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주성 상무가 맡은 프로젝트는 맥킨지 비전 작업에 기반해 대한통신 내부 프로세스, 조직, 시스템 등을 진단하고 비전에 적합한 운영모델을 설계하는 작업이었다. 정 상무는 우선 본사로 출근해 임정혁 부장과 킥오프 워크숍을 준비하라고 말했다.
임정혁 부장은 어센트 전략 부서 소속으로 대한통신 프로젝트 멤버는 아니었지만 워크숍 준비를 위해 임시 투입됐다. 킥오프 워크숍은 프로젝트 착수 후 고객사 이해관계자들과 초기 가설을 검증하고 프로젝트 목적 및 범위를 명확히 하기 위해 진행하는 워크숍이었다. 프로젝트 팀이 완전히 세팅된게 아니라 회의실에 앉은 건 나와 임 부장 뿐이었다.
‘고객 제공 가치 혁신’이란 허울뿐인 문구를 앞에 두고, 정직원도 아닌 인턴 신분으로 소슬한 회의실에 앉아 있자니 한숨만 절로 나왔다.
“비전에 적합한 운영모델을 정의하는 게 프로젝트 목적이네요. 어떻게 하면 될까요?”
임정혁 부장은 나를 보며 물었다. 소설가가 수많은 표현을 고민한 후 한 문장을 써낸 듯 느리지만 강단진 어조였다. 난 그제야 그를 제대로 쳐다봤다. 넓은 이마와 담결한 눈에서 풍기는 귀족적 지성미는 누가봐도 엘리트스런 인상을 남겼다. 실제로도 그는 한국대 경영학과를 나와 시카고대 경영대학원을 졸업한 엘리트였다.
“고객에게 제공하는 가치를 혁신하기 적합한 운영모델을 만들면 되는거 아닌가요.”
나는 테이블 위에 놓인 비전 문서를 곁눈질 하며 답했다. 좀 더 생각을 해보고 말할 걸 그랬나 싶었지만 달리 할 말도 없었다. 임 부장은 턱을 괸체 나를 쳐다봤다.
더 얘기해보라는 건가? 못할 거 없지.
그런데 막상 말을 하려고 하니 입이 막혔다. 어디서 어떻게 시작할지 단초를 잡을 수 없었다. ‘고객 제공 가치 혁신에 적합한 운영모델’ 이 무엇인지 모르니 당연한 결과였다. 질문 자체가 모순이었다. 프로젝트의 목적이 ‘고객 제공 가치 혁신에 적합한 운영모델’을 만드는 것인데 그걸 프로젝트가 시작하기도 전에 어떻게 알겠는가?
모르는 것이니 아무런 얘기도 할 수 없는게 당연했다. 시계 초침 소리가 더 없이 크게 울렸다. 임정혁 부장의 시선은 여전히 나를 향했다.
고객 중심의 가치 혁신이 뭐지? 운영모델은 또 뭐고? 도대체 뭘 물어보는 거지?
삶이나 진리의 본질 같은 철학 질문을 접한 듯 뭐라 말할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장고 끝에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답을 모르니 답을 찾는 방법에 대해 얘기하면 될 것 같았다.
“우선 고객 중심의 가치 혁신에 적합한 운영모델을 정의하고 현재 운영모델과 비교해서 차이점이나 적용방안 같은 걸 분석하면 되지 않을 까요?”
좋은 아이디어라 생각했는 데 입 밖으로 내 놓고 보니 방금 한 말과 별반 다를 바 없이 공허한 말이었다.
‘얘는 어디서 굴러먹다 온 애야?’ 임 부장 맵찬 눈빛이 흉심을 내비쳤다. 등줄기를 따라 식은땀이 흘렀다. 뭐라도 얘기해야 했다.
“그러니까… 예전에는 대한통신이 가지고 있는 제품 중심으로 사업을 했다면… 이제 고객 중심으로 사업을 해야 되는 거죠. 불만이 접수되면 바로바로 처리하고 우수고객 프로그램 같은 이벤트도 하고요.”
나는 정신을 다잡고 나름 ‘고객 제공 가치 혁신’이라는 문구를 분석하며 얘기하기 시작했다. 대한통신이 고객에게 제공할 수 있는 ‘혁신’적 가치를 채심하면서 말이다.
얘기가 풀리는 것 같았다. 머릿속으론 빠르게 고객 서비스와 관련된 활동을 정리했다. 유선전화와 인터넷을 구분해 제품 중심으로 정리하거나 온라인과 오프라인 같은 채널 중심으로 정리하면 될 것 같았다. 일순, 임 부장이 입을 열었다.
“운영모델이란 게 여러가지를 의미할 수 있는데, 일단 프로세스, 조직 및 시스템을 언급한 걸로 봐서는 사업운영을 위해 필요한 기반 요소를 광범위하게 얘기하는 것 같네요.
