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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석 Jul 24. 2020

버트런드 러셀의 서양철학사, 헬레니즘의 4 학파

키니코스학파, 회의주의 학파, 에피쿠로스 학파, 스토아학파+플로티노스

아리스토텔레스 이후에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등장하면서 헬레니즘 시기가 와요. 헬레니즘 시기는 이름은 뭔가 낭만적이고, 또 헬레니즘 문화가 동서양의 융화 이런 말도 있어서 좋아 보이지만 실상은 동서양의 끝없는 전쟁을 하며 문화가 뒤섞여 기존 가치가 뒤엎어지고 언제 죽을지 모르는 혼란기였다고 해요. 안정된 시기엔 더 발전하려는 철학이 등장하지만 혼란스러운 시기에는 무리하게 발전하기보단 불안을 해소하고 안정을 주는 철학이 등장하죠. 그래서 헬레니즘 시기에 유행했던 철학을 보면 전부 금욕주의나 허무주의가 하나씩 껴 있는 걸 볼 수 있어요. 헬레니즘 시기에 유행했던 네 가지 철학 학파가 있어요. 각각 키니코스학파 회의주의 학파 에피쿠로스 학파 스토아학파 에요.     



키니코스학파는 우리말로 하면 견유학파예요. 견이 개 견자 써서 개 같은 학파라는 건데, 키니코스학파는  디오게네스가 만든 학파에요. 디오게네스는 은행 업자의 아들이었어요, 근데 아버지가 위조 지패를 만들다가 추방을 당하게 됩니다. 그러다가 어떻게 흘러 들어왔는지 아테네의 안티게네스라는 사람을 찾아와요. 안티게네스는 소크라테스의 제자였어요. 그는 소크라테스의 오르페우스적 요소, 쾌락을 등지고 덕을 따라야 한다는 요소를 중심으로 배웠는지 문명과 쾌락을 등지고, 덕이 있는 자연으로 회기 해서 덕 있는 자연스러운 삶을 살아야 한다고 주장했었다고 해요. 그런데 그런 사람 앞에서 디오게네스가 등장합니다. 거지꼴을 하고서 하는 말이 대뜸 자기를 가르치라고 해요. 안테게네스가 아 이건 또 누구야, 붙잡고 가르치는 사람은 봤는데 가르쳐달라고 한 사람은 처음 봤는지 며칠 이레 도망 다녀요. 그러다가 결국 디오게네스의 고집이 안티게네스를 꺾고 디오게네스가 가르침을 받게 됐다고 합니다.



그 후 디오게네스는 집도 없어서 통에서 자고, 옷도 누더기로 걸치고, 밥도 거리에 풀 뜯어먹거나 동냥해서 얻어먹고, 허구한 날 미친 짓을 하면서 어그로를 끌어요, 근데 그 미친 짓이 그냥 미친 짓이 아니었어요. 디오게네스가 길거리에 한낮인데 등불을 들고 다니길래 누가 디오게네스 한데 왜 그러냐고 물었더니, 나는 지금 정직한 사람을 찾고 있는데 하도 보이질 않아서 등불을 들고 찾고 있소 이 러더라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게 디오게네스 나름의 행위예술인 거죠. 진정 이 사회에  정직한 사람이 없구나 하는, 이런 식으로 소크라테스는 질문으로 자기 메시지를 보넸지만 디오게네스는 자신의 행동을 통해 자기 생각을 전했던 거예요. 요전에 알렉산더 대왕이 찾아왔는데 아 햇빛 가리니까 꺼져요 했던 걸 보면 일생에 걸쳐 가지고 있는 뜻이 있다는 걸 알 수가 있죠.



디오게네스의 행동의 의미는, 물질이나 욕망이나, 쾌락이나, 문명적인 것들은 덕과 하등 상관없다는 데 있어요. 덕은 자연스럽게 사는 것 속에 있는데 이 덕을 찾아가는 것에 비하면 우리 문명의 모든 것들, 돈, 집, 옷, 명예 이런 것들은 하등 쓸모도 가치도 없다는 거예요. 꽤나 급진적인 주장인데 이게 기원전 3세기에 유행을 해요. 대체 어떤 상황에 이런 사상이 유행을 하는가 봤더니, 비싼 옷을 사면 칼 맞아서 찢어지고, 애국심을 가지면 나라가 망하고, 친구한테 정을 붙이면 긍방 죽고 가족들도 걸핏하면 흩어지는 그런 혼란스러운 시기에 이렇게 허망한 물질 가치들은 아무 의미가 없다, 이런 것에 집착하지 않고 있는 자연 그대로 살자고 했던 디오게네스 선생처럼 살자 해서 키니코스학파가 유행을 하게 됩니다.     



