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년 학급을 맡다보면 해마다 있는 전형적인 유형의 아이들로 학급이 이루어짐을 알게 된다.
공부 잘하고 야무진 아이, 털털하고 성격 좋은 아이, 소심하고 예민한 아이, 친구에게 먼저 다가가지 못하는 아이, 공부에는 취미가 없고 손으로 노닥거리는 걸 좋아하는 아이 등등
어느 반에나 있는 그런 아이들.
2018년 이후, 전담, 휴직, 2학년을 거쳐 오랜만에 고학년을 맡게 되었다.
이제까지 봐왔던 유형의 아이들이 대부분인데 그 중 정말 새로운 유형의 아이들을 만나게 되었다.
먼저, A.
A는 첫날부터 수업 시간에는 고개를 푹 숙이고 있다가 배움공책을 쓰자는 말에
"그딴거 왜 써요?"하며 쏘아붙이는가 하면 계속 의자를 뒤로 젖히기에 지적을 했더니
"아, 왜요? 의자 좀 젖히면 어때서요?"
"......"
이제껏 반항하고 말 안듣는 아이는 대개 남자 아이었기 때문에 이 여자 아이는 굉장히 신기하게 다가왔다.
'뭐지? 요주의 인물인가?"
그런데 알림장을 써 왔는데 글씨가 정말 반듯하고 예쁘다. 그래서 칭찬을 해 주었는데 눈빛을 반짝이며 기뻐하는 것이었다.
그런가 하면 "선생님, 친구들이 노는 데 나는 안 끼워줘요. 나하고는 왜 아무도 안 놀아줘요?"
하면서 눈물을 글썽이며 오기도 했다.
'아이들 사이에서 문제아라는 낙인이 찍힌 아이일까?"
자연스럽게 노는 분위기를 만들어줬더니 또 신나게 놀기도 한다.
미술 시간에 보니 그림 실력도 수준급이다. 진단평가를 쳤는데 성적이 우리반 1등이다.
버릇없이 말대꾸를 해서 혼을 냈더니 쉬는 시간에 다가와서 "선생님, 죄송해요."라고 말할 줄도 안다.
친구한테 "꺼져라." "이 또라이 같은 게."라고 내뱉았다가도 대화를 시켜보면 진짜 미안해 하면서
"내가 그런 줄 모르고 그랬지. 미안해."라고 사과를 하기도 한다.
3주간 겪어보고 내린 결론은
마음이 여린데 표현이 거칠고 고집이 세고 자기 주장이 강하며 예민하고 머리 좋은 아이라는 것이다.
처음엔 좀 힘들었지만 어떻게 대해야 할지 알것도 같다.
앵그리버드처럼 투덜거리지만 귀엽게 보이기도 한다.
또 한명의 새로운 유형의 아이 B
B는 우수에 찬 눈빛을 하고 있으며 말이 거의 없고 행동이 느리지만 모범생의 분위기를 물씬 풍기는 아이다. 내가 뭘 물으면 고개를 끄덕이는 것도 2배속으로 하는 느낌이다. 남학생치고 글씨도 예쁜 편이고 느리지만 뭐든 꼼꼼이 해낸다. 진단평가도 A와 함께 공동 1등이었다. 우수에 찬 눈빛을 하고 있다가 슬며시 미소 짓는 게 마스크 위로 보이는 눈만 봐도 느껴져서 내가 좋게 생각해 온 아이다.
오늘 수학 시간에 A와 B가 폭발했다.
수학 1단원을 마치고 단원평가를 쳤는데 시험지를 나눠 주기 전에 분명히 말해뒀었다.
모르는 문제가 나오면 별표를 쳐놓고 다른 문제부터 풀다가 다 풀고 나서 다시 별표 쳐 둔 문제로 돌아가서 3번 이상 생각해 보고 그래도 모르겠으면 가지고 나오라고.
그리고 이 시험은 그냥 선생님이 너희들이 1단원 내용을 어느 정도 잘 학습했는지, 2단원 넘어가지 전에 너희들에게 더 가르쳐야 할 것이 있는지 알아보려고 치는 거니 너무 부담 갖지 말고 편하게 치라고 말이다.
그런데 A가 굳이 더 어려운 뒷장부터 풀기 시작하더니 문제가 막히니 눈물을 글썽이며 내게 왔다.
"이거 뭔말이에요. 도저히 모르겠잖아요."
