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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석 Jul 24. 2020

버트런드 러셀의 서양철학사, 플라톤

플라톤 이야기로 넘어갑니다. 소크라테스는 항상 말로만 설명을 했기 때문에 글로 뭔가를 남기지 않았어요. 글로 쓰면 지식이 왜곡되고 영혼을 일깨우지 못한다는 이유로 글 남기는 걸 싫어했는데요. 근데 소크라테스의 제자 중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승님을 뒤 쫓아다니면서 그 언행을 기록했던 사람이 있는데 그 제자가 바로 플라톤이에요. 플라톤이 소크라테스의 제자가 될 때 일화가 하나 있어요. 플라톤이 원래 비극을 썼던 비극 작가인데, 소크라테스는 그 비극이라는 문학 작품 자체를 싫어해서 '내 제자가 되려면 그 비극을 다 태우고 와라' 고 해서 플라톤이 자신이 썼던 비극을 다 태우고, 소크라테스의 제자가 되어 극작품 대신 소크라테스의 언구를 저술하게 되었다는 이야기 기에요.



우리가 아는 소크라테스에 대한 이야기는 대부분 플라톤의 기록을 통해 알려져 있어요. 그러면 이런 생각을 할 수 있어요. 우리가 아는 소크라테스가 진짜 소크라테스의 모습일까? 왜냐면 플라톤도 괭장히 똑똑한 사람이고 자기 주관이 있던 사람인데 그런 사람이 자기 사상을 이야기하기 위해서 자신의 생각을 소크라테스로 투영해서 가상의 소크라테스를 창작해 이야기를 만들어넨것 아닌가? 아예 더 나아가서 소크라테스는 플라톤의 창작자 아닐까 하는 수준으로 의심을 품을 수 있을 수 있다는 거죠. 이 질문의 요지는 소크라테스와 플라톤 각각의 철학을 무 썰듯이 정확히 나눌 수 없다는 거예요. 소크라테스는 말로서 철학을 전했고 그것을 글로 쓴 것은 플라톤인데 그 안에서 플라톤은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자신의 색깔을 같이 넣었을 수 있다는 거죠. 


    

플라톤의 철학은 꽤나 방대하고 해석도 많아요. 가장 먼저 짚어볼 것은 이데아 사상이에요. 이데아 사상이 무엇이냐 하면, 우리가 그동안 많이 말해왔던 세계의 본질은 무엇이냐는 질문에 대한 플라톤의 대답이에요. 플라톤은 이 세계의 본질은 이 물질세계에 있는 것이 아닌 이 세계의 본질이 모여 있는 이데아가 아 이 세계의 본질이고 근원이다. 이렇게 이야기를 해요. 이데아는 우리 세계의 본질, 계념들을 칭한다. 근데 그건 눈에 보이지 않고으니 말로만 듣고선 상상하기도 쉽지 않은데 플라톤은 이 이데아를 납득시키기 위해서 비유를 하나 듭니다. 그것이 바로 동굴의 비유예요.



한 동굴에 사람들이 묶여 있는데 입구를 등지고 묶여 있느라 동굴 바깥을 보지 못하고, 거기서 나오는 빛에 만들어진 그림자만 계속 보아 왔어요. 그래서 그 그림자가 이 세계의 모든 것인 줄 알고 있다가 그런 중에 어떤 모험심 강한 사람이 어쩌다가 밧줄을 풀고 동굴 밖으로 나섭니다. 그리고 우리가 알던 그 그림자의 진정한 모습, 빛의 진정한 모습을 봅니다. 태양빛과 그 빛이 비치는 아름다운 자연의 모습을 보고 와요. 그걸 보고 다시 동굴로 돌아와서 이 그림자는 세계가 아니고, 저 뒤에 태양이라는 것이 있다 이렇게 설명을 하자 묶여 있던 사람이 아니다. 어떨게 그럴 수가 있냐, 그런 허황된 것은 있을 수가 없다면서 사람들이 믿지 못했다는 거죠. 그러니 이 비유를 빗대 보자면 동굴에 나간 모험가는 소크라테스나 플라톤처럼 이데아를 말한 사람이고 묶여있던 사람들은 그 이데아론을 믿지 못했던 사람이죠. 그러니 자기 논리의 비현실적인 면, 즉 형이상향적인 면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더 넓은 시야를 가져야 한다는 거예요.



