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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진순 Nov 20. 2023

죽음의 질과 연명의료 2

그냥 '최선'이 아닌, '어떤' 최선을 다할 것인가?

고독사, 존엄사, 안락사, 조력존엄사.... 

죽음에 대해 생각하다보면 종종 접하게 되는 단어들이다. 지난 2018년부터 시행되고 있는 ‘호스피스‧완화의료 및 임종 과정에 있는 환자의 연명의료 결정에 관한 법’이라는 긴 이름의 법을 ‘존엄사법’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리고, 의사의 도움을 받아 환자 스스로 목숨을 끊는 조력존엄사를 합법화하는 내용의 개정안이 지난해 국회에서 발의되었다. 우리 사회가 이제 열어놓고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죽음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가 된 것 같다. 우리 모두 죽을 예정이므로. 지금 나는 막연하게나마 몸과 마음의 고통을 최소화한 ‘자연사’를 꿈꾸며 길을 찾고 있다. 

일반적으로 노인이 되어 가면 젊었을 때보다 병원에 가야 하는 상황이 늘어난다. 현재 노인 치료의 핵심적인 문제는, 급성 치료에 중점을 두어온 현대 의료기술이 전혀 다른 문제인 만성 질환자의 치료에 그대로 적용되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가능한 모든 기술을 동원해 최선을 다했는데, 고통의 기간만 연장하는 결과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아지게 된다. 

영국, 미국, 캐나다, 대만 등에는 노인의학 분야가 있으나, 한국에는 이 분야 자체가 없다. 노인의 몸과 건강을 제대로 이해하는 의사가 별로 없다는 것이고, 의대생들은 피부과 성형외과 방사선과 등을 선호한다고 하니 노인을 위한 의료가 뿌리내리기엔 참 척박한 토양인 것 같다. 

현재 법에는 죽음을 앞두고 거부할 수 있는 연명의료행위로 심폐소생술, 인공호흡기 착용, 혈액투석, 항암제 투여 등이 포함된다. 환자가 서류로 의사 표현을 하고, 의사 2인이 죽음을 앞두고 있다고 판단한 경우에 한해서 적용되는 것이다. 이러한 처치를 받기에는 늙고 약하다는 이유로 거부할 수는 없다. 병원에 가면 이러한 처치를 따라야 하고, 집에서는 어찌 할 바를 모르는 상황. ‘최선’이냐 ‘방치’냐의 갈림길에서 선택을 해야만 하는 게 우리 사회의 제도이자 의식의 현주소인지도 모르겠다. 

사람을 살리는 심폐소생술이 허약한 노인에게는 너무도 힘겹고 고통스러운 과정임을 의사들은 말한다. 재택의(왕진의사)를 선택한 일본 의사들의 이야기를 읽은 적이 있다. 재택의가 되기 전, 이들은 심폐소생술을 하면서 노인의 갈비뼈가 부러지는 소리를 듣고 고통에 찡그려진 얼굴을 보는 일을 반복했었다. 그러다가 집에서 노인들이 죽을 수 있도록 도와야겠다고 결심하고 재택의가 되었다고 한다. 지금 우리 사회에서도 시범사업으로 왕진의사제도가 시행되고 있다. 집에서도 안정적으로 치료와 돌봄을 받다가 집에서 죽어갈 수 있으려면, 우리 집 문을 두드리는 왕진의사의 존재가 절실하다.  

심폐소생술을 받은 80세 이상 노인들 중 1년 생존율은 0.8~3.7%이다. 많은 노인들의 경우 심폐소생술을 받는 중에 갈비뼈가 부러지거나 흉부 출혈이 일어나거나 간이나 비장 등 복부 장기 파열이 일어나기도 한다. 심장을 뛰게 해야 하므로 압박 강도를 낮출 수는 없는 일이다. 회복 가능성이 거의 없는 환자에게 심폐소생술을 시행해서 일시적으로 심폐기능이 돌아오더라도 그 환자는 바로 연명치료에 들어가게 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의식이 없는 상태에서 인공호흡기에 의지하는 중환자실에서의 삶을 이어가게 되는 것이다. 

임종과정에서 심폐소생술을 하지 않았을 경우 의료진이 환자를 소생시키기 위해 최선을 다하지 않았다고 법적 분쟁에 휘말릴 수 있다, 따라서 의료진들은 무의미하더라도 자기방어를 위해서 심폐소생술을 하게 되는 경우가 많다. 또한 사람을 살리는 것이 의료의 역할이고, 죽음은 의료의 실패라고 여기는 게 현재 의료계의 일반적인 인식이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는 환자의 상태가 어떠하든 가능한 의료기술을 총동원하는 것이 의료인의 당연한 역할로 여기는 경우가 많다. 

자궁암 진단을 받고 수술일정을 제시하는 의사에게 어떤 치료도 받지 않겠다고 선언한 미스 노마, 그녀는 그 이후 아들 부부와 함께 캠핑카를 타고 미국 여행을 떠났고, 1년이 조금 넘게 여행을 하다가 캠핑카에서 호스피스와 아들 부부의 돌봄을 받으며 생을 마쳤다. 

가능한 모든 치료를 다 받는 것만이 ‘최선’이 아니다. 삶은 최선과 방치의 이분법으로 나뉘어지지도 않고, 주어진 객관식의 문제를 푸는 일도 아니다. 각자의 주관식 문제에 각자의 답을 써가는 일에 가까울 것 같다. 삶의 어떤 지점에서 ‘어떤’ 최선을 다할 것인가를 생각해야만, 우리는 조금 더 행복해지지 않을까? 수술을 거부하는 미스 노마를 보며 의사는 너무 당황스러워했다. 그러나 그들의 계획을 듣고는 밝은 얼굴로 흔쾌히 축복해주었다. 의사의 머릿속에는 없던 선택지였던 것이다. 의사들이 제시하는 것은 그들이 할 수 있는 최선이지만, 그것이 항상 내 삶의 최선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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