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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성세윤 Jul 09. 2023

32. 인텔리전트 시티 인프라 작전 (6)

“그게 무슨 소리야? 갑자기 퇴사라니.”


“주말에 따로 얘기하려고 했는데, 말 나온 김에 하자. 나 회사 옮겨. 대표님하고 임 부장님께는 다음 주쯤 분위기 봐서 얘기할 거야.”


“…”


“충격 먹었냐? 뭐라고 말 좀 해봐.”


“갑자기 이직은 왜 하는 건데?”


“갑자기는 아니야. 고민 시작한 건 한 반년 됐어. 결정은 최근에 했지만 말이야. 너 이준혁 선배 알지? 뉴욕 골드만삭스에서 일하던 선배말이야. 다음 달에 귀국해서 세언그룹 지주사에서 일할 거야. 난 준혁 선배 밑으로 가려고.”


치수는 그럼 이직할 걸 알고서도 이현민 과장을 만나고 미국과 콘퍼런스 콜을 하고 했던 건가? 그게 그럼 정말 날 도와주기 위해서였나? 머리가 복잡해졌다.


“스마트그리드는 포텐셜 있는 프로젝트니까 잘해봐. 에스랩에서 분명 후속 아이템으로 프로젝트도 띄울 거라고. 잘하면 MBA 스폰서 받는데도 도움 될 거고 말이야. 너 지원한 거 맞지?”


“…”


“야, 그나저나 표정 좀 풀어라. 넌 무슨 애가 그렇게 심기를 다 드러내냐. 사회생활하려면 감출 줄도 좀 알아야지. 여하튼 대학교 때나 지금이나 똑같다니까. 이래서 형님이 어디 마음 놓고 떠나겠냐?”


“어, 아니야. 표정이 뭐 어때서. 그냥 너 퇴사한다니까 그런 거지.”


“근데, 너 좀 많이 늘긴 했더라. 인제 정말 컨설턴트 같던데. 아까 네가 챌린지 할 땐 정말 진땀 뺐다니까.”


“미안. 그렇게 열을 낼 건 아닌데 말이야. 나도 모르게 말이 격하게 나왔지 뭐야. 나답지 않게 말이야.”

순간 치수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동공은 확장했고 내 영혼을 들여다보려는 듯 나를 똑바로 쳐다봤다.


“너 다운게 뭔데?”


“어? 무슨 말이야?”


“너 원래 좀 경쟁심 쌔고 나대기 좋아했어. 난 네가 이제야 원래 모습을 찾은 것 같아서 보기 좋던데.”


“내가… 원래 경쟁심이 쌨다고?”


“그래. 그 자존심에 무슨 말만 하면 따져 들고 맨날 논쟁거릴 만들었잖아.”


아니다. 그럴 리 없었다. 내가 자존심이라니. 난 원래 조용하고, 싸움이라면 구경하는 것도 싫었고, 그냥 내 생각에 파묻혀 그렇게만 살고 싶었다. 분명 그랬다.


“너 대학교 때 기억 안 나? 우리 대판 싸웠던 날 말이야.”


우리가 싸운 날. 치수가 얘기하는 건 카페테리아에서 다퉜던 그날이었다. 그날 일은 치수가 뒤엎었던 생태찌개 건더기까지 생생히 기억났다. 그날 치수는 전공과목 점수가 내가 더 높게 나왔다며 괜히 트집을 잡고 싸움을 걸었다. 경쟁심에 불타올랐던 건 치수 본인이었다. 내가 아니었다.


“그때 무슨 과목이었는지 기억나? 우리 인문대에서 제일 악명 높던 ‘서구문명의 역사’ 수업이었어. 넌 숫자 밖에 모르는 샌님이란 내 말에 이과생으론 유일하게 그 수업을 들었고.”


맞다. 그 수업을 들었던 건 치수 때문이었다. 치수에겐 항상 귀족적인 자신감이 있었다. 그는 특히 언어의 힘을 맹신했다. 그는 기독교도 아니면서 천지가 하나님 ‘말씀’대로 창조됐다고, 세상 모든 게 ‘말씀’이라 말하곤 했다. 자연과학도로서 수를 중시하던 나와는 대척점에 있을 수밖에 없었다. 


‘서구문명의 역사’ 수업도 언어로 치수를 한번 눌러보겠다는 생각으로 들었다. 그리고 내가 이겼다. ‘서구문명’ 수업은 최종 에세이 과제에서 단 한 명에게 A+를 주는 걸로 유명했는데 그걸 내가 받았다. 내 기억으로 치수의 점수는 B였다.


