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고객 제공가치 혁신 (1)

by 성세윤

‘고객 제공가치 혁신’


세계 3대 경영 컨설팅 업체로 꼽히는 맥킨지가 대한통신을 위해 도출한 비전 문구였다. 대한통신은 위기에 처해 있었다. 주력사업이던 유선전화 시장은 휴대전화와 인터넷 전화에 잠식돼 매출이 급감했고, 성장시장이던 인터넷과 휴대전화 시장에선 아직 두각을 나타내지 못했다. 경영진은 변화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꼈고, 맥킨지를 고용해 새로운 비전도 만들었다.


헌데 문구 자체는 크게 와닿지 않았다. 7명의 컨설턴트, 3개월 간의 작업기간, 10억이란 예산의 프로젝트 결과치곤 엉성드뭇했다. 무언가 깊은 뜻을 함축한 문구가 나올 거라 기대했는데 결국 고객에게 좀 더 나은 서비스를 제공하겠다는 미사여구에 불과했다.


컨설팅이란 게 고작 이런 거였어? 내 생애 첫 컨설팅 프로젝트는 그렇게 실망감과 함께 시작했다.



일주일 전, 나는 어센트 인사과에서 연락을 받았다. 면접은 바로 이틀 뒤로 잡혔다. 일찌감치 빌딩 로비에 도착한 나는 화장실 거울 앞에 섰다. 하루 전 세탁소에서 찾아온 진회색 양복 옷깃을 여미고 칼주름 잡힌 와이셔츠 소매를 만지작 거렸다. 아침부터 30분 넘게 고쳐 맸던 넥타이도 다시 묶었다. 면접까진 여전히 15분 남아있었다.


생애 첫 면접이었지만 이게 마지막 기회일 수도 있었다. 하필 첫 인터뷰가 까다롭기로 소문난 컨설팅 회사였다. 악명 높은 케이스 인터뷰 생각에 벌써 머리가 지끈거렸다.


‘사거리 스타벅스에서 커피가 하루 몇 잔 팔리는지 아냐? 이 도서관에 책이 몇 권이나 있을 것 같냐?’ 치수는 대학 때 내게 그런 질문을 던지며 귀찮게 했었다. 선배들에게도 모의 인터뷰를 하자며 수시로 들러붙었다.

나도 치수를 불러내 연습하고 싶었지만 자존심이 허락지 않았다. 그나마 치수가 까맣게 밑줄을 그으며 보던 <케이스 인 포인트>라는 책 제목이라도 떠올라 다행이었다.


면접관으로 들어온 정주성 상무는 어센트 한국 사무소 IT 담당 임원이었다. 30대 후반쯤으로 보이는 정 상무는 내가 상상하던 컨설턴트 모습 그대로였다. 포마드펌으로 말끔히 정돈된 가르마에 얄쌍한 금빛 안경테는 프로페셔널해 보였고, 잘 관리된 몸에 핏을 정확히 맞춘 슈트는 보기만 해도 숨이 막힐 것 같았다. 그러면서도 말투와 몸짓 하나하나에 활력이 느껴지는 게 정주영과 이병철을 합쳐 놓은 듯한 인상이었다.


내 이력서를 훑어본 그는 얼굴에 온기를 뿜더니, 마치 연기를 하듯 낙낙한 말투로 오기 힘들지 않았냐며 인터뷰를 시작했다.


분위기는 좋았다. 그는 당시 화두였던 아이폰 같은 제품과 최신 트렌드에 대해 물었다. 때로는 내 답에 호탕히 웃어 주기도 하고, 때로는 내 말을 정리해주기도 하면서 질문을 이어갔다. 내가 마음에 들었는지 걱정했던 케이스 문제도 내지 않았다. 삼십 분 정도 지났을 무렵 그는 이 정도면 충분하다는 듯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다 입을 열었다.


“일은 언제부터 시작할 수 있죠?”


인터뷰가 잘 진행된다 생각은 했지만 예상치 못한 질문이었다. 지나치게 확대 해석하지 않으려 마음을 진정시켰다. 하지만 마음 한 구석에선 ‘이렇게 쉽게 입사되는 건가? 그것도 컨설팅 회사에?’ 하는 아찔한 설렘이 솟았다. 입사까지 최소 서너 번은 인터뷰를 볼 줄 알았는데 정상무는 정말 내가 마음에 든 것 같았다.


“네. 바로 입사 가능합니다.”


난 흥분을 겨우 억누르며 말했다. 순간 정 상무가 한쪽 눈꼬리를 치올렸다. 그를 처음 봤을 때 감지했던 검센 기운이 다시 느껴졌다. 정 상무는 손가락으로 책상을 태핑 하기 시작했다. 나도 모르게 시선이 그의 손가락을 향하려 하는데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


“입사요?... 지금 입사 프로세스 진행하고 계신 곳이 있나요?”


당연히 없었다. 이번이 첫 인터뷰였고, 마지막 불합격 통지를 끝으로 지원서를 넣은 곳도 없었다. 그래도 정신을 가다듬고 과장을 보태 말했다.


