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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석 Jul 24. 2020

러셀의 서양철학사, 아리스토텔레스

플라톤 철학에 허술한 부분은 아리스토텔레스가 플라톤 철학을 이어받으면서 보완하고 발전시킵니다. 특히 이데아론에서 그랬어요.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데아가 어디 하늘이나 별세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사물마다 이데아가 있다. 즉 물질마다 이데아가 들어 있다고 하면서 그 물질에 깃든 본질에 형상인 질료인 작용인 목적인을 추가해 좀 더 현실적으로 보완을 하게 돼요. 대리석 조각상으로 비유를 하자면, 이 우주가 대리석 조각상이라고 봤을 때 원 재료인 대리석이 질료인이고, 조각상의 그 모습이 형상인이에요. 조각가가 원 대리석을 조각상으로 바꾸는 힘이 작용인이고, 그 조각가의 최종 목적, 대리석을 조각상으로 만들어야겠다는 의지가 곳 목적인이에요. 그래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세계 전체에 대한 목적인이 바로 곳 신이라고 신학적인 해석까지 덧붙여요.


  

플라톤을 이어받는 동시에 그에 대해 변화나 비판을 서슴지 않은 것이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의 특징인데요. 아리스토텔레스는 플라톤의 국가관에 대해선 아예 크게 비판을 하고 들어가요. 플라톤식 국가관에 대해 너무 국가를 개체적으로 보았다. 즉 꽉 막혔다고요. 국가는 유동적으로 변하는 유기체이기 때문에 플라톤식으로 국가를 바라보아선 안된다. 즉 언제든 실패할 가능성을 열어봐야 한다고 해요. 그리고서 좋은 정치 체계와 나쁜 정치 체계를 나눠요. 좋은 건 군주정, 귀족정, 입헌 정 나쁜 건 참주정, 과두정, 민주정 이렇게요. 근데 이 차이가 뭐냐면 군주정은 하나의 군주가 나라를 잘 운영하는 것이고, 참주정은 하나의 군주나 나라를 나쁘게 운영하는 거예요. 귀족정도 똑같이 소수의 사람들이 법을 만들고 운영하면서 선순환을 하는 것이고 과두정은 악순환을 하는 것이고, 입헌 정은 다수의 대표들이 선순환을 하는 것, 민주정은 악순환을 하는 거죠. 그러니 이렇게 동전의 양면처럼 같은 체계에서 좋고 나쁨이 있는데, 근대 현실은 대부분 나쁘게 흘러가니까, 그나마 민주정이 낳다 이렇게 얘기를 하죠. 이런 태도도 나름 플라톤에서 발전한 것이, 철학과 정치학을 선을 그어서 윤리학은 윤리학대로 나눈 게예요, 존재론은 존재론대로 정치학은 정치학대로 나눈 거죠.     



이렇게 나눠놓은 것 중에 가장 유명한 게 아리스토텔레스 윤리학이에요. 아리스토텔레스 윤리의 특징은 중용이에요 아리스토텔레스는 플라톤식 덕을 비판하면서 그렇게 좋은 덕, 우리가 아는 윤리의 좋은 것들, 덕들은 한쪽으로 치우친 덕이라고 말해요. 그리고 그 극단에 대해서 한 좋다는 극단엔 다른 나쁜 극단이 있는데 어디로든 극단에 치우친 건 좋지 않다고 하죠. 그래서 그 극단에 치우치지 않은 중용을 지켜야 한다 고 한 거죠. 그 극단이 흔히들 말하는 평등은 아니에요. 아리스토텔레스의 중용은 감정적으로 봤을 땐 괭장히 인위적이고 정량적이어서 동등함을 이야기하는 것 같지만 그렇지 않아요. 돈이 많은 사람은 돈을 나눠주는 중용이 아니라, 돈이 많은 사람답게 행동하고,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은 그 지위에 맞게 행동하는 상황과 처지에 걸맞은 적절한 중용이 아리스토텔레스의 중용이에요.     



여기서 아리스토텔레스가 보충설명에 들어가요. 주인의 덕과 노예의 덕, 지도자와 시민이 가져야 할 덕은 다르다고 설명합니다. 즉 자긍심이나 만족감, 부 유람, 풍요로움 같은 덕은 부자 귀족 지도자들만이 누려야 할 덕이고, 시민들이 그런 소수의 덕을 가지려 하는 것은 성질적으로 알맞지 못하다는 거죠. 돈 많은 사람이 돈을 나눠주면 안 되는 것은 그것도 어떤 덕의 극단적인 행위이고 지도자가 지도자 답지 않은 것도 역시 덕이 치우친 것이니까 안 되는 거죠. 여기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인간관이 드러나는데 노예는 날 때부터 노예이고, 주인은 날 때부터 주인인데 그 예시로 든 것이 페르시아인들과 그리스인들이었어요. 페르시아인들은 기질 상 노예의 기질이고 그리스인들은 기질 상 주인의 기질이니 그리스인들이 페르시아인들을 점령하는 게 올다고요.     



