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전사 IT진단 (1)

by 성세윤

분당에 있는 대한통신 본사로 첫 출근을 한 건 킥오프 워크숍 다음 날이었다. 이른 시간인데도 대한통신 앞은 출근하는 인파로 가득했다. 모두 비슷한 정장 차림에 뭐가 그리 바쁜지 앞만 보며 걸었다.


조금도 특별할 것 없던 내가 특별하다는 생각 하나 만으로 연구실에 처박혀 살았다. 그리곤 느즈막이 직장인 대열에 끼어 대기업 정문 앞에 서있는 나 자신을 보자니 만감이 교차했다. 하지만 감상에 빠져있을 여유는 없었다. 정사원 전환을 위해선 하루빨리 업무를 파악하고 나 스스로를 증명해야 했다.


대한통신 프로젝트는 시작부터 순조롭지 않았다. 인턴에 불과한 나조차 분위기가 뒤숭숭하다는 건 알 수 있었다. 킥오프를 준비할 때만 해도 ‘전략’과 ‘운영모델’에 초점을 맞춰 프로젝트를 진행하나 싶었는데 어느새 화두는 ‘IT’로 바뀌었다. 어깨너머 들리는 얘기로는 내년부터 차세대 IT 인프라 사업이 시작될 예정이라 킥오프 워크숍 때 대한통신 컨트롤타워 격인 혁신실에서 지침이 내려왔다고 한다.


혁신실은 우리 프로젝트를 발주한 부서로 전사 과제를 도맡아 하긴 했지만 IT와는 거리가 멀었다. IT프로젝트라면 당연히 IT를 담당하는 IT본부에서 진행하는 게 맞았다. 하지만 사장이 직접 추진하게 될 차세대 IT 프로젝트의 주도권을 가져오고자 혁신실장이 우선순위를 조정했다고 한다.


어센트 입장에서도 수백 억 예산이 투입될 차세대 IT 프로젝트야 말로 안정적 매출을 확보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결국 ‘운영모델 혁신’을 위해 시작된 우리 프로젝트는 킥오프 워크숍 후 ‘전사 IT 진단’ 프로젝트로 거듭나게 됐다.


프로젝트 방향이 크게 바뀐 건 아니었다. 여전히 핵심은 대한통신이 유선통신과 인터넷 시장을 벗어나 무선통신과 인터넷 방송 영역으로 사업범위를 넓히기 위해 어떻게 변화해야 하느냐였다. 다만 프로젝트 초점이 사업전략이나 운영전략이 아닌 IT로 맞춰질 뿐이었다. 이를테면 결합상품을 효율적으로 지원하기 위한 IT 시스템 요건 분석이 프로젝트 목표가 된 것이다.


나로선 다소 실망이었다. 임정혁 부장과 킥오프 워크숍을 준비하며 ‘포트폴리오 전략’이니 ‘신규사업’이니 하며 한껏 들떠 있었는데 IT 프로젝트를 한다니 왠지 강등당한 기분이었다. ‘전략’이라면 폼나 보이는데 IT라면 고리타분하게만 느껴졌다.


하지만 괘념 친 않았다. ‘IT’에 집중해 후속 프로젝트가 확실해진다면 정사원 전환은 오히려 유리할 수 있었다. 잡무긴 했지만 정 상무가 시키는 일은 따박따박해내고 있었고, 정 상무도 대한통신 직원들 앞에선 날 ‘성 사원’이라 부르며 정사원 대접을 해줬다.


우리 프로젝트는 3개월짜리였고 9월에 프로젝트가 시작됐으니 잘만 하면 해를 넘기기 전에 입사할 수도 있었다. 큰 실수 없이 3개월만 버티면 됐다. 그때만 되면 나도 글로벌 컨설팅 회사에 입사했다고 당당히 말할 수 있게 된다. 입가엔 어느새 미소가 그려졌고 모든 게 내 상상대로만 풀릴 줄 알았다.


“세윤 씨, 인터뷰하러 같이 가시죠. 따로 할 건 없고 회의록만 정리하면 돼요.”


한호진 과장이 말했다. 프로젝트가 시작한 지 2주 만에 투입된 한 과장은 내 사수 역할을 자처하며 문서 작성법부터 인트라넷 검색법까지 기본적인 업무를 가르쳐 줬다.


