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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예솔 Feb 25. 2021

엄마는 왜 힘줄이 끊어진 걸 몰랐을까?

2020년은 나에게 유난히 힘든 한 해였다. 7월에 귀를 다쳐 돌발성 난청이 생기기도 했지만, 그보다 앞선 1월에 스노보드를 타다가 십자인대 부분 파열이라는 제법 큰 부상을 입었기 때문이다. 나는 매년 겨울이면 스노보드를 탔는데 보드 지인 중에선 손꼽히는 '역대급 쫄보'였다. 딱히 스피드를 즐기는 것도 아니고, 매사에 몸을 사리는 내가 왜 굳이 스노보드에 흥미를 느꼈는진 지금도 모르겠다. '너같이 실력이 늘지 않는 애는 처음 봤다'라는 주변의 장난 섞인 놀림에도 나는 매년 꿋꿋하게 스키장을 찾았다.


어느덧 4번째 시즌을 맞이했고, 4년째 보드를 탔다고 보기엔 상당히 무리가 있는 실력이었다. 누군가 "보드 탄 지 얼마나 되셨어요?" 물으면 그냥 잘 타지 못한다고 초라하게 얼버무리기 일쑤였다. 적지 않은 사람들이 내게 보드를 가르쳐주겠다고 나섰지만 얼마 안가 모두 포기 선언을 했다. 난공불락의 요새 뭐 그런 것과 비슷하다. 

그도 그럴 것이 나는 높은 경사의 슬로프와 빠른 속도감이 너무나 무서웠다. 한마디로 스노보드와는 상극이라는 말이다. 그래도 4년씩이나 보드를 탔는데! 이번 시즌에는 이 찌질한 두려움을 극복하고 제대로 타보자는 결심이 생겼다.


때마침 명성을 익히 들어온 실력자 지인이 선뜻 가르쳐 주겠다고 나섰다. 첫날 자세가 눈에 띄게 좋아졌고 나는 처음 보드를 배웠을 때의 설렘까지 느꼈다. 이때가 4년 통틀어 가장 열성적으로 보드를 탄 시기였다(실력이 안 느는 덴 다 이유가 있다). 호기롭게 100만 원짜리 보드도 새로 구입했다. 그리고 정확히 일주일 뒤에 십자인대가 파열됐다.




십자인대는 무릎을 잡아주는 중요한 인대인데 이게 끊어지면 무릎이 상당히 자유분방해진 느낌이 든다. 기분 나쁘게 덜렁댄다고나 할까. 처음엔 그저 생경한 감각만 느껴지고 통증이 심한 게 아니라 일시적인 부상으로 생각했다. MRI를 확인해본 의사는 "전방 십자인대, 후방 십자인대 부분 파열이네요."라고 말했다. 

군대 면제 사유로만 접했던 십자인대 파열이 의사 입에서 나오자 나는 상당히 당황스러웠다. 다행히 수술이 필요한 정도의 심한 파열은 아니었기에 보존치료를 하기로 했다. 병원을 나올 때 내 왼쪽 다리엔 늠름한 보조기가 채워져 있었다.

 

애증의 보조기. 가격도 꽤 나간다.


차라리 깁스를 했으면 경과가 더 좋았을지도 모른다. 나는 재택근무를 하기 때문에 집에서 보내는 시간이 많다. 주로 앉아있다 보니 보조기가 상당히 불편했고 자연스레 풀고 있는 시간이 늘었다. 제대로 고정이 안 돼서인지 회복은 내 기대보다 훨씬 더뎠다. 이 무렵엔 무릎 통증도 상당했다. 일 년이 지난 지금도 무릎을 꿇거나 운동을 할 때 약한 통증이 있다. 사지가 멀쩡하다는 건 대단한 축복이다. 꼭 이렇게 다쳐봐야지만 깨닫게 되는 게 문제지만. 엊그제 헤어진 애인을 그리워하며 '미안해. 그땐 소중함을 몰랐어.' 하는 것과 비슷한 심정이다. 나는 어느새 십자인대를 그리워하는 인간이 되었다.  


한 번은 격하게 오열을 한 적이 있다. 삼순이(내가 키우는 삼색 고양이고 귀엽다) 화장실 청소를 하는 날이었다. 기존 모래를 버리고 화장실을 씻기 위해 욕실로 들어가다가 그대로 미끄러졌다. 이때는 무릎을 제대로 굽히지 못했는데 미끄러지면 무릎이 심하게 접혔다. 근육이 찢어지는 듯한 끔찍한 아픔이 악 소리와 함께 터졌다. 모르긴 몰라도 이때 십자인대가 더 찢어졌을 것이다.


처음엔 너무 아파서 울음이 터졌고 곧 서러움이 밀려왔다(믿지 않겠지만 나는 아픔을 잘 참는 편이다). 화장실 변기에 기대서 한 20분을 어린애처럼 엉엉 울었다.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는데!" 