워낙 고집이 센 아이니 '별표 하고 나머지 풀고 세 번 생각'을 지키지 않았지만 한 번 봐주기로 하고 설명을 해 주었다. 그런데 내가 보니 이 아이 내 설명을 제대로 듣고 있지도 않고 막힌 문제가 나왔다는 사실에 잔뜩 흥분한 것 같았다. 여러 번 설명해 줬는데도 "그게 무슨 말이에요. 모르겠다고요."라고만 반복한다. 분명히 풀 수 있는 문제일 법 했는데도.
일단 내가 해 줄 수 있는 설명은 해줬으니 더 생각해 보라고 돌려보내고 다른 아이들 시험지를 걷고 매기고 나는 정신이 없는데 어쩔 줄을 몰라하며 펑펑 울고 있다.
"수학을 제일 잘하는 과목이라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틀리면 어쩌잔 말이에요. 수학 학원도 다니는데 틀리면 어쩌냐고요." 하면서 세상 끝난 아이처럼 절망하고 있는 것이었다.
B는 A보다 훨씬 늦게 내게 왔다. '모르는 별표 하고 나머지 문제 다 풀고 다시 돌아와서 세 번 생각'을 지키고 그래도 모르는 문제가 있어 가지고 나온 것이었다. 그런데 물어보는 목소리가 좀 낯설다. 평소보다 훨씬 빨리 말하고 있고 뭔가 흥분된 것 같았다. 문제의 해결방법을 아예 잘못 짚은 것 같아 내가 설명해 주었더니 약간 이상한 눈빛을 하고는 자리에 돌아갔다. 좀 이상하다 싶었는데 다시 가져 온 시험지를 받아서 내가 매겨주곤 틀린 문제가 있어 돌려주는데 '아!' 아이가 울고 있었다.
시험지를 낚아채서 자리로 돌아가기에 내가 가서 물어봤더니
5번이라고 생각했는데 4번을 적어버렸단다.(정답은 5번이었다.) 그러면서 마치 세상 끝난 것처럼 우는 것이었다.
'아, 이 아이들이 왜 이러지?'
20문제 중에 8개를 틀리고도 희희낙낙 웃는 아이들이 있는데 겨우 2문제 모르는 문제가 있다는 것을 용납할 수 없고, 정답을 잘못 적은 실수를 용납할 수 없는 이 두 명의 아이.
집에서 완벽을 요구하나? 집안 분위기가 실수를 용납하지 않는 분위기인가? 솔직히 아이들에게서 문제점을 발견하면 집안 분위기를 상상하는 게 항상 먼저가 된다.
스스로 세워 놓은 기준이 얼마나 높으면 단원평가 하나에 이렇게 부들부들 한단 말인가.
이런 일에 이렇게 눈물을 흘리고 좌절한다면 앞으로 세상을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나는 아이들이 안타까웠다.
눈물도 닦아주고, 모르는 문제가 있을 수도 있다. 어떻게 아는 문제만 있을 수 있겠니? 학원 다닌다고 다 백점 맞을 것 같으면 모든 아이들이 백점을 맞아야 하지 않겠니? 누구누구는 이런 실수를 하고 실패를 했지만 다 잘 살고 있다.
안타까운 마음에 나도 모르게 일장연설을 하고 있었다.
괜찮다고 어깨도 토닥여주고 했더니 훨씬 나아져 보였다. 앵그리버드 A가 먼저 회복을 했다. B는 다음 시간이었던 영어 수업에까지 기분을 회복하지 못하고, 집중하지 못하고 눈물 흘린 얼굴을 씻느라, 목이 타는지 물을 마시느라 교실 문을 열고 왔다갔다했다.
오늘은 영어 시간에 정말 재미있는 구미호 게임을 했는데 10분 정도 지났을까? B도 어느새 활동에 참여하기 시작했다. B가 선택한 문장을 친구들과 함께 읽게 되었는데 나도 모르게 "B에게 박수!"라고 했더니 아이들이 즉각 큰 박수를 쳐주었다. 아이들도 B에게 마음이 쓰였었나보다.
그러자 B의 우수에 찬 눈이 웃는 눈이 되었다.
나도 기쁘고, 그렇게 해피엔딩으로 끝이 났다.
이런 다양한 아이들과 함께 하면서 힘들 때도 있지만 토닥토닥 하면서 내가 아이를 위로해 줄 수도 있고, B에게 박수를 쳐 준 아이들의 마음을 생각하며 소소한 감동을 받을 수도 있어서 내가 교사라는 직업을 택하길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A와 B가 또 그럴지도 모르겠다. 내가 해줄 수 있는 건 그럴 때마다 "괜찮다."고 말해주는 것이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