“그때 너 참 웃겼어. 김정현 교수가 플라톤 광팬이란 내 말에 플라톤 책이란 책은 다 읽었잖아. 내가 선배들한테 구걸해 가며 얻어낸 A+ 에세이 족보 참고해서 토픽도 공화정으로 했고 말이야. 맞지? 그때 내가 도서관에 놔뒀던 에세이 족보 봤던 거 말이야. 훗, 네가 그렇게까지 할 거라곤 정말 상상도 못 했는데 말이야.”


치수는 입꼬리를 치올리며 말했다. 돌차간 가슴이 뜨끔했다. 치수가 족보를 보여주겠다고 했을 땐 그의 도움을 받는 게 싫어 거절했다. 그러자 치수는 밑밥을 던지고 낚싯대를 드리우는 강태공처럼 족보를 도서관 책상 위에 놓고는 수업을 듣겠다며 나가버렸다. 


난 유혹을 못 이겼다. 어떻게든 치수를 이겨야겠다는 생각밖에 없었다. 그가 날 그렇게 만들었다. 그가 그토록 맹신하던 언어를 활용해 내가 얻지 못하는 걸 얻어내던 그의 모습을 보자면 어떻게든 한 번은 그를 꺾어야 했다. 


경쟁심 때문은 아니었다. 치수는 캠퍼스에 떠도는 각종 소문과 시험 족보나 취업 관련 후기까지 그 상글한 웃음과 유수한 달변으로 너무도 쉽게 정보를 끌어 모았다. 하지만 그게 지식의 본질은 아니었다. 지식을 추구하는 지성인이라면 무엇보다 고유의 지식을 갖춰야 했고 그건 주변에서 흡수하는 정보만으론 갖출 수 없는 것이었다. 내가 치수를 이기고자 했던 건 그걸 보여주기 위해서였다. 진심으로 그에게 다르게 공부하는 법도 있다는 걸 일깨워 주고 싶었다.


“그래서 그때 화냈던 거야? 내가 족보를 봐서?”


“아니, 족보야 어차피 같이 보려고 구했던 거고. 그때 식당에 정수하고 연희도 같이 있었잖아. 걔들이 족보 구했냐고 하도 귀찮게 하길래 없다 그랬었거든. 근데 네가 거기서 족보 얘길 꺼내서 너 입 닫게 하려고 그랬지. 그래도 생태찌개 엎었을 때 연기는 좀 괜찮지 않았냐?”


난 그때 치수가 정말 화를 낸 줄 알고 근 한 달간 그에게 연락도 하지 않고 피해 다녔다. 그가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다시 손을 내밀기 전까지 말이다. 그땐 이 녀석 넉살엔 못 당하겠다고만 생각하며 그의 손을 잡았었다.


“그럼 족보를 정말 나 보게 하려고 도서관에 놔두고 간 거. 왜 그랬어?”


“그냥. 대학 때 넌 완전히 네 세상에만 갇혀 있었어. 수가 세상의 전부인 줄 알고 책에만 파묻혀 살았지. 근데 내 생각은 달랐어. 인문계던 자연과학계건 결국 지식이란 지성인들 간 공조를 통해 발생하는 거야. 공부만 한다 해도 학자라는 커뮤니티에 속해야 하잖아.


심지어 네가 그렇게 좋아하는 앤드루 와일즈도 그래. 페르마의 마지막 정리를 증명하기 위해 두문불출했다지만 프린스턴 동료들의 조력을 받았기 때문에 성공할 수 있었어. 그런 의미에서 만물의 기본은 인간이고,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언어와 인문학이야 말로 세상의 기초를 이루는 학문이라고 생각했던 거지. 


뭐, 그렇다고 네가 틀렸다고 생각했던 건 아니야. 사람마다 관점은 다른 거고, 심지어 관점이 다르다는 생각조차 하나의 관점일 뿐이니까. 그래도 너한테 한 번쯤은 다른 관점에서 생각할 계기를 만들어 주고 싶었어. 그래서 ‘서구문명’ 수업도 같이 듣자고 했던 거고 말이야. 진심으로 너에게 다르게 공부하는 방법도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어!”