그다음 설명할 학파는 회의주의 학파예요. 회의주의 학파도 이처럼 지옥 같은 현생에 초탈하고자 인기를 끌은 학파예요. 학파의 색깔을 알 수 있는 주장들을 열거해 보자면, 피론이란 사람은 이 세계엔 좋을 것이든 나쁜 것이든 없고, 모든 것이 부정확하기 때문에 우리가 알 수 있는 건 없으니 현새를 즐기는 것이 할 일이야. 이렇게 말했고. 그 제자인 티몬은 학문적으로도 꿀이 달다는 말은 믿을 수 없으며 이 꿀은 단 맛이 난다, 혹은 나는 이 꿀에서 단맛을 느꼈다가 맡는 말이라고 하면서 소피스트적 상대주의가 생각나는 주장을 해요. 여기까지 보면 일반적인 상대주의인데 회의 주 의학 파는 좀 더 가서 전부 의미 없는 것으로 치부했어요, 이를 태면 회의주의 학파였던 카르아네스가 강의를 하면서 첫 강의엔 아리토텔레스 정의론을 아주 논리 정연하게 설명하면서 듣고 있던 청년들이 아 그렇구나 생각하게 만든 다음 둘째 시간에 앞에 했던 내용을 스스로 반박을 해 버려요, 그래서 첫 번째 강의가 맞는지 두 번째 강의가 맞는지 청년들을 혼란스럽게 했는데, 결국엔 어떤 지식이든 다 의미 없다는 걸 보여주려고 했던 거예요. 회의주의 학파에선 신이라는 존재도 회의했어요. 엠페리쿠스란 사람은 신을 믿을수록 신을 불경케 하는 거라고 했는데, 신이 전능하고 모든 것을 창조했다면 악이라던지 부덕이라던지도 같이 창조했다고 주장하는 거니 신이 악하다는 불경을 저지르는 것이고, 또 악을 제외한 일부 세계만 지배했다면 신의 힘을 얕보는 것이 되기 때문에 또 불경을 저지른다는 거죠. 회의주의 학파는 이미 있던 걸 반박하는 그림자 같은 학문이라서 데카르트식 회의주의같이 길게 이어지진 못합니다.     



다음은 에피쿠로스 학파인데. 에피쿠로스가 만들어서 에피쿠로스 학파였어요. 위의 두 학파가 물질문명의 회피나 부정을 했다면 에피쿠로스 학파는 개인적인 욕구를 참는 금욕을 주로 말했어요. 근데 그 욕구를 참는 이유가 그것이 나빠서가 아니라, 쾌락을 겪으면 잠시 행복하지만 금방 다시 불행해져서 온전히 행복할 수 없다는 게 이유였어요, 그러니까 알고 보면 에피쿠로스는 행복주의자인 거죠. 에피쿠로스는 쾌락이 능동적 쾌락과 수동적 쾌락, 동적인 쾌락과 정적인 쾌락 이렇게 나눠진다고 이야기했는데 이 중에서 후에 불쾌감을 불러일으키는 동적인 쾌락은 피해야 하고, 얇고 길게 은은한 행복을 이어나갈 수 있는 정적인 쾌락, 거기서 오는 지고의 행복인 아타락시아를 가까이해야 한다고 말했어요. 에피쿠로스는 행복이나 쾌락을 좇는 게 주가 아니라 불쾌와 고통을 피하는 게 주였던 거예요. 그래서 고난 역경을 겪을 수 있으니 명예를 얻거나 부자가 되거나 권력을 잡는 것은 좋지 못하고, 또 서로 상처를 주게 되니 사랑을 하는 것도 좋지 못하다고 해요, 다만 은은하게 길게 가는 우정은 좋다고 평가를 합니다.      