30대 초반 늦깎이 과장이던 그는 한 중견 IT업체에서 일하다 정주성 상무를 통해 어센트에 입사했다고 한다. 깡마른 체구에 오탈자 하나까지 지적하는 깐깐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두꺼운 안경알 사이로 쏘아보는 듯한 눈빛 덕에 말도 걸기 힘들었다.


그때까지 난 전략가 임정혁 부장의 마법 같은 달변과 촌철살인의 인사이트에 빠져있던 터라 IT전문가 한호진 과장과 일하는 게 달갑진 않았다. 임정혁 부장을 사수로 둔 치수가 부러울 뿐이었다.


한 과장과 함께 만난 인터뷰 대상은 IT본부 상품담당 최 과장이었다.


“표준상품체계요? 있죠. 이디더블유에 팸코드라고 통합관리 체계가 있어요. 물론 비시스 같은 대형 시스템은 자체 코드를 쓰긴 해요. 알에스나 엔에스도 그렇고요. 워낙 대형이라 그게 효율적이죠. 그래도 연동은 가능합니다. 티씨피아이피, 에프티피 같은 표준 프로토콜로 되어 있거든요. 결합상품 지원은 시스템만 연계하면 됩니다.”


잠시 딴생각을 하던 나는 그의 말이 끝날 때쯤에야 허겁지겁 회의록을 적기 시작했다. 첫 단어부터 막혔다. 팸? 비시스? 이게 다 무슨 말이지? 최 과장은 IT 전문가답게 대한통신 시스템에 대해 해박한 지식을 늘어놓았다.


컴퓨터라면 논문을 쓰며 전공자들 수준으로 익혔지만 최 과장이 하는 말은 도저히 알아들을 수 없었다. 일단 들리는 대로 부랴부랴 적어만 놓았다. 그나마 한 과장이 미리 질문지를 공유해 줘 전체 내용을 따라갈 수 있었다.


“세윤 씨, 전 다른 회의 들어가야 하니까 회의록 정리되면 바로 보내주세요.”


인터뷰를 마친 후 한 과장은 의자에 걸친 정장 재킷을 집어 들며 말했다. 인터뷰가 끝나자마자 회의록이라니. 머리가 쭈뼛 솟아올라 대답도 못하고 있는데 한 과장의 뒷모습은 벌써 시야에서 사라졌다.


녹취록을 보니 옹알이 수준의 용어들이 줄을 이었다. 다행히 데이터 아키텍처를 공부하며 봤던 몇 개 용어는 알아볼 수 있었다. EDW는 데이터웨어하우스, 즉 데이터관리 시스템이고, TCP/IP, FTP는 통신 프로토콜이었다. 하지만 나머지 용어들은 기억을 더듬고 인터넷까지 뒤져봐도 찾을 수 없었다.


한참 동안 모니터에 고개를 처박고 용어들을 찾다 보니 문득 내가 너무 부분에만 골몰하고 있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중요한 건 전체 내용을 파악하는 것이지 용어 하나하나의 의미는 아니었다.


고개를 들어 회의록을 다시 봤다. 가관이었다. 철자조차 불분명한 용어들이 잘못 끼워진 직소 퍼즐 조각처럼 어지러이 산재했다. 주눅 들 필요는 없었다. 임정혁 부장이 얘기대로 컨설턴트라면 한 걸음 물러서 퍼즐 전체를 파악할 필요가 있었다! 커피가 필요했다.


에스프레소 샷 세 개를 넣은 뜨거운 아메리카노를 정확히 세 모금 마신 후 다시 회의록을 검토했다. 전체 문맥을 살피고 의미를 유추해 봤다. 용어를 몰라 공란으로 남긴 곳은 추론과 가설로 채워 넣었다. 큰 그림이 가시화되기 시작했다.


‘상품관리를 위한 표준체계가 있고, 대형 시스템에서 자체 코드를 쓰긴 하지만 표준 프로토콜로 되어 있어 통합 관리 및 결합상품 지원 가능.’


대한통신 비전은 고객당 매출 극대화였고 이를 위해선 다양한 상품을 연계한 결합상품 제공이 필수였다. 최 과장에 따르면 비전 달성을 위한 IT기반은 어느 정도 갖춰져 있는 셈이었다.


한 시간 정도 더 걸려 얘기를 정리하고 문장까지 다듬어 놓으니 회의록이 그럴듯하게 정리됐다. 메시지도 명확했다. 필요한 건 시스템 간 연계였다. 시스템들 간 프로토콜을 연결해 데이터를 공유한다거나 업무 프로세스를 연계할 수 있어야 결합상품 지원과 통합관리가 가능했다.


