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성세윤 Jul 13. 2023

35. 스마트그리드 사업전략 (3)

엔리코 부사장은 ‘흠’하며 고개를 한번 갸우뚱하고는 테이블 위에 프린트된 발표자료를 넘겨봤다. 시작부터 불안하더니 계속 진행방향이 어긋났다. 언어 때문이라 생각하고 싶었지만 그게 진짜 이유가 아니란 건 나 스스로 잘 알고 있었다. 준비가 부족했다. 엔리코 부사장은 다시 고개를 들었다. 꿀꺽, 마른침을 넘겼다.


“제가 이 제품을 쓴다면 말이죠. 아마 요금을 제일 많이 절약할 수 있는 게 난방비일 거예요. 그런데 이걸 온도조절장치와 어떻게 연결해서 쓰죠?”


미국 집은 대부분 중앙 냉난방 설비가 설치되어 있고 집안에 온도조절장치를 통해 설비를 제어했다. 따라서 난방비를 절약하려면 온도조절장치와 연결되어 원격으로 설비를 제어하고 온도를 조절하는 기능이 필수였다. 


하지만 온도조절장치는 집집마다 제조사도 틀리고 작동방식도 틀렸다. 수은으로 온도를 설정하는 기계식 장치도 있고 전자식 장치도 있었다. 부사장은 이렇게 제각기인 온도조절장치들이 어떤 표준화된 방법을 통해 커넥티드 씽즈 기기로 교체 가능한지, 아니면 전문 설치기사가 교체를 해야 하는 것인지 알고 싶었다. 


한마디도 할 수 없었다. 제주도 실증단지에서는 처음부터 표준화된 제품으로 구축했고 설치는 프로젝트 참여사였던 한전에서 담당했기 때문에 고민할 필요도 없었다. 사실 난 미국 집에 있는 온도조절장치가 어떻게 생겼는지도 잘 몰랐다.


“그 부분은 파일럿을 진행하며 함께 고민해봐야 하는 부분인 것 같습니다. 기본적으로는 설치기사가 설치해 주는 방향으로 생각하고 있고요.”


“파일럿이요? 바로 상용화하려는 게 아니었나요?”


“그렇긴 하지만 베타버전으로 테스트하는 최소한의 시간은 투자해야겠죠.”


“파일럿 때 제품에 대해 고민을 한다… 만약 파일럿 때 제품 디자인이라도 바꿔야 한다면 출시에 지장은 없을까요? 바꿀 때마다 비용도 만만치 않을 텐데요.”


“그 부분은 염려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제주도 실증단지 프로젝트 때도 수요 절감 최적화를 위해 제품 디자인을 두 차례 바꿨습니다. 현대통신에서 적극적으로 지원해 줬기 때문에 출시에 큰 영향은 없었습니다.”


“그거야 그렇겠죠. 제조사나 공급망이 다 한국에 있을 테니까요. 하지만 여긴 미국입니다. 그리고 설치도 그렇게 쉽게 얘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에요. 이런 제품 하나 설치하자고 집집마다 설치기사를 보내면 인건비가 더 나올 겁니다. 다시 얘기하지만 여긴 미국입니다.”


아차. 미국은 한국이 아니었다. 한국처럼 빠르게 제품을 업데이트하고 시장에 내놓을 순 없었다. 설치도 마찬가지였다. 설치기사 인건비도 비쌌고 땅덩어리가 넓어 집집마다 방문설치를 하려면 시간도 오래 걸렸다. 제주도 실증단지처럼 제한된 지역에서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얘기였다.


“네, 충분히 납득되는 지적이시고 저희도 고민하던 부분입니다. 사실 그런 부분에 대해 에너시스의 지원을 받고 싶습니다. 그게 지금 이렇게 부사장님께 솔루션을 소개하는 이유이기도 하고요.”


겨우 넘기긴 했다. 그 뒤로도 몇 차례 공방이 이어졌고 1시간 미팅은 눈 깜짝할 새 끝나고 말았다. 끝날 무렵 분위기는 화기애애했고, 특히 제주도 실증단지의 운영 데이터를 사고 싶다며 농담을 던지는 인원도 있었다. 그만큼 에너시스에서도 스마트그리드 DR 솔루션에 대해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방증이기도 했다. 


하지만 직접 솔루션을 소개했던 나로서는 실패했다는 걸 직감했다. 에너시스 사, 특히 엔리코 부사장의 질문들에 대한 내 답변은 수박 겉핥기 수준 밖에 되지 않았다. 회의가 끝나고 발길을 돌릴 무렵 엔리코 부사장이 나를 불러 세웠다.


“성세윤 과장님이라고 하셨죠?”


“네.”


“오늘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수고하셨어요. 준비를 많이 하셨더군요.”


“아닙니다. 감사는 제가 해야죠. 오늘 질문해 주신 내용들이 사업을 준비하는데 많은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흠…그래서 말인데요… 미스터 성은 제품 담당은 아니시죠?”


“아, 네. 제품 쪽은 아니고 비즈니스 쪽입니다.”


“전 투자담당 부사장이긴 하지만 원래 제품 개발 담당이었답니다. 제 회사도 두 번 창업했었고요. 이건 제가 할 소린 아니지만 미스터 성이 오늘 회의를 위해 정말 많은 준비를 했다는 건 알 수 있었어요. 하지만 제가 느끼기엔 결정적으로 부족한 게 하나 있었습니다.”


“부족한 점이요?”


“네. 기분 나쁘게 듣진 않았으면 좋겠어요. 이건 투자를 심의하는 벤처캐피탈리스트가 아니라 업계 선배로서 해주는 조언으로 들어주세요. 


