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그날 Apr 09. 2023

응어리

마음을 어루만지는 말

몸이 불편한 남편은 아무렇지 않게 잘 지내다가도 한 번씩 깊은 우울에 빠진다. 처방약도 약이지만 그저 누군가에게 속마음을 털어놓는 것만으로도 큰 위안이 될 수 있기에, 한 달에 한번 남편과 정신건강의학과를 찾고 있다.


얼마 전부터 남편의 말수가 부쩍 줄었다. 언제 그랬냐는   훌훌 털어낼 것을 알면서도,  번씩 그를 찾아오는 고독한 손님을 함께 맞아줄  없어 안타깝기만 하다. 유독 기다려지던 진료일. 언제나처럼 남편의 휠체어를 밀고 진료실에 들어섰다. 처음  번은 남편을 두고 자리를 피했지만,  번의 방문이 계속되자 정신과전문의 선생님은 나도 함께 있을 것을 권하셨다. 여느 때처럼 구석자리에 조용히 앉아 남편의 상담을 지켜보았다. 남편이  시끄러운 얘기들을 털어놓으면 선생님은 차분히  얘기를 들어주신다. 깊이 공감하고 때론 의문을 제기하며 대화가 이어진다. 내게도 종종 의견을 묻곤 하시는데, 그럴 때면 되도록 짧게 대답하게 된다. 남편이 조금이라도  속내를 털어놓고 홀가분해졌으면 하는 마음에.


여느 때와 다름없었던 상담이 끝날 때 즈음이었다. 선생님이 나를 지긋이 바라보시더니 한마디를 건네셨다.


"남편분을 있는 그대로 사랑하는 법을 깨우치신 것 같아요."


순간 전율이 느껴지더니 왈칵 눈물이 쏟아졌다. 전혀 예상치 못한 상황에서 덜컥 위로를 받고는 한참을 훌쩍였나 보다. 북받쳐 터져 나오는 생각을 속으로 삼키며…


'하지만  말은 사실이 아닌걸요.  자신의 온전한 모습을 사랑하는 것도 쉽지 않은데, 제가 정말 남편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있을까요...'


그저 남편이었을 때는 크게 보이지 않았던 그와 나 사이의 간극은 그의 보호자가 되고 나니 여실히 드러나기 시작했다. 그 차이를 메우는 것은 오롯이 내 몫인 것만 같았다. 그 짐이 버거워 한껏 움츠려들다가도, 가늠조차 할 수 없는 고통에 시달리는 남편을 보면 내가 짊어진 무게는 한낱 스쳐가는 바람처럼 가볍게만 느껴졌다. 나는 어지러운 마음을 다스리지 못하고 한참을 방황했다.


몸에 좋은 음식을 거부하는 남편을 보며, 형제들과의 교류마저 끊어버리는 남편을 보며, 한 번씩 세상을 등지고 입을 닫아버리는 남편을 보며... 나였다면, 나라면 다르게 행동했을 텐데라는 생각이  때마다 가슴에 돌덩이가 내려앉은  괴로웠다.  가정 자체가 오만이었음을 느낀 것은 한참이 지난 후였고, 그제야 그의 모든 선택을 존중하기로 마음먹을 수 있었다. 그리고 묵묵히 그의 곁에서 내가   있는 일을 했을 뿐이다. 이런 내가 무엇을 깨우쳤다고   있을까.


그 과정에서 여기저기 멍이 들고 응어리가 졌다. 꼭꼭 숨겨놓았는데 선생님에게는 보였나 보다. 어디까지나 남편의 상담시간이지만 멍울진 내 마음 또한 모른척할 수 없으셨던 걸까. 사실 여부를 떠나, 나를 들여다봐준 선생님의 한마디가 나를 품고 어루만진다. 사람 마음이란 게 참 이상해서, 나도 모르는 감정의 찌꺼기들이 단단히 응어리를 맺어놓고는 그저 누군가 정성껏 들여다봐주니 쉬이 풀어져버린다. 해묵은 응어리들이 녹아내리니 그저 감탄과 감사를 보낼 밖에. 따듯한 말 한마디로 마음을 어루만진다는 것이 어디 쉬운 일이겠는가. 


내가 남편의 마음을 이토록 정성껏 들여다보았다면... 남편의 가슴 저 밑바닥에 숨어서 다져지고 또 다져졌을 돌덩이 같은 응어리들. 그 속까지 들여다봐주었어야 하는 것을 나는 충분히 깊지도 뜨겁지도 못했다. 조금은 뜨거워진 가슴으로 남편을 꼭 끌어안아보았다. 더 깊이 들여다 보고 더 따듯한 말로 어루만져주리라 다짐하면서. 그 마음이 통한 것일까? 오랜만에 남편과 길고 긴 대화를 나누며 밤을 보냈다. 더없이 감사한 하루가 저무는 것을 아쉬워하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