수 차례 더 오탈자와 띄어쓰기를 확인한 나는 손끝에 힘을 꽉 주고 전송 버튼을 눌렀다. 내가 스스로 해낸 첫 회의록 업무였다.


한 과장이 회의에서 돌아온 후 이따금 긴장된 눈길로 그를 일별 했지만 별다른 반응은 없었다. 분명 회의록은 읽어 봤을 텐데 말이다. 한 과장이 날 찾아온 건 저녁 식사 후였다. 한 과장은 회의록을 출력해 손에 들고 의자를 끌어 내 옆에 앉았다. 회의록은 완벽히 정리됐다고 생각했지만 나도 모르게 침이 꿀꺽 넘어갔다.


“처음부터 하나씩 보죠. 우선 참석자요. 참석자 이름은 정확히 써야 해요.”


참석자 이름은 ‘최 과장’이라고만 썼다. 최 과장은 자신을 IT본부 최 과장이라고만 소개했지 이름을 얘기하진 않았다. 말하지 않은 이름까지 파악했어야 했던 건가? 인터뷰 내용만 잘 정리하면 됐지 인터뷰 대상이 누군지가 왜 중요한 건지. 나는 말없이 입술을 깨물었다.


“세윤 씨. 회의록 정리는 세윤 씨 몫이에요. 모든 걸 정확히 파악해야 합니다. 나중에 추가 질문 생기면 어떻게 연락할 거예요? IT 본부에 최 과장이 한 두 명이겠어요. 우리가 인터뷰했던 분은 상품체계 관리팀 최준식 과장이에요.


그리고 여기 ‘팸’은 피 에이 엠 Pam이 아니라 피 이 엠 PEM입니다. 상품정보 시스템이죠. 비시스 BESIS는 고객관리 시스템인데 RS는 유선전화 고객 시스템이고 NS는 인터넷 고객 시스템이에요. 제가 드렸던 문서 안 본 겁니까? 용어는 미리미리 숙지하셔야죠.”


한 과장은 날 만났던 첫날 대한통신 IT본부에서 작성했다는 <IT 혁신 계획> 문서를 건넸다. 현업이 작성한 문서라 어쭙잖게 봤고 시스템 구조도로 가득한 IT문서라 몇 페이지 훑어보고 말았다. 문서 끝에 있던 IT시스템 색인은 들춰 볼 생각도 하지 않았다. 내 관심은 비전 문서와 임 부장이 킥오프 워크숍 작업 때 참고하라고 줬던 전략 문서들 뿐이었다.


“그리고 이걸 보세요.”


한 과장은 ‘통합 관리 및 결합상품 지원 가능’이란 문장에 빨간 줄을 그으며 말했다.


“최 과장이 언제 이렇게 얘기했죠?”


“인터뷰 때요. 시스템들이 표준 프로토콜로 되어 있어서 지원 가능하다고 했습니다.”


“최준식 과장은 그렇게 얘기한 적 없습니다. 표준 프로토콜을 쓰고 있다고 했고, 결합상품 지원을 위해선 시스템을 연계해야 한다고 했죠.”


“네? 같은 얘기 아닌가요?”


“달라요. 표준 프로토콜만 쓴다고 시스템들이 쉽게 연계되는 건 아니에요. 표준 프로토콜을 써도 상품 속성이나 데이터 체계가 다르면 연동하기 힘들어요. 가능해도 다 수작업이라 비용이 많이 듭니다. 최준식 과장은 IT본부 출신이라 현재 시스템에 대해 방어적으로 얘기할 수밖에 없어요. 뭐든 된다고 하겠죠. 팩트만 분리해서 들을 필요가 있습니다. 그가 했던 얘기 중 중요한 팩트는 3개예요.


첫째, 표준상품관리 체계가 있음에도 대형 시스템에서는 사용하고 있지 않다.

둘째, BESIS와 같은 대형 시스템은 RS나 NS 같은 서브 시스템도 다른 체계를 사용한다.

셋째, 시스템 간 연계를 위해선 추가 개발이 필요하다.

이렇게요.