“네. 몇 군데 있습니다. 하지만 어센트에서 오퍼 받으면 중단하고 바로 올 수 있습니다.”


여기 아니면 갈 곳이 없으니 그냥 빨리 좀 정해 달라고 목구멍까지 나오던 말은 애써 집어삼켰다.


“그러시군요. 혹시 윤치수 대리가 이곳 상황은 얘기했나요?”


치수에게 따로 들은 말은 없었다. 정 상무의 조심스러운 말투와 굳어버린 표정을 읽은 순간 입사에 대한 몽상도 파도 앞 모래성처럼 위태롭게만 느껴졌다. 정 상무는 나를 보며 말을 이었다.


“당장 입사 TO가 있는 건 아니에요. 공채가 있긴 한데 그건 신입사원들 대상이라 내년 3월에나 진행될 거고요. 그렇다고 세윤 씨가 경력이 있는 건 아니라 경력직 특채로 바로 진행하기도 어려워요.”


나는 애써 미소를 유지하려 했다. 그가 하는 말에 귀를 기울였지만 마음은 이미 롤러코스터를 타고 급락하고 있었다.


“세윤 씨 채용을 진행한다면 조금 다르게 해야 할 거예요. 일단 제가 맡고 있는 프로젝트에 인턴으로 일을 하시면서 경력직 특채로 2차 인터뷰와 3차 인터뷰를 진행하면 어떨까요?


아직 경력이 없으시니까 인턴으로 일을 하시면 그걸 경력 삼아 2차와 3차 인터뷰를 진행하는 거죠. 뭐, 중간에 다른 곳에서 오퍼가 와서 가야 한다면 할 수 없고요.”



귀갓길 발걸음은 천근만근 무거웠다. 정 상무는 애써 좋게 포장하려 했지만 그날 인터뷰는 정직원이 아니라 인턴 인터뷰였다.


그제야 인터뷰가 왜 그리 쉽게 진행됐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까다롭기 소문난 케이스 인터뷰가 없던 것도 어찌 보면 당연했다. 일정표 확인하고 회의실 잡는 따위 허드렛일이나 하는 개인 비서를 채용하는 자리이기 때문이었다. 3학년이나 4학년 학부생들이 이력서에 한 줄 써넣기 위해 지원하는, 내가 경멸해 마지않았던 그런 자리 말이다.


아무리 절망적이라고 읍소하긴 했지만 치수는 어쩌자고 그런 자리에 날 추천한 걸까? 친구들이 대리, 과장 승진을 할 때 난 겨우 인턴 이력 한 줄을 얻게 될 판이었다. 친구들 뒤꽁무니나 쫓자고 연구실을 박차고 나왔나?


‘들었어? 세윤이 인제 인턴 시작한대.’

‘학부 때 그렇게 잘난 척을 하더니 이제 겨우 인턴이야?’

‘야, 그것도 치수가 도와줘서 겨우 했단다.’

‘하긴 책만 보던 놈이 뭘 하겠어? 걘 케이스 인터뷰도 책 보고 공부했을 걸.’

‘깔깔깔.’


타인의 불행을 자신의 행복으로 승화시키는데 능한 몇몇 친구들의 비웃음이 귓가 가득 울렸다.


뺨에 스치는 어릿한 바람을 흘려보내며 생각했다. 그래, 그런 비웃음을 듣느니 차라리, 차라리… 하지만 다음 생각을 잇지 못했다. 연구실 문은 이미 박차고 나와버렸고 이제 이력서를 넣을 곳도 없었다. 사면초가였다.


어릴 땐 한국대만 가면 끝인 줄 알았다. 한국대가 최고라 항상 들어왔으니 당연히 그럴 거라 믿었다. 하지만 한국대는 ‘성공’의 출발점도 되지 못했다. 내 인생은 어디서부터 꼬였던 걸까? 한국대에 가겠다고 책만 파고들던 중고등학교 때부터였을 까, 아니면 대학에 가서도 공부가 다인 줄 알고 철없이 세상과 담을 쌓았을 때부터였을 까? 왜 그 누구도 내게 한국대 다음 생은 얘기 주지 않았을 까?


울분과 후회가 머리끝까지 뇌동할 때쯤 고립무원에 위리안치된 나 자신이 보였다. 화석처럼 굳어 버린 제 세상에 갇혀 적개심으로 씨근대기만 하는 미물의 모습이었다. 한국대가 세상 전부라는 착각에 사로잡힌 것도, 합격 후 오만에 빠져 세상을 방관한 것도 결국 나 자신이었다.


‘제기랄, 누구 탓을 하는 거야!’


두개골을 깨부수듯 외쳤다. 움직여야 했다. 여기서 멈추면 이 알껍데기 속 세상을 영원히 벗어날 수 없었다. 그 안에 내일은 존재하지 않았다. 나는 주먹을 답삭 쥐고 성큼성큼 발걸음을 내디뎠다.


며칠 후 어센트 인사과에서 다시 전화가 왔을 때 나는 기쁨에 겨운 듯 청상한 목소리로 인턴십 제안을 받아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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