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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성세윤 Jul 10. 2023

33. 스마트그리드 사업전략 (1)

‘당신의 커리어 목표는 무엇입니까? 지금까지 당신의 경험은 그 목표와 어떻게 연관되며 저희 MBA 프로그램은 그 목표를 달성하는 데 어떻게 도움이 되겠습니까?’


정말 단순해 보였다. 몇 시간 손가락을 부지런히 타닥거리면 1000자 에세이 정도는 예사롭게 써질 줄 알았다. 반년은 걸릴 거라 생각했던 GMAT (Graduate Management Admission Test, 미국 경영대학원 입학시험) 목표 점수를 3개월 만에 운 좋게 받은 터라 더욱 그랬다. 


하지만 웬걸. 고민을 시작하자 옛 생각이 난잡스레 떠오르며 헤갈을 쳤다. 연구실 속 세상에 갇혀 세상과 단절된 채 몽상에 빠져 살던 시절이 시작점이었다. 그때 내 자아란 알껍데기로 경계 지어진 정적인 존재였고, 난 그 경계 밖 세상을 관찰하고 탐구하는데 만족했다. 


하지만 찬물을 끼얹듯 정신 차리라던 치수의 한마디가 날 옥죄이던 껍데기에 균열을 만들었다. 그 균열을 뚫고 뻗어 나온 가지들은 나를 둘러싼 주위 환경과 엮이며 그토록 확고하고 뚜렷하던 내 자아의 경계를 흐려놓았다. 


그래서 내 커리어에 대해 생각하면 할수록 혼란스러웠다. 나는 지금껏 누군가의 가족으로, 누군가의 친구로, 또 사회 구성원으로서 어떤 역할을 해왔고 또 앞으로는 어떤 역할을 해야 할지, 그리고 그 역할을 수행하며 어떤 가치를 창출해 낼 것인지. 지금은 답할 수 없는 수많은 질문들이 ‘너는 누구냐’며 날 압박했다. 


내가 누군지는 나 스스로에 대한 질문 만으론 답할 수 없다. 나란 동시에 나를 둘러싼 다른 모든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앞으로 어떻게 세상과 관계를 맺으며 ‘나’ 자신을 만들어 가야 할까? 그게 MBA 에세이 질문의 본질이었다. 


에세이는 지원자가 그 질문에 답할 준비가 되어 있는지 확인하는 동시에 그 질문에 대한 답을 MBA 프로그램을 통해 찾아보라 지시하는 것 같았다. 치수의 퇴사로 시작된 커리어와 자아에 대한 고민은 MBA준비를 하며 더욱 증폭됐다.


그렇게 사춘기 반항아처럼 품고 있던 MBA에 대한 반감을 극복하고 진지하게 MBA를 준비할 무렵 사건이 터졌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하자면 사건은 이미 터져있었고 난 뒤늦게 사건을 인지하게 됐다. 


인텔리전트 시티 프로젝트가 끝나고 한동안 신규 프로젝트 발주는 없었지만 물밑작업은 치열했다. 현대통신 회장실에선 수시로 우리에게 이런저런 자료를 요청했고 나도 틈틈이 시간을 내 자료 작성을 도왔다. 


조금만 더 전략적으로 접근하면 프로젝트 규모를 크게 키울 수 있을 것 같았는데 이주완 대표는 쉽게 나서지 않았다. 이주완 대표 스타일 상 불도저처럼 맥진하진 않을 거라 예상은 했지만 어떻게든 프로젝트 기여도를 높여 MBA 프로그램을 지원받아야 하는 나로선 답답한 노릇이었다. 


그 와중에 쳐들어온 게 정주성 전무였다. 정 전무는 이주완 대표 옆에 딱 달라붙어 IT 관련된 요청이 오면 바로바로 대응하면서 현대통신 회장실과도 직접 관계를 쌓았다. 심지어 최연우 회장과도 두어 차례 독대까지 하면서 접점을 넓혔다. 


결국 정 전무는 인텔리전트 시티 프로젝트의 후속으로 발주된 스마트그리드 (Smart Grid, 지능형 전력망) 인프라 구축 프로젝트를 맡게 됐다. 내가 크게 상관할 바는 아니었다. 나는 제주도 실증단지와 국내 사업 관련 IT인프라 구축을 총괄하는 정주성 전무 프로젝트와는 별도로 현대통신 에스랩에서 투자한 ‘커넥티드 씽즈’라는 사내 벤처의 해외 프로젝트를 진행할 예정이었기 때문이다.