오늘 회의에서 부족했던 건 바로 제품에 대한 열정, 패션 (passion)입니다. 미스터 성이 자료나 발표 자체에 대해 정말 많은 고민을 하셨다는 건 느껴졌는데 정작 제일 중요한 제품에 대한 열정이 느껴지지 않았어요. 그래서 미스터 성이 제품 담당은 아니라고 짐작했던 거고요.”


“…”


“제품에 대한 열정이라고 해서 그게 꼭 제품의 설계나 개발 차원에서 얘기드리는 건 아닙니다. 제품에 대한 오너십이라고 할까요? 오너십이 생기면 제품이 자식처럼 느껴진답니다. 부모의 마음으로 진심으로 그 제품이 성공하길 바라게 되고 성공을 위한 모든 걸 고민하게 되죠. 아이디어를 떠올리거나 사업을 기획하는 것 만을 본인 업무라고 생각하지 않는 거예요. 실제 제품이 출시될 때까지 모든 과정을 고민하게 되죠. 


단순히 제품 유스케이스는 무엇이고 어떤 기능을 갖느냐 뿐만 아니라 제품 웹사이트 FAQ 항목에 무엇이냐까지 생각해야 합니다. 전문가가 아니니까, 업무 담당자는 따로 있으니까 신경 쓸 필요 없다는 태도로는 절대 성공적인 제품이 나올 수 없어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엔리코 부사장은 나라는 존재를 나보다 더 속속들이 꿰뚫어 보고 있었다. 프로젝트를 진행하며 스마트그리드라는 토픽 자체에 대한 열정이 생기긴 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프로젝트 관점에서였지 관련된 사업이나 제품에 대한 고민과는 차원이 다른 얘기였다. 


예를 들어 스마트그리드 시장이 성장하면 무선통신 기술에 기반해 수요반응을 비용효율적으로 실시간 관리할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할 뿐, 이에 기반한 사업을 어떻게 추진할지는 또 다른 문제인 것이다. 


궁극적인 목적은 스마트그리드에 대한 이해가 아니라 사업을 기획하고 실행해 실제로 가치를 창출하는 것이어야 했다. 듣기 좋고 이해하기 편한 개념을 설명하는 게 아니라 실제 우리 생활에 영향을 주고 누구나 사용할 만한 실용적인 가치를 만들어 내야 했다. 


무언가 내가 지금까지 바라보던 세상 너머 또 다른 세상이 있는 듯했다. 내 시선은 창가에 비치는 수평선 너머 미지의 세상을 향했고, 엔리코 부사장은 그런 내 옆에 서서 함께 호수를 보며 말했다.


 “한 걸음 떨어져서 보면 전체 그림을 볼 수는 있겠지만 그림을 그리진 못한답니다. 그림을 그리려면, 그림 속으로 들어가야 해요. 영혼이 캔버스 깊숙이까지 들어가서 서로 돋보이겠다며 경합을 벌이는 색들 사이에서 치열하게 부딪히고 살아남아야죠. 


세윤 씨가 똑똑하고 가능성 있는 사람이란 건 알겠어요. 하지만 진정 세상을 바꾸려면 행동해야 합니다. 생각하고 상담역만 해선 안돼요. 목숨을 걸고 전장에 뛰어들어야 해요. 그게 바로 오너십입니다.”


엔리코 부사장은 옛 생각이 떠오르는 듯 석양이 지고 있는 호수를 바라보며 말했다. 북쪽부터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이 호수에 물결을 일으켰고, 물결은 차오르고 부서지며 하얗게 빛났다. 한국에선 볼 수 없는 생경한 풍경이었다.


투자 유치에는 실패했다. 하지만 다행히 에스랩에선 에너시스와 투자유치 미팅을 진행했다는 자체를 성공으로 보는 듯했다. 특히 엔리코 부사장이 지적했던 이슈들은 커넥티드 씽즈 제품팀에 전달됐고 제품 개선에도 많은 도움이 됐다고 한다. 


그 후 커넥티드 씽즈에서는 미국 일반 가정에 설치된 온도조절장치들을 분석해 소비자들이 가장 쉬운 방식으로 교체할 수 있도록 제품을 재디자인했다. 교체 방법에 대한 자료도 만들어 유튜브에 게시하고 교체를 위한 툴키트까지 제품과 함께 제공해 사용자 편의를 최대한 고려했다. 


사업이 크게 성공하진 못했지만 제품은 6개월 후 미국 시장 출시에 성공했다. 커넥티드 씽즈 팀이 제품을 출시할 무렵 여전히 현대통신과 프로젝트를 진행하며 추가적으로 지원했던 건 정주성 전무 팀이었다. 제품 출시에 대한 공적은 응당 그래야 한다는 듯 정 전무에게 돌아갔다.


이젠 별로 화도 안 났다. 국내 MBA 프로그램이 시작되는 건 기정사실화 됐고 이미 대상자 선정을 위한 공지도 어센트 전 사원에게 전달됐다. 어차피 대상자도 정 전무 마음대로 뽑을 텐데 공지는 뭐 하려 할까?


그렇다고 MBA를 포기한 건 아니었다. 스폰서를 못 받아도 학자금 대출을 받으면 어떻게든 갈 수는 있었다.


하지만 무려 2억이었다. 생각만으로도 아틀라스의 형벌 같은 엄청난 무게감이 어깨를 짓눌렀다. 내 평생 한 번도 만져보지 못한 큰돈을 생살 도려내듯 덜컥 내놓아야 했다. 빚더미로 미래를 온통 얼룩지을 판이었다. 


그래도 어쩌겠는가? 이미 마음에 불은 지펴졌는데 말이다.

이전 08화 34. 스마트그리드 사업전략 (2)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