“…”


“난 결과적으로 성공했다고 자평해. 넌 분명 그 수업을 즐겼거든. A+도 단순히 족보를 봐서 받은 건 아닐 거

야. 네가 그만큼 잘 썼으니까 받았겠지.”


그의 시도가 성공한 건 사실이었다. ‘서구문명’을 들으며 인문학에 흥미가 생겼고 그래서 시간이 날 때마다 인문학 과목을 청강하며 플라톤에서 니체까지 섭렵했었다.


“난 마지막 에세이 쓸 때 페리클레스에 대해서 썼어.”


“페리클레스? 왜?”


민주주의의 아버지라 불리는 페리클레스는 이제 막 태동하던 민주주의를 하나의 정치제도로 자리매김하도록 이끈 고대 그리스 정치인이다. 페리클레스는 사회계급이나 학력, 재력과 무관하게 모든 시민들이 정치에 참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소수의 엘리트들이 사회를 이끄는 공화정을 이상적 정치제도로 꼽은 플라톤과는 정반대의 세계관을 가지고 있었다.


“한 방 먹이고 싶었거든. 하도 엘리트, 엘리트 해대는 김정현 교수 꼬락서니 보기 싫어서 말이야.”


아, 그래서 치수가 B를 받았었구나. 페리클레스라면 뒤끝 있는 김정현 교수가 제일 싫어하는 그리스 인물 중 하나였다.


“그것도 그런데, 사실 내 신념이기도 했어.”


“신념?”


“나도 페리클레스처럼 언어의 힘을 믿거든. 플라톤처럼 생각하고 진리를 추구할 뿐만 아니라 표현하고 행동하기 위해서 말이야. 난 언어에 특별한 마력이 있어서 정말 사람을 움직일 수 있다고 믿어. ‘행동’이야말로 언어로 추구할 수 있는 최상의 결과물이야. ‘진리’나 ‘믿음’ 같은 게 아니라 말이야. 너도 알잖아, 내가 정말 하고 싶은 게 뭔지.”


정치. 치수가 항상 하고 싶었던 건 정치였다. 그는 정치를 언어로 신전을 짓는 신성한 일이라 표현했다. 위엄 있고 권위적이면서도 영감을 줄 수 있는 신성한 비전을 제시해 동기부여를 하는 게 정치가의 일이라고 말이다.


“너한테도 그래. 내가 그런 자격이 있는진 모르겠지만 그냥 나에겐 사명같이 느껴졌어. 대학교 때 나 한번 이겨보겠다고 부정행위까지 마다하지 않던 그때 네 모습을 다시 볼 수 있을 까하고 말이야. 


나 사실 그런 네 모습이 그리웠어. 너 연구실에 처박혀 있을 때 정말 이상해졌잖아. 모임도 안 나오고, 나와도 조용히만 있다 가고 말이야. 재작년 언젠가는 동창회 나와서 구석자리에 앉아 있다 인사도 없이 그냥 가버리더라. 


그때 널 보면서 생각했지. 내가 성세윤이란 인간을 사회로 끌어들여 동기부여를 할 수 있을까? 내가 한때 감탄해 마지않던 그 투쟁심에 불을 지펴 이 사회에 긍정적 기여를 할 누군가로 변모시킬 수 있을까? 그게 내 미션이었어. 어떻게 보면 널 위해서가 아니라 나 자신에 대한 테스트였던 거지. 


그래서 사실 오늘은 정말 기뻐. 네가 그렇게 공격한 건 아프지만 그런 의지가 생겼다는 게 나로선 목적은 달성한 셈인 거지.”


그랬다. 어센트 입사하기 전 내 모습은 참절했다. 그땐 삶이 절망 그 자체였다. 매일 아침이면 해가 뜨는 게 그렇게 두려울 수 없었다. 침대에서 일어날 이유를 찾지 못해서였다. 주먹 쥘 힘도 없이 방구석에 처박혀 썩어가고 있었다. 


혼자 생각하고, 혼자 말하기만 하면서 내 세상에 갇혀 실제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전혀 공감하지 못했다. 하물며 세포 하나도, 온 우주도 주변 환경과 순환해야 생이 유지되는 데 말이다. 그런 날 끌어내 어센트에 입사시켜 준 게 치수였다. 그걸 잊고 있었다. 내가 지금 그와 경쟁할 위치에 설 수 있었던 이유가 바로 치수였다는 걸 말이다.


“그럼 같이 계속 다녀야지. 회사를 왜 옮기는 거야?”


