 나는 저 변기로 5년을 살았다. 그런데 이걸로 이렇게 난리 친다는 걸 이해할 수 없다.
중개사: 어떤 상황에 대해 대처하는 자세는 다 다르다. 이제 와서 말하지만 그동안 숱한 집을 중개하면서 변기가 금이 간 상태로 사는 집은 드물더라.
임대인: 이 집을 지금 팔면 얼마나 받느냐.
중개사: 세입자 앉혀놓고 그냥 집 팔아버린다는 말은 반칙이다. 계약해제 되면 그때 매도의뢰하라.
"임차인은 내일이라도 변기나 혹은 집의 다른 부분에 문제가 생겨서 불편하면 연락해라.
임대인은 임대인의 의무에 해당하는 범위 안에서 할 것은 다 해줘라.
그러나 내 말대로 잔금 이행 못하겠는 분은 나가셔도 좋다.
지금 먼저 나가는 분 책임으로 계약해제 처리하겠다!"
그러자 갑자기 다들 원래 착했던 사람들처럼 조용히 송금을 하고 조용히 영수증을 써주고 했다.
정산서 서명받아 카피해서 한 장씩 나눠주고 보냈다.
그리고 남은 아이스크림 한 개를 다시 쭉쭉 빨아먹으면서 생각했다.
임대인이야 뭐 그냥 그냥 이겠지만 임차인 와이프가 분에 못 이겨 변기를 끌어안고 통곡하지 않을까 걸려서
'그냥 내가 교체해 주자!' 하고 설비아저씨 보내 변기를 교체해 달라고 의뢰하려는데 계속 통화 중이었다.
그때 임대인이 전화를 했다.
"어제부터 이틀간 너무 죄송했어요.
방금 중개보수랑 변기값 보냈어요. 이제라도 주면 임차인이 받으려나요?"
돌아가는 발걸음이 안 편했다 한다. 바로 입금됐길래 임차인한테 전화해서 임대인이 변기값을 보내왔다 했더니..... 언제 그랬냐는 듯이
'아유 그럼 제가 미안한대요.. 아유 그렇게까지 할 생각은 아니었는데 어쩌고 저쩌고'...
비가 많이 온다더니 '변기와의 전쟁'이 벌어진 사이에 다 그쳤다.
비가 그만 와야 한다. 안 그러면 누수와의 전쟁의 서막이 오를 참이다.
변기가 낫나 누수가 낫나 생각해 보니 누수가 조금 낫다.
누수는 스케일이 크고 넓으니까 중재해도 뽀다구가 좀 나는데 변기는 영......
열 누수 한 변기 안 부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