마지막으로 스토아 철학인데, 스토아 철학은그리스부터 로마시대까지 꽤 긴 시간 동안 주요 교양 학문으로 자리를 지켰어요. 그래서 스토아 철학 인물들을 보면 세네카라던지 마르쿠스 아렐리우스 황제라던지 로마인들이 많이 보입니다. 최초 스토아학파의 모습은 헤라클레이토스식 수양론에 키니코스학파적인 자연 덕 세계관을 융합해놓은 모양새를 보여요. 그런데 후대로 가면 갈수록 플라톤 철학이랑 융합되면서 영혼 윤회와 전체적인 덕의 요소가 추가되면서 변화를 했죠. 그래서 보면 스토아학파는 말하는 사람마다 나름 좋은 말이고 맞는 말이긴 한데 어딘가 하나씩 다른 내용이 쓰여 있어요. 



스토아학파는 우리는 육체에 닫힌 영혼이고, 욕구를 가진 죄인이라고 했어요. 신이 우릴 자유 때 하기 위해 신성을 나눠 주셨고 그 신성인 자유 의지를 통해 육구를 멀리 하고 덕을 좇아가야 하죠. 왜냐하면 선할 때야 진정 행복하고, 악한 때는 진정 불행하기 때문립니다. 신이 주신 자연 안에서 우리 인류는 하나의 공동체이며 자연적으로 누구나 덕을 좇을 수 있어요. 그렇기 때문에 스토아 철학에선 빈부귀천 상관없이 덕을 가질 수 있다고 해요. 또 이런 ‘이질적으로 평등한’ 스토아 철학 식 인간 규칙을 ‘자연법’이라 하여 일반적으로 사람이 만든 그때 보통의 법인 만민법과 구별을 해 놓습니다.



스토아 철학식 자기 수양론에도 모순이 하나 있습니다. 스토아 철학에 따르면 신은 내가 욕구에 빠지질 않길 원하고, 또 덕을 이루길 바라는데 동시에 나는 자유의지를 가졌죠. 근데 나는 자유의지에 따라 자석이 철에 붙듯 욕구하게 만드는데, 그럼 자연적으로 생긴 의지는 나를 욕구하게 만드는 것 아닌가? 그리고 그렇게 욕구에 잘 휘둘리는 의지가 자유의지인 게 확실한가? 그리고 이 상태를 만든 신과 자연은 내가 덕을 이루길 원하는 게 맞나?라는 조금은 쪼잔해 보이는 트집을 잡을 수 있죠, 하지만 이런 쪼잔한 트집이 르네상스 때 철학이 종교성을 버리기 전까지 ‘악의 문제’라고 해서 끊임없이 신학자들과 철학자들을 괴롭히는 역린이 되요.     



스토아학파까지 마무리되고 나면 시기상 로마제국 시기 후반으로 넘어가요. 로마인들은 철학을 만드는데 신경을 많이 안 썼기 때문에 새로운 건 크게 나오지 않아요. 물론 그리스도교가 이때 정립이 됐고 다른 철학자들이 많지만 명성에 비해, 그리고 그리스 다음 시대이다 보니 상대적으로 학문적 성취가 떨어져 보이는 것은 사실이죠. 로마에선 그리스 철학을 여러 번 우려먹는데 러셀은 그중에 플로티노스라는 철학자를 언급하고 넘어갑니다. 플로티노스는 플라톤 철학을 이어받아서 신플라톤 철학을 만듭니다. 플라톤이 말한 일자로서의 이데아, 그리고 영혼론을 이어받아서 그 사이에 누스, 정신이라는 계념을 넣어요, 그 누스, 정신은 로고스라는 논리적, 객관적 사고를 말하거든요. 플라톤의 특징은 단어와 사물의 연역적인 절대성이 있는데 그거에 로고스를 넣음으로써 좀 더 구체적으로 변화시킨 거죠. 세계의 절대성인 일자와, 인간의 영혼이 로고스적인 정신을 통해 연결이 되고 삼위일체를 이루는 거예요. 어디서 많이 나온 것 같지 않나요? 맞습니다. 그리스 토교에서 신플라톤주의를 많이 차용했습니다. 다만 플라톤의 로고스적인 요소 너무 심취한 사람들이 기호 상징에 목매는 영지주의자들이 되곤 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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