이런 인간의 기질을 이야기하면서 각각의 적절한 쓰임을 이야기해요. 인간의 기질에 따른 적절한 쓰임이 있다. 그래서 그 쓰임이 이뤄지는 국가가 개인보다 중요하다고요. 물질에도 각기 적절한 쓰임이 있는데, 그게 잘 드러나는 예시가 바로 돈이에요. 돈을 잘 생산해서 정직하게 벌고 쓰는 것은 적절한 쓰임이지만 고리대금같이 노동하지 않고 버는 돈은 부적절하다고 해요. 이렇게 물질마다 나름 적절한 쓰임이 있다. 즉 그 물체의 이데아에 따른 적절한 목적인이 있다는 것이죠.



여기서 러셀은 아리스토텔레스 윤리학의 총정리를 하면서, 진실성이나 건강함처럼 아리스토텔레스의 중용으로 나눌 수 없는 덕의 성질이 있다고 반박합니다. 하지만 높이 평가될 점은 일단 자기모순이 없고, 또 자신의 형이상학과 모순이 없다는 거라고 해요. 하지만 우리 시대에서 보자면 불평등 관계를 그대로 수용한다는 점이 좀 걸리고, 또 윤리학이라고 했는데 윤리라고 보기엔 자비나 박애 같은 요소가 전혀 없다는 점이 또 좀 걸립니다. 그런 바, 러셀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중용을 세상의 모습을 제대로 보지 못하는 귀족의 도덕이라고 비판합니다. 그리고 이런 그리스식 귀족 문화가 현대에 들어 민주정의 발달과 산업화, 대중 교육을 통해 막을 내렸다는 선언 하죠.     



아리스토텔레스의 윤리학 다음으로 유명한 것은 논리학이에요.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학은 3단 논법으로 정리되는데, 3단 논법으로 불릴 수 있는 각각의 문장들을 나눠 설명했어요. 그리고 3단 논법으로 모든 논리를 설명할 수 있다는 식으로 이어지죠. 러셀이 논리 철학자이니 만큼 여기선 꽤 단호하게 서술하는데요. 삼단논법이 논리철학의 시작인 건 맞지만 세 가지 비판을 면할 수 없다고 합니다.



첫째는 삼단논법이 그 자체로 완벽하지 않다는 점입니다. 그 예시로 모든 황금산은 산이고, 모든 황금산은 산으로 이뤄졌으니 모든 산은 황금산이다.라는 문장을 보여줘요. 여기서 논리적으론 아무 문제없지만 실질적으론 거짓 문장인데, 그 이유가 바로 삼단 논법 앞에 오는 명제들, 모든 황금산은 산으로 이뤄졌다, 소크라테스는 죽는다, 모든 그리스인은 인간이다 이러한 명제를 봤을 때 그게 참인지 거짓인지 삼단논법만으론 알 수 없다는 거죠. 황금산이 잇는지, 소크라테스가 진짜 죽는지, 그리스인이란 인종이 진짜 있는지 알 수 없습니다. 두 번째 비판은 삼단논법 자체가 연역법의 한 종류일 뿐이라는 점이에요. 수학적 계산 방식이 전부 연역식이고 다른 논리학에서도 삼단논법에 해당하지 않는 논리가 많이 있다고 합니다. 세 번째 비판은 삼단논법을 비롯한 연역법 비판인데, 연역법 만으로 돌아가는 논리는 오로지 언어적 기호, 즉 수학밖에 없고, 위에 황금산 논증에서 나왔듯이 어떤 논증의 최초 전재가 나오려면 결국 변증법이 필요해요. 연역법은 귀납법이 없으면 허깨비라는 겁니다.



러셀은 비판 마무리에 이런 실수가 나온 이유는 아리스토텔레스가 모든 물질에 이데아론 같은 본질적 실체가 있다고 생각해서 라고 합니다. 러셀은 실체의 본질이 낱말에는 있을지 몰라도, 사물은 계속해서 이어지는 동일성이 없기 때문에 사물엔 본질이 있을 수 없다고 하죠. 정보의 수집에는 사물에 본질을 두는 것이 편하지만 그것이 결국엔 형이상학, 논리학적인 오류를 만들었다고 하면서 근대 전반의 과학, 논리학, 철학은 이 아리스토텔레스의 오류에 맡서는 과정을 저쳐가며 진보했다고 평가합니다.



그 예시로 든 것 중 하나가 천체론인데요. 아리스토텔레스는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지구를 중심으로 행성은 원운동, 타원 운동이 아니라 완벽한 원운동을 하고요, 행성들은 어떤 물질이 아니라, 우리가 아는 4 원소가 아닌 제5 원소로 되어 있다고 정리했죠. 그리고 모든 운동은 직선운동이라고도 말했는데, 포물선 운동은 없고 모든 것은 날아가다 직선으로 떨어진다고 말했어요. 이 때문에 갈릴레오까지 이런 오류가 지속됐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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