울컥하는 마음에 내뱉듯 물었다. 치수는 한동안 말없이 눈만 희번 득이다 입을 열었다.


“세상엔 두 종류의 사람이 있는 것 같아. 히어로와 대중. 어느 사회나 조직을 봐도 그래. 특출 난 소수와 평범한 다수로 나뉘지. 컨설팅은 조직 자체가 히어로 집단이야. 다들 뛰어난 사람들뿐이거든. 


난 한 명의 히어로로서 커리어를 이어가고 싶진 않아. 내가 하고 싶은 건 평범한 다수를 움직여 소수의 인원으론 도저히 할 수 없는 일을 하는 거야. 신전을 짓는 건 수 천명의 노동자지 헤라클레스 같은 히어로가 아니거든. 


여기서 많이 배우긴 했지. 하지만 난 더 큰 조직에서 사람들이 어떻게 움직이는지 알고 싶어. 사람들의 욕망과 그 욕망이 조직을 어떻게 움직이는지 말이야. 


그냥 단순하게 생각했을 뿐이야. 5만 명이 다니는 회사와 500명이 다니는 회사 중 어느 걸 움직이느냐의 차이인거지. 그래서 옮기는 거야. 평범한 다수로 이뤄진 조직을 배우기 위해서 말이야.”


치수다운 생각이었다. 대학 때는 서로 이런 얘기를 많이 했었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그런 교류가 단절됐다. 아마도 세상을 피해 내 안으로 도망쳐버린 나 때문이었을 것이다.


“넌 히어로가 어울려. 원래 생각도 남다르고 너 자신만의 세계가 있잖아. 나중에 나 같은 놈이 널 찾을 거야. 영웅이 필요할 때 너 같은 놈을 데려다 써먹는 거지. 현업에서 컨설턴트 고용하듯 말이야. 


그러니 넌 여기서 계속 네 갈 길을 가. 임정혁 이사나 김한겸 부장이나 같이 일하면 아직도 배울 건 많을 거야. 정주성 전무 같은 빠꼼이 스타일한테도 배울 건 배우고 말이야. IT상무라지만 조직도 제일 크게 가지고 있고 리더십 하나는 정말 인정할만해.


그리고 언젠간 너도 넥스트 스텝을 생각해야 할 때가 올 거야. 어센트에서 계속 성장해하는 것도 방법이고, MBA를 가는 것도 방법이겠지. 어떤 방법을 선택하더라도 지금과 같아선 안돼. 달라져야 해. 그게 살아남는 방법이야. 나도 그래서 떠나는 거야. 여기선 내가 바뀌지 않을 거니까, 날 바꿀 수 있는 환경을 찾아서 떠나는 거지.”


언제까지나 대학 시절 모습 그대로일 줄 알았던 치수가 낯설게만 느껴졌다. 하루아침에 어른이 돼버린 소년처럼 말이다. 어쩌면 어색해야 할 건 거울 속에 비친 거뭇한 수염과 한두 가닥씩 나기 시작한 새치를 애써 무시하던 나 자신이었는지도 모른다. 


제자리에만 머물러 있을 줄 알았는데, 세상은 변해가고 있었고 우리도 세상에 맞춰 변화를 강요받고 있었다. 어차피 변할 거라면 치수처럼 변화의 방향을 이해하고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변화를 주도하는 게 방법인지도 몰랐다. 


나는 끓어오르는 물주전자처럼 이리저리 솟구치는 생각들로 머리가 어질어질해졌다. 치수는 여전히 자신의 길을 찾고 개척하려 바둥거리며 살고 있는데, 난 뭘 하고 있는 걸까? 


중간보고가 끝남과 동시에 치수는 퇴사했다. 나는 에너지 인프라를 도맡아 최종발표까지 마무리 지었다. 에너지 인프라 사업기회에 대해선 많은 현대통신 임원들이 경청했고, 특히 스마트그리드에 큰 관심을 보였다. 


최종보고가 끝나기 전에 이미 결론은 나 있었다. 스마트그리드가 후속 프로젝트로 이어질 아이템이었다. 난 목표대로 후속 프로젝트에 투입 됐지만 기쁨은 잠시 뿐이었다. 머릿속엔 치수가 던져놓은 질문이 여전히 묵직한 울림으로 남아있었다.


내 ‘넥스트 스텝’은 뭘까? 내 커리어, 내 정체성은 뭘 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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