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전사 IT진단 (2)

by 성세윤

다음날 나는 대한통신 본사 근처에 고시원 방을 하나 얻었다. 세상을 향해 진격하기로 다짐했고, 달리기 시작했다.


쉽진 않았다. 매일같이 전쟁이었다. 쉴 새 없이 쏟아지는 문서작업을 각개 격파하고 인터넷과 인트라넷을 뒤져 쓸만한 자료를 수색해야 했다. 그러면서 바탕체 사이 매복한 고딕체를 식별하는 눈씨가 생겼고, 손가락 끝 감촉만으로 파워포인트 단축키를 숙지하는 감각도 익혔다. 검색한 자료는 타이틀과 개요만 일람하고도 쓸만한 자료인지 추려낼 수 있었다.


아침해와 출근하고 샛별과 퇴근했다. 눈두덩 아래론 짙은 눈그늘이 번졌고 무시로 커피와 에너지 드링크를 들이켰다. 컨설턴트들이 슬라이드 한 장을 만들어 발표할 때면 마치 그 통찰이 타고난 역량과 인사이트에서 비롯된 것처럼 보이지만, 그 이면에 얼마나 엄청난 노동집약적 작업이 숨겨져 있다는 걸 깨달았다.


기본기를 다지기 위해선 무한반복하며 학습하는 방법 밖에 없었다. 일요일부터 금요일까지 하루 15시간씩 사무실을 지키며 내 모든 걸 쏟아부었다. 그렇게 2개월을 보낸 뒤, 드디어 내 가치를 증명할 기회가 찾아왔다.



“네? 박 차장님 하고 유 대리님이 나갔다고요?”


황망했다. 멀쩡히 일하고 있던 두 사람이 갑자기 빠졌다니 말이다.


“자발적으로 나갔다기 보단 반반이에요. 프로젝트 예산이 부족하니까 정 상무님이 면담하다 결정하신거죠.”


한호진 과장은 별일 아니라는 듯 시큰둥하게 말했다. 하지만 박 차장과 유 대리를 직접 지원하던 나로선 걱정이 앞섰다. 남은 일은 누가 다 한단 말인가? 게다가 이유가 예산 때문이라면 탄식이 절로 나올 일이었다. 내가 정사원이 되기 위해 무엇보다 필요한 게 프로젝트 예산이니 말이다.


“업무는요?”


“박 차장님이 하던 업무는 지금 수준으로 마무리할 거고 유 대리 업무는 세윤 씨하고 저하고 분담해야죠. 그리고 인턴을 두 명 정도 더 뽑게 될 거예요.”


맙소사.


“이게 다 세윤 씨 때문입니다.”


“네?”


“세윤 씨가 일을 너무 잘하니까 정 상무님이 박 차장하고 유 대리는 없이도 된다고 생각하셨나봐요.”


“에이, 그건 아니죠…”


웬일로 이렇게 띄워주는 거지? 기분이 나쁘진 않았다. 시간만 잘 안배한다면 업무는 충분히 커버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때 한호진 과장은 한 단계 더 나간 제안을 했다.


“그래서 얘긴데, 정 상무님이 이참에 세윤 씨한테 새로운 업무를 맡겨 보라고 하시더군요.”


“새로운 업무요?”


“세윤 씨, IT비용 분석할 수 있겠어요?”


섣불리 대답할 수 없었다. IT비용분석이란 건 해본 적도 없고 어떻게 하는지도 몰랐다. 물론 그건 익히면 되니까 상관없었다. 마뜩잖은 건 ‘IT’란 단어였다. ‘비용분석’이야 괜찮았지만 ‘IT’는 싫었다.


그동안 업무를 진행하며 ‘IT’ 프로젝트 들이 어떤 프로젝트인지 파악할 수 있었고 내가 컨설팅에서 기대했던 전략적이고 분석적인 업무는 아니란 것도 알 수 있었다. 이렇게 자꾸 IT로 엮이는 게 불편했다. 내가 스스로 ‘IT전문가’라는 주홍글씨는 새기는 것 같았다.


“네. 해본 적은 없긴 한데요…”


평소 같으면 바로 하겠다고 말했겠지만 마음속 불편함 때문인지 본능적으로 말꼬리를 흐렸다.


“자신 없으세요?”


“그건 아닙니다.”


“해내야 합니다.”


“네?”


“모르시겠어요? 이건 정 상무님이 내는 시험이에요. 세윤 씨가 단독으로 정사원만큼 성과를 낼 수 있는지에 대한.”


번쩍, 눈이 치떠졌다. 한 과장은 풋 하고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박 차장과 유 대리가 나가면서 확보되는 예산으로 특채 프로세스를 진행하겠다는 얘긴가? 물론 내가 이 시험을 통과한다는 전제가 있긴 하지만 말이다. 미소는 꽃이 피듯 만개했고 할 수 있다는 외침이 목젖까지 치고 올라왔다.


헌데 무언가가 무지근히 그 외침을 눌렀다. 본능이 다시 한번 날 저지했다. 정 상무가 언제부터 날 그렇게 챙겼단 말인가? 너무 이상적인 그림이었다. 한 과장 말대로 정 상무는 결코 쉽지 않았다. 회의실 예약을 할 때도 참석인원과 목적에 따라 비치된 집기까지 확인했다. 그런 그가 나에게 이런 업무를 줄 때는 분명 의도가 있을 것이다.


스멀스멀 의구심이 올라오려는데 답을 기다리는 한 과장의 눈씨가 의식됐다. 하긴, 정 상무에게 숨겨진 어젠다가 있다 해도 지금 내겐 그 의도를 파헤칠 여유도 달리 선택할 대안도 없었다. 입사를 위해서라면 이게 낚싯밥이라 해도 물어야만 했다. 낚이자마자 회로 쳐지는 한이 있더라도 모험을 걸 수밖에 없었다.


