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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날 May 21. 2023

낙천주의자이기를 포기했다

슬픔을 만끽한다는 것

남편은 늘 최악의 상황을 먼저 생각한다. 어떤 일이든 쉽게 낙관하는 법이 없고 종국에는 비극적인 결말로 이어질 수 있다는 걸 늘 염두에 두고 산다. 그런 그에게 사람들은 늘 괜찮아질 거다, 긍정적으로 생각하라고 말한다. 남편이 그런 말을 듣는 걸 끔찍이 싫어하는데도 그들은 멈추지 않는다. 한 번쯤 생각해 주었으면 좋겠다. 긍정을 강요하는 사회적 통념이 이미 온 힘을 다해 저항하고 있는 그에게는 뭐라도 더 해보라는 불편한 독촉이 된다는 걸. 그를 더 불안하고 흔들리게 만든다는 걸.


이렇게 말하는 나 또한 남편이 지나치게 비관적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그의 투병을 지켜보면서 그 생각은 바뀌기 시작했다. 최악의 결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생각은 그의 삶을 더 치열하게 만들었다. 인생을 고통과 시련의 연속으로 바라보기에, 그가 겪고 있는 고난이 무엇을 앗아가고 무엇을 남기든 그 또한 삶의 일부임을 잊지 않는다. 한 번씩 모든 것을 내려놓겠다 울부짖다가 다시 희망을 품기를 반복한다. 그렇게 기약 없이 표류 중이지만, 그는 자신의 삶에 비겁한 법이 없다.


돌이켜보면 나는 대책 없이 낙천적이었다. 긍정적인 사고는 늘 환대를 받았으니 시나브로 늘 긍정적이고 행복해야 한다는 강박에 빠져들었는지도 모르겠다. 모든 것이 그저 잘 풀릴 거라고, 상황을 좋게만 해석하려 애썼다. 어떤 상황에서도 괜찮다고 생각하고 억지로라도 웃었다. 그렇게 내가 해야 할 일들을 해 나갈 수는 있었지만 나는 많은 걸 놓치고 있었다. 현실을 제대로 마주할 용기가 없어서 버거운 오늘 대신 허황된 내일을 그렸을 뿐이니까. 그렇게 수많은 오늘을 외면하고 낭비한 뒤에야 알게 되었다. 나는 오랜 시간 스스로를 기만해왔다. 비겁했다.


이제는 현실을 외면할 수도, 그러고 싶지도 않은 나는 더 이상 낙천적이지 못하다. 그저 꼿꼿이 고개를 들려 애쓰고 있다. 허황되지도, 그렇다고 염세적이지도 않은 시선으로 내 삶을 바라보려고. 그런 담백한 시각이야말로 인생을 더 충만하게, 그래서 아름답게 영위할 수 있는 출발선임을 이제야 조금 알 것 같기 때문이다.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직시하고 어떤 현실이든 맨몸으로 끌어안는 것. 이를 어찌 비관이라 할 수 있을까. 어떤 상황이든 받아들이고 내가 할 수 있는 것들을 하나씩 실천하는 힘, 그 힘을 키우는 것이야 말로 삶에 대한 진정한 긍정이 아닌가.




얼마 전 남편이 산책을 하다가 크게 넘어졌다. 전혀 통제되지 않는, 이미 약해진 그의 발목은 충격을 버티지 못하고 으스러져버렸다. 또다시 입원을 하면서 우리는 이년 전 상황을 복기해야 했다. 고통에 잠 못 이루는 밤들. 꼼짝없이 병원에 갇힌 채 더디게 버려지는 시간들. 또다시 끝을 생각하는 남편에게 다 괜찮아질 거라는 말은 나오지 않는다.

 

버텨줘서 고마워...


그의 슬픔과 고통을 함께 끌어안으니 내가 느끼는 날것의 감정이 그대로 새어 나왔다. 그가 생각하는 끝이 그가 겪고 있는, 또 겪어야 할 모든 것으로부터의 해방임을 모르는 바 아니기에... 또 하루를 버텨내는 그에게 내가 줄 수 있는 감정은 그저 고마움이었다.


며칠간 병실에 누워만 있던 남편은 계속 우울하다고 말했다. 애써 밝은 척, 괜찮은 척이 되지 않는다. 다시 비겁해지지 않기로 했으니까. 그토록 외면하려 했던 슬픔과 두려움에 잠식당하더라도 그 또한 내 삶의 일부임을 받아들이기로 했으니까. 이 상황에서 우울하지 않은 것은 정상이 아닐 테니 같이 우울해하자고 말하고 억눌러왔던 감정을 하나씩 터트려보았다. 이따금씩 남편과 부둥켜안고 서럽게 울면서, 태어나 처음으로 슬픔을 만끽했다.


슬픔이건 두려움이건 내가 느끼는 모든 감정에는 이유가 있고 갈망하는 바가 있을 뿐, 잘못된 감정이라는 건 있을 수 없다. 불청객이다 낙인찍고 문전박대해보아도 인정받지 못한 감정들은 계속 서성이며 문을 두드렸다. 그저 기꺼이 맞아 안아주고, 쓰다듬어 돌려보내니 그뿐이었다. 찾아오는 감정들을 한껏 품으니 불쑥불쑥 고개를 내밀던 공허함과 불안은 도리어 머물 곳을 잃었다.  


낙천주의자이기를 포기하고 더없이 편해지는 마음이라니. 그 아이러니에 실소를 짓는다. 양다리에 깁스를 한 남편은 어차피 못 걷는 데 무슨 차이가 있느냐며 웃어주었다. 그 초연함에 마음이 아려오면서도 마주 보고 웃을 수 있다는 사실 하나에 힘을 얻어 다짐해 본다. 이 또한 지나가기를 기다리며 부단히 주어진 오늘을 살아야지. 내어줄 것은 내어주고 남는 것은 깊이 간직하며, 고개를 들고 마음을 열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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