플라톤은 이 이데아를 도덕, 정치적으로 연장합니다. 이데아는 절대적인 계념, 본질들을 말하는데 선, 도덕, 미 이런 것에도 대응하는 이데아, 절대적 본질 있다는 말이죠. 그래서 그 선의 이데아를 우리가 좇아야, 따라야 해요. 근데 그럼 그 절대적 선, 선의 이데아는 무엇이냐? 동굴을 나갔던 모험가. 그 이데아를 아는 사람이 알 수 있겠죠? 그 사람은 플라톤이죠? 그래서 플라톤이 말하는 선의 이데아는 플라톤이 말한 선이라고 논리가 순환이 됩니다.     



사실 러셀이 플라톤에 대해 서술 자체를 부정적으로 해요. 내용이 방대한 만큼 그에 대한 반박이나 모순점도 많이 발견을 하고요. 매 처음 해서 말했듯이 플라톤처럼, 한 이론으로 모든 것을 규합하고 통치하려는 철학의 시도를 전체주의적 오류라고 판단하고 굉장히 부정적으로 바라봅니다. 그래서 앞으로도 그런 식으로 하나의 이론으로 개인의 신념에서 국가의 통치까지 다 정의하려는 철학들에도 비판적인 자세를 취해요. 그런데 플라톤은 절대적인 철학으로 이 세계의 모든 관, 국가관 인간관 과학 세계관등을 전부 정의했던 첫 번째 사람이니 만큼 부정적으로 바라볼 수밖에 없죠. 그래서 러셀은 이데아나 계념의 절대성에 대해 허상이라고 일축합니다. 우리가 개별자라고 생각하는 현상은 보편자가 필요한 허상이 아니라 어떤 실체의 일부이다. 그것이 가진 다양한 모습, 즉 다수성 역시도 실체의 한 부분이기 때문에 플라톤이 말한 절대성이야말로 진짜 환상이라고 정리를 합니다.     



이런 이데아의 허상적 모습을 드러내는 일화가 하나 나오는데요. 바로 소크라테스와 파니메데스가 했던 개별자와 보편자 논쟁이에요. 이 개별자와 보편자라는 속성은 이 이데아라는 계념 혹은 유사한 계념들에 있어서 거의 쥐약 같은 오점이에요, 그래서 이런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을 차용한 중세 신앙에서도 똑같은 논쟁이 되풀이됩니다. 자, 이데아는 어떤 대상의 개념이죠. 이 세계엔 많은 고양이가 있지만 고양이라는 그 본질, 고양이 이데아는 단 하나밖에 없는 거예요. 그렇다면 현실세계에서 보는 이 고양이 계별자와, 보편(이데아) 고양이의 관계응 어떻게 될까? 개별 고양이는 커다란 보편 고양이 개념의 의 일부인가? 아니면, 보편 고양이가 곳 개별 고양이와 1대 1로 대응이 되는 건가? 개별 고양이가 보편 고양이의 일부라면, 고양이라는 것 자체가 포유류, 동물의 일부인데 그럼 고양이 보편자는 동시에 포유류 보편자에 대응하는 개별자가 되는 것 아닌가? 또 보편 고양이와 개별 고양이가 1대 1로 대응이 된다면 고양이 꼬리 이대아도 있지 않을까? 고양이 털 이데아도 있지 않나? 그럼 색깔, 모습 등등 속성에 대해 무한히 많은 보편자가 생기게 되죠. 무한 소급이 일어나고 이데아 논리는 가능하지 않게 되요.



자. 파니메데스가 소크라테스와 논쟁을 하며, 이런 반박을 한 후에 질문을 하나 던져요. 진흙이나 머리카락에 이데아가 있느냐,라고요. 즉 그걸 물어본 거죠. 티끌 같은 개별자에 보편자가 있다면 무한 소급이 일어나고, 만약 보편자가 없다면 그건 이데아는 세계를 온전히 담은 절대적 개념일 수 없다. 즉 함정을 친 거죠. 거기에 소크라테스는 선을 긋습니다. 진흙이나 털에는 이데아가 없다도요. 그 말은 무엇이냐, 이데아는 고귀한 계념이기에 저열한 것에는 이데아가 없다는 거예요. 사실 그렇게 가면 비논리적인 부분으로 가기에 파니메데스는 ‘소크라테스, 그대가 아직 어려서 그래’라고 넘어갑니다. 이 논증에서 우리는 플라톤의 이데아에 대해 불합리한 부분을 쉽게 발견할 수 있죠. 그런 면은 나중에 아리스토텔레스로 넘어가면서 많이 보완이 됩니다. 이데아 설은 이렇게 넘어가고요.     



