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그날 Apr 30. 2023

그냥, 네 생각이 나서

용건 없는 전화

전화번호가 빼곡히 적힌 작은 수첩과 알뜰하게 모은 동전을 손에 쥐고 공중전화 부스를 찾던 때가 있었다. 딱히 할 얘기가 없어도 내내 붙어 다니던 친구들에게 수시로 전화를 걸곤 했었다. 공중전화에 대한 마지막 기억은 이민을 가기 전, 서로 좋아하던 같은 반 남학생과의 통화였다. 편지를 하겠다는 말 외에는 달리 할 말이 없었지만 전화를 끊지 못했다. 너무 어렸던 우리는 뭘 어찌해야 할 줄 모르면서도 우리의 관계가 계속 이어질 거라고 철석같이 믿고 싶었던 것 같다. 그저 울먹거리며 수시로 들리는 동전 떨어지는 소리를 원망했던 기억. 그 친구는 어떤 삶을 살고 있을까?


이제는 동전 떨어지는 소리를 신경 쓰지 않아도 언제든 그리운 목소리를 들을 수 있지만, 특별히 할 말도 없이 누군가에게 전화를 거는 일은 드물다. 설령 용건이 있더라도 톡이나 메시지로 대신하는 경우가 많아진다. 그래서인지 오늘 걸려온 옛 친구의 전화가 더없이 반갑고 소중하게 느껴졌다. 그냥 내 생각이 나서 걸었다며 안부를 묻는 친구. 자주, 아니 거의 만나지 못하지만, 잊을만하면 한 번씩 전화를 주는 오랜 벗이다.


나이가 들면서 관계가 단조로워졌다. 무척이나 가까웠던 이들도 각자의 삶에 치이면서 만남이 줄어드니, 서로 간의 접점을 찾기가 힘들어졌다. 시간은 쏜살같이 흐르는데 그들과의 관계는 늘 과거에 머물러 있는 것만 같았다. 반면 현재를 공유하는 시절인연은 계속 얼굴을 바꾸었고, 새 인연에 마음을 쓰느라 오랜 인연에는 무심해지기 일쑤였다. 한 번씩 옛 친구들이 생각나도 그저 생각으로 그칠 때가 많았다. 


그런 내 곁에 오래도록 남아준 친구.

그냥 걸었다는 말, 문득 내 생각이 났다는 말은 가볍게 툭 던져지지만 마음에 자리 잡는 무게는 결코 가볍지 않다. 어떤 이해관계도 없이 그저 서로의 존재만으로 힘이 되는 친구. 이보다 값진 관계가 또 있을까? 함께 했던 시간들을 하나씩 꺼내보며 잠시나마 천진난만했던 시간으로 돌아간다. 언제든 떠올리며 울고 웃을 수 있는 기억을 공유하기에, 물리적 거리에 상관없이 항상 내 안에 있는 친구. 가끔은 그 존재 하나가 나를 버티게 한다.


바라는 것 하나 없이 문득 나를 떠올려줄 사람이 몇이나 될까? 그 수를 헤아려보기 전에 내가 누군가에게 그런 존재가 되어주고 있는지부터 돌아봐야 할 것 같다. 그동안 시간 내어 만나기 어렵다는 핑계로 소중한 이들에게 먼저 연락하지 못했다. 어리석게도 아무리 나누어도 부족해지는 법이 없는 마음을 꽁꽁 싸매두려고만 했다. 보고 싶은 사람이 생각난다는 건, 그 사람을 떠올리는 것 만으로 위안이 되기 때문이지 않은가. 가끔이라도 보고 싶은 이들에게 먼저 전화를 해봐야겠다. 


뭐가 그리 어려웠을까? 그냥 네 생각이 났다고 말하며 마음을 꺼내 놓기만 하면 되는 것을.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