“네, 열심히 해보겠습니다.”


난 전에 없던 비장함으로 말했다.



IT 비용 분석은 일종의 데이터 분석이었다. 대한통신의 IT 비용을 항목별로 취합해 통계를 내야 했다. 한때 데이터베이스 이론에 푹 빠졌던 나에게 데이터 분석은 가장 자신 있는 분야 중 하나였다. 어려울 건 없었다.


분석을 통해 내야 할 메시지는 명확했다. IT비용은 사업 지원을 위한 신규 개발 등 혁신투자(discretionary spending)와 시스템 유지보수를 위한 운영비용(non-discretionary spending)으로 구분된다. 어센트가 개발한 IT 비용분석 프레임워크를 이용하면 혁신투자와 운영비용 간 비율을 세계 선도 통신사 데이터와 비교할 수 있었다.


정 상무는 대한통신의 IT 운영비용이 과도히 높으며 결합상품처럼 시스템 간 연계가 필요한 상품을 지원할 때 기하급수로 증가할 거란 가설을 세웠다. 그걸 정량적으로 증명하는 게 내 역할이었다. 한 과장은 업무에 대해 설명한 후 나에게 현재 상황을 알려줬다.


“제가 저번 주에 템플릿은 보냈으니까 우선 비용 자료부터 취합해야 할 거예요. 데이터 확인 먼저 해보시죠.”


“네. 어디어디 보내셨어요?”


“IT본부하고 사업부요. 제가 리스트 드릴게요.”


“그럼 회신 올 때까지 기다리기만 하면 되는 거 아닌가요?”


“그렇게 마법처럼 템플릿에 맞춰서 데이터가 취합되면 얼마나 좋을 까요? 현업이 저희 생각대로 움직이진 않

는답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세윤 씨 스스로 한다고 생각해야 일이 진행될 거예요.”


대한통신 IT본부에선 고객응대 시스템, 통신망운영 시스템 등 대규모 전사 시스템을 관리했고, 사업부에선 개별 제품이나 서비스 시스템을 관리했다. IT본부 비용은 시스템별로 체계적으로 관리되어 이미 분석된 자료가 있었다. 이는 전체 비용의 50% 수준이었다.


문제는 사업부 개별 시스템들이었다. 이들 IT비용은 제품 개발비나 사업 운영비에 반영되는 경우가 많아 분석은커녕 비용 집계도 힘들었다. 과도한 운영비가 발생하는 건 사업부 개별 시스템이라 이 비용을 파악하는 게 필수였다.


얼마 후 사업부에서 요청했던 자료들이 시나브로 도착했다. 역시나 템플릿에 맞춰 온 데이터는 없었다. 사업계획서를 보내온 부서도 있었고, 회계 시스템에서 예산 집행내역만 뽑아 보낸 부서도 있었다.


일주일이 지나자 비용 내역이 가득 담긴 검은 파일이 회의실 한편에 쌓였고 수 만 행에 달하는 엑셀 파일이 취합됐다. 산더미처럼 쌓인 데이터에 입은 턱 하니 벌어졌다.


프로젝트 한 개 분량의 데이터를 처리하는데 정확히 한 시간이 걸렸다. 일주일 밤을 꼬박 새도 처리하지 못할 분량이었다.


다행히 데이터에 패턴이 보였다. 예를 들면 ‘고도화’란 명칭이 들어간 비용 집행내역이었다. 고도화라면 말 그대로 기존 시스템을 업그레이드 시킨다는 얘기였고 분류 상으로 본다면 ‘운영비용’ 보다는 ‘혁신투자’에 가까웠다. IT본부 팀원과 얘기해보니 고도화 사업은 대대적으로 시스템을 업그레이드하는 사업이 맞다고 했다. ‘사업계획’이란 용어가 들어간 집행내역도 ‘혁신투자’로 볼 수 있었다. 신규사업을 진행하기 위한 IT시스템 구축비용이었기 때문이다.


난 기계적인 분류 작업을 멈추고 프로젝트 명칭에 기반해 속성을 정의했다. 전체 데이터를 훑고 나니 열 개 정도의 속성이 정의됐다. 이제야 말로 실력을 발휘할 때였다. 반나절 정도 집중해 엑셀 매크로 명령어를 설계했다. 속성과 일치하는 단어나 나올 때마다 분류 태그를 달아주고 별도 시트에 태그가 달린 데이터를 모으는 명령어였다.


몇 번의 시행착오를 거쳐 명령어는 완성했다. 실행버튼을 누르자 엑셀 셀이 사면팔방 요란스레 점멸하더니 80% 정도 분량의 데이터가 단번에 정리됐다. 찌릿한 쾌감이 검지를 타고 울려 퍼졌다. 한 땐 로직과 규칙에 의해서만 지배되는 프로그래밍 언어에 환멸을 느꼈는데 그게 이렇게 도움이 될 줄이야. 몇 시간 정도 더 데이터와 씨름하고 나니 어느 정도 전체 IT비용에 대한 윤곽이 나왔다.


연간 총 IT비용: 2100억 원. 혁신투자: 1000억 원. 운영비용: 1100억 원.


빨리 정리되어 좋긴 했는데 뭔가 이상했다. 벤치마크 수치 상 혁신투자와 운영비용의 적정 비율은 1 대 2였다. 혁신투자보다 운영비용이 높게 나오긴 했지만 10% 정도 높은 수준이라 오히려 벤치마크 수치보다 운영비용 비중이 현저히 낮은 편이었다. 가설과는 정 반대 결과였다. 아무리 엑셀을 만지고 조정해 봐도 비율은 달라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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