최 과장 말대로 추가 개발을 하고 시스템을 연계하면 결합상품 지원이 어떻게든 가능은 하겠죠. 하지만 지속가능한 체계는 아닙니다. 시스템 간 체계가 중구난방이면 결합 상품 수가 증가할 때마다 복잡도는 기하급수적으로 늘 거예요. 그만큼 개발에 필요한 투자도 늘어나게 되고요.”


이런. 아무리 IT라도 컨설팅은 컨설팅이었다. 너무 쉽게 생각했다. 고개를 들 수 없었다.


“회의록은 참여했던 사람들이 논의한 내용에 대한 공식적인 기록이에요. 그래서 누가 어떤 발언을 했고 그 발언에 담긴 팩트를 기록하는 거예요. 이렇게 개인적인 판단이나 해석이 들어가면 안돼요. 그건 회의록을 읽는 사람 몫이죠.”


실수는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회의 참석 전 알고 있었어야 할 용어는 숙지하지 못했고, 용어를 알지 못했기에 비워뒀어야 할 공난을 내 상상으로 채워버렸다. 회의 내용을 ‘나’라는 오염된 필터로 왜곡시켰다. 내 멋대로의 추측을 회의록이란 공식자료로 전체 팀원에게 배포했던 것이다. 정 상무는 내가 보낸 회의록을 읽고 무슨 생각을 했을 까? 볼이 화끈거렸다.


“세윤 씨. 인턴기간 짧습니다. 정사원이 되려면 그 기간 동안 정사원만큼 성과를 내야 해요. 맛집 예약하거나 회의실 잡고 문서 뽑는 게 인턴 일의 전부는 아닙니다. 긴장 푸시면 안 돼요. 정 상무님 생각보다 냉정하고 계산 정확하신 분이세요. 편히 대해준다면 나름 이유가 있겠죠. 기대치가 낮다거나 기대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거나요. 정사원 전환을 생각하신다면 분발하셔야 해요. 반년 넘게 인턴만 하다 그만둔 친구들도 수두룩합니다. 절대 쉬우신 분 아니에요.”


한 과장의 한마디 한마디가 폐부를 찔렀다. 인터뷰를 쉽게 통과한 것도 일을 편하게 한 것도 다 이유가 있었다. 모두에게 깐깐한 정 상무가 유독 나만 유유히 대했던 건 내가 그의 잡무를 처리해 주는 게 편해서, 허드레 일을 시켜도 부담이 없어서였다. 나는 언제든 대체 가능한, 그다지 특별할 것 없는 인턴에 불과했다.


사무실을 오가며 분주히 움직이는 팀원들이 영화 속 한 장면처럼 아늘 한 잔영을 남기며 나를 스쳐갔다. 난 헛숨을 내쉬며 그들의 꼭뒤만 바라보고 서 있었다. 같은 공간에서 같은 업무를 봐도 그들과의 신분차는 천양지간이었다.


그날 밤, 버스를 타고 오는데 관자놀이가 지끈거리며 바늘로 찌르듯 아파왔다. 겨우 인턴 자리 하나 얻고서 이제 승승장구할 일만 남았다 신망했는데 난 여전히 알껍데기 세상에 갇혀 있었다. 이제 겨우 세상과의 경계를 파악했을 뿐이었다. 그 경계 너머로는 비즈니스라는 고유의 언어와 법칙이 지배하는 세상이 존재했다. 대학 4년 내내 세상의 이치를 깨치겠다며 배운 물리로는 절대 이해할 수 없는 생경한 세상이었다.


그렇다. 세상을 지배하는 건 연구실과 책 속에 존재하는 물리학 따위가 아니라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욕망과 의지와 행동이 얼기설기 만들어 내는 천변만화의 비즈니스였다. 그 이치를 터득하려면 알을 깨고 나와 저 세상의 일원이 돼야 했다.


심장이 조릿조릿 뛰었다. 이대로 안일하게 정사원 전환을 기다릴 순 없었다. 정 상무도 한 과장도 치수도 제물로 날 배려해 줄 거란 생각은 버려야 했다. 내 가치는, 힘은 나 스스로 만들 수 있을 뿐이었다. 어디까지나 나는 회사가 필요로 하고 회사가 찾는 사람이 돼야 했다.


다짐했다. 어떻게든 내 껍데기를 뚫고 나가겠다고, 세상 밖에 나가 현실과 조우하겠다고 말이다. 이건 내게 주어진 천재일우의 기회였다.

keyword
이전 03화3. 고객 제공가치 혁신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