문제를 인지한 건 오승일 차장에게 스마트그리드 관련 내용을 인수인계할 때였다. 인텔리전트 시티 프로젝트를 같이 해서 내용은 뻔히 알 텐데 불편함을 감수하며 인수인계를 요청하는 그를 이해할 수 없었다. 


그는 회의를 시작하자마자 내게 들으란 듯 윤치수 과장이 큰 건 하나 발굴하고 갔다느니 윤치수 과장 없이 프로젝트를 어떻게 하냐느니 하며 내 신경을 건드렸다. 나는 진작부터 귀를 닫아 버리고 한시라도 빨리 인수인계가 끝나기만 기다렸다.


“그래서, MBA 준비는 잘 돼 가요?”


마지막 슬라이드를 넘기고 끝내려는데 오 차장이 기다렸다는 듯 물었다.


“네?”


“MBA요. 지난 프로젝트 때부터 준비하는 것 같던데 잘 돼 가는지 해서요. GMAT 학원은 어디 다녀요?”


“GMAT은 점수받았습니다. 에세이 쓰고 있어요.”


“벌써? 빨리 끝냈네요. MBA 학비가 꽤 쎄죠? 몇 억은 드는 것 같던데. 성 과장님은 집에 돈이 좀 있으신가 봐요. 하긴 아직 결혼도 안 하셨으니까 조금 여유는 있으시겠네요.”


오지랖도 적당히 좀 떨지. 언제부터 나한테 그리 관심이 있었다고 이러는지 정말. 학비야 스폰서를 받으니까 가는 거지 내 나이에 학비로 몇 억을 덜컥 낼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나?


“저도 준비하고 있어요, MBA. 해외는 아니고 국내요. 카이스트.”


“…”


“이제 에세이 쓰고 있는데 이게 생각보다 어렵더라고요. 그래서 성 과장한테 조언 좀 얻으려고요. 저보단 많이 알 거 아네요, 아무래도 먼저 준비하기 시작했으니까.”


젠장, 조언은 무슨. 토익 700점이면 되는 국내 MBA와 GMAT 700점을 넘겨야 하는 해외 MBA를 어떻게 비교하나? 어센트 차장 경력이면 백지로 내도 붙을 텐데 말이다. 정말 도움이 필요해서 나한테 묻는 것도 아닐 테고 도대체 무슨 말을 하려고 이런 얘길 꺼내는 건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래도 참 이번에 운이 좋았지 뭐예요. 정 전무님이 힘써 주신 탓에 어센트에 국내 MBA 프로그램이 생기잖아요.”


“아, 그런가요?”


국내 MBA 프로그램은 뭐지? 처음 듣는 얘기였다.


“사실 저희 IT 쟁이들한테 MBA가 꼭 필요한 건 아니잖아요. 그래서 정 전무님이 따로 프로그램을 만든다고 얘긴하셨는데 정말 생길 줄은 몰랐죠. 말이 MBA 지 보너스나 안식년 개념으로 만드신 것 같아요. 한 1년 쉬다 오라고 말이죠.”


“잘 됐네요.”


“그러니까요. 해외 MBA 프로그램 예산을 돌려서 지원할 건가 봐요. 해외 1명 보낼 돈이면 국내 MBA는 3명은 지원해 줄 수 있으니까.”


고개가 번쩍 들렸다. 오 차장은 알프스 정상에 선 한니발처럼 기세등등한 표정으로 날 깔아보고 있었다. 해외 MBA 프로그램 예산을 돌린다는 게 무슨 말이지? 그럼 해외 MBA 프로그램이 없어진단 얘긴가?


오 차장도 치수를 통해 내가 MBA 스폰서 프로그램에 지원했다는 건 들었을 것이다. 오 차장이라면 이 얘길 하려고 인수인계 핑계를 대고도 남을 인간이었다. 이 청천벽력 같은 얘길 내게 해주는 첫 인간이 되기 위해서 말이다.


좀 더 캐묻고 싶었지만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그의 말이 사실이라면 지금껏 내가 세웠던 모든 계획은 물거품이 돼버린다. 오 차장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날 보며 악의 가득한 조소를 내비쳤다. 그리곤 내가 궁금해하는 게 뭔지 정확히 알면서 정확히 그것만 빼고 말해주기 시작했다.


“IT 조직을 더 키우려고 정 전무님이 복지 프로그램 차원에서 띄운 것 같아요. 해외 MBA야 어차피 다른 전략펌들도 다 지원하는 건데, IT 인력을 타깃으로 한 국내 MBA 프로그램은 전무하니까 차별화가 될 거라 본 거죠. 