플라톤이 이야기했던 것 중 또 하나가 영혼 불멸설이에요, 영혼 불멸설 어디서 많이 들어봤죠? 오르페우스교와 피타고라스, 그분들이 말했던 것을 가져와서 영혼 윤회에 대해 말해요. 여기에 같이 나오는 게 상기설이에요. 우리는 사실 전생의 기억들을 가지고 있는데 태어나는 순간 그것을 떠올리지 못해서 알지 못하는 것이지, 잘 깨우치기만 한다면, 이미 알고 있는 정보를 잘 추적해 나가다 보면 지식을 다시 일깨울 수 있다는 것이죠. 사람의 정보를 일깨우는 교육이란 뭐죠? 바로 질문으로 스스로 깨닫게 하는 산파식 교육이죠. 산파식 교육, 상기설, 영혼불멸설이 이렇게 이어지는 게예요. 이걸 증명하기 위해 플라톤은 한 노예 꼬마를 대려다가 삼각형에 대한 기하학적 원리를 문답을 하며 가르쳐 보였다고 해요.



이건 또 어디로 이어지냐면 소크라테스의 3단 논법, 즉 연역 추리에 대한 절대적인 신뢰로 이어져요. 소피스트들은 절대적 상대성을 중시했기에 연역 추리가 아닌 변증법으로 지식을 대했는데 플라톤은 그에 반대로 이데아가 아닌 물질을 티끌 취급했기 때문에 변증법이 아닌 논리, 연역법으로만 지식을 일깨울 수이다고 주장을 한 거예요. 영혼불멸설을 조금 더 이야기하자면 플라톤도 오르페우스교와 비슷하게 쾌락을 버리고 선을 좇으며 물질세계에서 벗어나 영혼을 승천시켜야 한다고 했어요. 여기에 조금 더해서, 피타고라스는 수학자들이 가장 고귀하다고 했잖아요? 플라톤은 철학자, 이데아를 아는 철인들이 가장 고귀하다고 말해요. 그래서 철학자들이 천국에 갈 수 있다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소피스트들과 관련돼서 이야기가 나와요. 플라톤이 직접 프로타고라스를 비판한 적 있거든요. 인간은 만물의 척도다 라는 말을 비판했죠. 그 척도라는 건 지식의 척도라는 말인데 지식은 무엇인가? 우리가 아는 그 육체적인 지각이 곳 지식인지, 머리로 아는 논리적인 생각이 지식이냐가 이 말의 화두예요. 프로타고라스는 감각을 긍정해서 너에게도 감각이 있고 나에게도 감각이 있으니 그 각각의 지식의 척도가 있는 것이고 즉 지식은 상대적이라 말한 거예요. 이에 플라톤은 개코원숭이도 감각이 있는데 개코원숭이도 척도인가. 감각은 전부 바뀌는데 우리가 자각하는 것과 자각하지 못하는 것에 차이점이 어디 있느냐, 절대 지식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은 우리가 머리로 아는 그 지식, 우리가 공유할 수 있는 객관적, 연역적인 지식만이 지식이다.라고 반박을 합니다. 여기에 러셀이 또 반박을 합니다. 플라톤이 말했던 그 절대적인 지식, 객관적 지식은 수학적 기호에만 해당하는 것이라고요. 우리가 뭔가를 안다 모른다 명확하게 규정할 수 없는 중간 부분이 있기 마련인데 그런 빈 공간을 무시해버려서 지식의 부분을 매우 좁개 설정했다.라고 말이죠.              


 

자 이제 드디어 플라톤의 국가론에까지 넘어왔어요. 전에 스파르타 이야기를 하면서 스파르타가 플라톤의 국가에 큰 영향을 끼쳤다고 이야기를 했었죠. 다시 정리를 하자면 플라톤의 국가는 생산자, 수호자, 지도자 이렇게 3층으로 나눠서 각각에 맞는 교육, 각각에 맞는 노동, 각각에 맞는 삶을 살게 함으로써 국가를 굴러가게 하는 거예요. 그래서 각각 계층마다 받는 교육이나 식사나 의류나 집이나 그런 것도 국가에서 공공적으로 통재를 하는 공산적인 사회상이었어요. 문화적으로도 나쁜 영향을 주는 비극이나 연극을 금지 검열해야 했고, 사회의 지도자는 플라톤의 이데아를 아는 재능이 있는 사람을 대려다가 특별 교육을 받게 했어요. 그렇게 그 국가의 최종 목표는 무엇이냐, 결속력이 강하고 외부 침략에 강한 국가가 만들어지는 거예요. 플라톤의 국가관은 도덕 교과서에도 나오고 이름빨이 큰데 비해 책의 묘사는 그저 하나의 통재 국가의 모습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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