운영모델이란 건 어떤 사업을 하느냐 또 비즈니스 모델을 어떻게 가져 가느냐에 따라 크게 바뀌죠. 운영모델을 바꾼다는 건 궁극적으로 신사업이나 새로운 비즈니스 모델을 염두에 두고 있다고 볼 수 있어요. ‘고객 제공 가치 혁신’이란 비전은 신사업이나 비즈니스모델의 핵심전략이 되는 거고요.
먼저 사업 현황을 파악해봐야 할 것 같으니 시장조사를 해주시죠.”
임정혁 부장은 어센트 내부 데이터베이스와 증권사 리서치 리포트를 볼 수 있는 웹사이트를 몇 개 알려주며 시장 현황을 파악해보라고 했다. 대한통신의 현 사업영역인 유선전화와 인터넷 시장에 대해 알아보라고 하는 것 같았다. 자료는 금방 찾을 수 있었다. 나는 <경영컨설팅 실무>라는 책에서 읽었던 내용을 떠올리며 파워포인트로 내용을 정리했다.
만족스러웠다. 분석의 핵심인 대한통신 차트에는 음영을 넣고 굵은 글씨체로 눈에 띄기 쉽게 했다. 아차, 시장 점유율을 잊고 있었다. 유선전화 점유율은 65%. 인터넷 점유율은 30%. 유선전화에 비해선 인터넷 점유율이 낮았다. 평소 신문에서 읽었던 시장상황과 일치했다.
“시장조사는 이 정도로 하면 될 까요?”
장표를 드리밀며 조심스레 물었다. 임 부장 표정엔 아무 변화도 없었다.
“원본 데이터도 좀 가져와주시겠어요.”
임 부장이 말했다. 나는 데이터를 뽑아 임 부장에게 내밀었다. 뭐가 잘못됐나? 분명 숫자는 여러 번 확인했다. 임 부장은 데이터를 앞 뒤로 한 번 훑어 보고는 보드 앞으로 다가섰다.
“컨설턴트라면 말이죠, 한 걸음 물러서서 전체를 볼 수 있어야 해요.”
전체를 본다? 당연한 얘기 아닌가? 임 부장은 한껏 치올린 내 눈꼬리를 힐끗 쳐다 보고는 표정 변화없이 보드에 차트를 그렸다. 불과1분 사이, 뜬구름 같던 당연함은 임 부장이 그러쥔 마커펜을 따라 구체적인 모습으로 나타났다. 같은 데이터를 사용했지만 임 부장의 차트는 내 차트와는 사뭇 다른 모습이었다.
“이렇게 보면 어떨까요? 유선전화와 인터넷. 이게 지금 대한통신이 하고 있는 사업이죠. 이 블록의 넓이를 시장 사이즈로 보면 유선전화가 인터넷의 2.5배정도 되고, 진한 부분을 대한통신 점유율로 보면 유선이 65%, 인터넷이 30% 정도가 되요.
전체 시장을 보면 14조 시장에서 7.5조 정도 하는 거니까 대한통신사가 55% 정도 차지하고 있는 그림이 나오네요. 현대통신이 2위고, 3위는 온세통신이고요. 이게 현재 시장 상황인거죠. 하지만 성장과 경쟁을 염두에 두고 그림을 다시 그려보면 어떻게 될까요?”
성장과 경쟁? 내가 고민하는 사이 임 부장은 다시 차트를 그리기 시작했다.
“요즘 통신사 화두가 컨버전스(convergence) 인데 성장을 염두에 둔다면 우선 무선전화나 인터넷 방송처럼 기존상품과 함께 판매 할 수 있는 인접 통신사업을 고려할 수 있어요. 사업 영역을 확장하면 판이 바뀌죠. 우선 유선전화 시장은 인터넷전화 시장과 합쳐 보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서로 대체제라 인터넷전화 시장이 유선전화 시장을 잠식시키고 있으니까요.
대한통신은 규제 때문에 인터넷 전화 서비스는 출시 못하고 현대통신과 온세통신만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결과적으로 대한통신의 입지가 좁아지고 있는거죠.
무선전화 시장 크기는 20조 정도 되고 현대통신이 절반정도 점유율을 차지하네요. 대한통신은 아직 무선시장에 진입하지 못했고요. 방송 시장은 2조 정도 되는데 유선방송 사업자들이 권역 별로 사업을 해서 지배적 위치에 있는 사업자는 없습니다. 통신에 기반을 둔 사업자 중에선 현대통신이 유일하게 방송사업을 하고 있고요. 이렇게 보면 대한통신의 현재 사업영역과 인접사업 영역을 한눈에 볼 수 있죠.”
차트 형식을 바꾸고 몇 개 데이터를 더했을 뿐인데 확실히 한 걸음 물러서서 본 전체적인 구도가 눈에 들어왔다.
“그럼 이제 두개를 붙여 놓고 볼까요? 세윤 씨가 한번 그려보시죠.”