파트너 회의 때 얘기해서 예산을 통과시켰다고 하더라고요. 프로그램 구상할 때 저도 의견을 냈으니까 궁금한 거 있으면 물어보세요. 아, 참. 그런데 성 과장님이 관심 있는 건 해외 MBA였죠.”


오 차장은 끝까지 해외 MBA 프로그램 예산에 대한 얘기는 꺼내지 않았다. 그리곤 작정을 한 듯 한 마디를 더해 내 심장에 쐐기를 박았다.


“그리고 보니 윤치수 과장한테 고맙다고 해야겠네요. 스마트그리드 프로젝트를 수주해서 정 전무님 발언에도 힘이 실린 거니까요. 현대통신 뚫겠다는데 MBA 프로그램 하나 지원 못 받겠어요. 해외 MBA처럼 예산이 많이 드는 것도 아닌데요.”


결국 내가 내 목을 죈 꼴인가? 내가 MBA지원을 받으려고 그리 밤을 새운 거였는데 그게 부메랑이 되어 내 뒤통수를 가격할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오 차장과 더 얘기해 봤자 그의 만족감만 충족시켜 줄 뿐이었다. 난 서둘러 대화를 정리하고 임정혁 부장을 찾았다. 상황을 확인해 줄 수 있는 건 그밖에 없었다.


“벌써 들었어요? 맞아요. 그렇게 결정됐어요.”


일말의 희망을 안고 얘기를 꺼냈지만 임 부장은 바로 인정해 버렸다. 다리에 힘이 풀리고 숨이 가빠와 벽에 손을 짚어야 했다. 믿을 수 없었다. 이거 하나 바라고 희망을 부풀려 왔는데 이렇게 허무하게 끝나버리다니. 임 부장은 분위기를 감지했는지 내 어깨에 조심스레 손을 올리며 말했다.


“국내 MBA 프로그램 때문에 해외 프로그램이 없어지는 건 아니에요. 해외 프로그램이 아직 어떻게 될지는 몰라요. 확정된 건 국내 MBA 프로그램을 도입하는 것뿐이에요. 지금은 기다려보는 수밖에 없어요. 이 대표님이 달리 생각하시는 게 있으실 테니까요.”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국내 MBA 프로그램이 도입되는데 해외 프로그램까지 지원할 예산이 남을 리 없었다. 사실 한국 사무소 크기를 생각하면 MBA 프로그램이 있는 것 자체가 기적이었다. 두 프로그램이 모두 지원받을 가능성은 없었다. 


울컥 화가 치밀어 올랐다. 왜 이주완 대표와 임정혁 부장은 정주성 전무와 싸우지 않은 걸까? 프로젝트를 성사시킨 건 전략인데 왜 전략을 위해 소리를 못 내냔 말이다. 


아니면, 내가 이주완 대표와 임정혁 부장을 너무 믿은 건가? 좀 더 살갑게 다가가 내가 원하는 걸 강구했어야 했다. 나는 이런 편 가르기나 줄 서기와는 상관없는 삶을 산다고 믿었는데 언젠가부터 나도 그 얽히고설힌 굴레의 한복판에 들어와 있었다. 가슴에 돌덩이가 하나 들어선 듯 속이 갑갑해졌고 토가 나올 듯 숨이 막혔다.


난 그대로 사무실을 뛰쳐나갔다. 뒤늦게 찾아온 꽃샘추위에 두툼히 부풀어 오르던 벚꽃나무 봉우리가 다시 움츠려들 긴 했지만 내 마음속엔 이미 봄이 찾아왔었다. 어제만 해도 이제 곧 시작될 커넥티드 씽즈와의 프로젝트가 기대됐고, MBA 에세이 토픽을 고민했다. 


여름이 오기 전에 원서 작성을 모두 끝내고 조기전형에 지원할 생각이었는데 이제 뭘 해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정 전무는 도대체 나와 무슨 악연이기에 다시 내 발목을 붙잡는 건가? 스폰서를 받지 못하면 2년 학비와 생활비는 도저히 나 혼자 감당할 수준이 아니었다. 


젠장. 조금만 더 일찍 정신을 차렸더라면. 조금 만 더 빨리 내 갈 길을 찾았더라면. 탓할 건 과거의 나일뿐이었다. 물밀듯 밀려오는 후회에 눈시울이 뜨거워지고 서러움이 울컥 올라왔다. 


하지만 이를 꽉 깨물었다. 눈물은 눈동자 안으로 흘렸고 고함은 목구멍 안으로 삼켜 버렸다. 아직 끝난 건 아니었다. 이 대표가 무언가 달리 생각하는 게 있을 거라 했으니 기다려 봐야 했다. 프로젝트 먼저 잘 마무리하자, 속으로 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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