듣는 사람 없는 절규까지 곁들이며 실컷 울음을 쏟아냈다. 몸이 아프면 세상 사람들 다 멀쩡한데 나만 고통을 겪는 것 같은, 시련의 주인공류의 서러움이 차오르곤 한다. 찰랑거리던 감정이 그날 폭발한 것이다.




엄마가 어깨 통증으로 고생한 건 적어도 4~5년 전부터다. 엄마는 오래전부터 시장에서 장사를 해왔고 일 특성상 팔을 자주 쓴다. 내가 일본 여행을 다녀올 때마다 사다 준 동전 파스를 늘 어깨와 팔에 붙이고 있었다. 엄마도 나도 그저 나이 든 사람들의 고질적인 어깨 통증 정도로 생각했다.

언젠가부터 잠든 엄마의 방에서 "아이고 어깨야." 하며 앓는 소리가 자주 들려왔다. 나는 무릎 부상 이후로 꾸준히 도수치료를 다니고 있었기에 엄마에게도 도수치료를 권했다.


"엄마. 맨날 파스만 붙이지 말고 도수 치료 좀 받으러 가라."

"가게 비우고 거기 갈 시간이 어디 있노."


절대 가지 않겠다는 의지가 담긴 단호한 대답이었다. 시간은 계속 흘렀고, 엄마는 여전히 불 꺼진 방 안에서 아픔으로 뒤척였다. 주말에 집에 놀러 온 작은 언니가 도수 치료보단 종합 병원에서 정밀 검사를 받아보는 게 좋겠다고 했다. 곰곰이 생각하던 엄마는 추석이 지나고 가보겠다고 했다. 이때가 8월이었다.


"사람이 우째 저래 미련하노!"

엄마랑 병원에 다녀온 아빠가 언성을 높였다. MRI를 찍어보니 어깨 회전근개가 파열됐는데, 이게 끊어진 지 오래돼서 다른 근육으로 말려든 상태였다고 한다. 근육이 끊어지면 시간이 지날수록 각자 반대편으로 당겨져 거리가 점점 멀어지게 된다.

의사가 "끊어진 지 오래돼서 상당히 아팠을 텐데..."라고 했다니 답답한 아빠의 심정도 이해가 갔다. 아마 답답함보단 안타까움이 컸을 것이다. 나 역시 그랬다.


엄마는 왜 힘줄이 끊어진 걸 몰랐을까. 아니 어떻게 그 아픔을 참아왔을까. 통증으로 뒤척이던 그 숱한 밤을 나는 왜 대수롭지 않게 넘겼을까. 생각의 끝은 내 죄책감을 들추기 시작했다. 당연하게 받아먹던 엄마의 음식들, 물에 담가 놓기 일쑤였던 설거지들, 약속 시간에 늦었다는 이유로 보고도 걷지 않은 빨래들.

그 모든 것들이 힘을 합쳐 엄마의 힘줄을 서걱서걱 썰어나간 것만 같았다. 엄마는 우리를 원망하지 않을 테지만(아마도 아빠는 예외인 것 같다), 게으른 딸을 뜨끔하게 하기에 충분한 사건이었다.


어깨 회전근개 파열은 주로 4~50대 이상의 연령대에 나타나는 퇴행성 질환으로 특히 가사노동을 많이 하는 중년 여성 환자가 많다고 한다. 말하자면 집안일에 의한 산재다. 실제로 엄마가 입원한 6인실 병실엔 같은 질환의 아주머니 2명이 더 있었다. 심지어 한 분은 5년 전 오른쪽 어깨를 수술하고 이번엔 왼쪽을 수술했단다. 

한쪽 팔에 보조기를 한 채 얘기하는 그 아주머니도, 우리 엄마도 어쩐지 담담해 보였다. 자식들에게 "병원에 올 필요 없다" 일러두는 것도 한결같았다. 그녀들은 어째서 매사에 괜찮다는 걸까.


욕실 바닥에 주저앉아 눈물을 쏟았던 때가 떠오른다. 없던 원망의 대상을 만들어가며 서러워하던 그때를. 엄마도 아픈 어깨를 부여잡고 서러움에 울었던 적이 있었을까. 우리를 키우는 동안 그리고 지금까지도 쉼 없이 놀리던 그 처연한 어깨엔 내가 본 적 없는 몇백 번의 울음이 담겨있을 것만 같다. 나로선 감히 가늠할 수 없다.

나도, 내 친구도, 심지어 게시판에 글을 올린 이름 모를 누구도 저마다의 아픈 구석을 부여잡고 살고 있다. 그런데 왜 가장 곁에 있는 엄마는 괜찮다고 생각했던 걸까.


엄마의 어깨 수술 이후 나는 매일 설거지를 해놓고 빨래를 외면하지 않는다. 이게 얼마나 도움이 될런지 모르겠고, 그저 죄책감을 덜기 위한 행동일 수도 있다. 내게 왼쪽 다리가 늘 신경을 기울이게 하는 아픈 다리가 되었듯, 엄마의 오른쪽 어깨는 게으른 딸의 마음 한편을 가련하게 차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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