임 부장은 내게 마커펜을 건냈다. 이미 그렸던 그림을 왜 다시 그리라는 거지? 임 부장은 어리둥절해하는 나에게 두 개 그림을 비교해보려는 거니 양 옆에 붙여서 그려보라 했다. 나는 그가 그렸던 그림을 곁눈질하며 따라 그렸다. 텍스트와 숫자가 많아 생각보다 오래 걸리긴 했지만 그런대로 비슷한 모양이 나왔다.
임 부장은 그림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그리곤 고개를 한번 갸우뚱 하더니 화살표를 하나 추가했고, 박스에 음영을 넣고 글을 몇자 적었다.
와! 시장 구도가 바뀐다는 메시지가 한 눈에 들어왔다. 임 부장은 마커펜 뚜껑을 닫으며 다시 입을 열었다.
“이제 스토리가 조금 잡히네요. 예전에는 대한통신이 독보적인 선도업체 였는데 컨버전스로 인해 사업 경계가 허물리면서 만만치 않은 경쟁사들이 나타난 겁니다. 시장 점유율은 절반이 넘게 줄었고, 1위 업체는 대한통신이 아니라 현대통신이 됐죠.
하지만 시장 사이즈도 2배 가까이 늘었어요. 분명 위기지만 기회라고도 볼 수 있는거죠. 무선전화와 인터넷 방송 모두 대한통신에겐 신규시장이지만 컴넷과는 인수 얘기도 나오고 있고 하니 그만큼 성장 가능성도 있는 겁니다.
관건은 50% 정도 점유율을 지닌 유선통신 시장에서의 영향력을 어떻게 활용할거냐에요. 사업기반을 최대한 활용하려면 유선전화 고객에게 인터넷, 무선전화, 인터넷방송을 결합상품으로 제공하는 전략을 고려할 수 있겠죠.
그러면 고객 입장에선 유무선 통합 서비스를 받는다는 점에서 ‘가치 혁신’이 될 수 있어요. 대한통신 입장에선 새로운 상품을 판매할 수 있으니 성장 기회라 볼 수 있고요.
바꿔말하자면 ‘고객 중심의 가치 혁신’이란 결합상품을 통해 고객당 매출을 극대화 하겠다는 전략이에요. 유선통신 고객에게 인터넷, 무선통신, 방송 서비스까지 팔아보겠다는 거죠. 이 전략에 적합한 운영모델을 정의하는 게 우리가 해야할 일입니다.
예를 들면 유선전화 상품만 팔던 대리점에서 인터넷과 무선통신, 방송 서비스까지 팔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되는지, 뭐 그런 걸 고민해야 하는 거죠. 비전이라면 중장기 방향성도 있을 테니까 그런 부분까지 고려해 봐야 할 것 같아요.
세윤 씨는 일단 대한통신 관련 기사와 통신시장 동향 관련해서 리서치를 더 해주세요. 저는 대한통신에서 비전 작업에 참여했던 팀을 파악해보고 미팅 스케줄을 잡도록 할테니까요.”
임 부장은 말을 마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고객당 매출 극대화!
충격이였다. 난 임 부장이 그려놓은 차트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고객 중심의 가치 혁신’은 전혀 고객 중심의 비전이 아니었다. 한 고객에게서 얻을 수 있는 이득은 다 얻어 보겠다는 지극히 이기적이고 탐욕스런 비전이었다. 임 부장은 단 몇 분만에 그 의도를 해석해내고 ‘결합상품을 통한 고객당 매출 극대화와 이에 적합한 운영모델’이란 답을 내놓았다.
임 부장의 답은 화이트 보드에 그린 두 개의 차트에 올곶이 담겨 있었다. 임 부장이 그렸던 트리맵 차트는 라인 차트나 바 차트처럼 흔히 볼 수 있는 차트는 아니었지만 차트 하나가 이렇게 쉽고 직관적으로 팩트를 전달할 수 있으리라곤 상상도 못했다.
무언가 고도의 지식이나 기술이 필요한 분석은 아니었다. X축과 Y축을 더해서 각각 100%가 되는 심플한 차트였다. 덧셈과 뺄셈 그리고 백분율만 알면 누구든 그릴 수 있었다. 하지만 내가 처음 그렸던 차트와는 너무도 달랐다. 같은 데이터를 보고 그린 차트가 이리도 다를 수 있을까?
임 부장의 차트를 보면 숫자들이 살아 움직여 전쟁을 벌이는 듯 했다. 기존 세력들의 피말리는 전장에 새로운 영웅이 뛰어들고 형세가 격변하며 살아남기 위해 투쟁하는 거대 통신사들의 혈투가 보였다. 55%와 20%라는 대한통신 점유율의 차이는 유선에서 무선으로 진화하는 시장 흐름부터 경쟁 구도의 변화까지 너무도 많은 얘기를 해줬다.
아, 이게 컨설턴트가 하는 분석이구나!
충격과 함께 선덕선덕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그것은 그간 내가 경험했던 세상과는 다른, 신박한 법칙이 지배하는 비즈니스 세상과의 첫 조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