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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성세윤 Jul 17. 2023

37. 핵심고객관리 프로그램 (2)

나는 우선 지사별 KAM프로그램 운영성과를 살펴봤다. LK 사는 2년 전 유럽 주요 법인을 대상으로 일괄적으로 KAM프로그램을 시작했지만 지사 별 성과는 확연히 달랐다.

성과가 단연 두드러진 곳은 영국이었다. 매출 성장률은 평균의 3배를 웃돌았다. 비록 수익률은 평균 수준에 머물렀지만 절대 금액으로 보자면 큰 편이었다. 그다음으로 주목할 만한 곳은 프랑스였다. 영국처럼 매출이 큰 폭으로 상승한 것은 아니지만 매출과 수익이 동시에 성장한다는 점에서 괄목할 만했다. 


이런 결과는 LK사 임원진 판단과도 동일했다. 타깃은 영국과 프랑스로 정해졌다. 남은 건 실제 현장에 가서 그들의 성공비결을 분석하고 재생산 가능한 체계를 만드는 것이었다. 


LK 사 영국 지사는 런던 외곽지역에 위치했다. 히드로 공항에서 내려 1시간 이상 가야 하는 꽤 먼 거리였다. 도심지역에 있을 것이라 예상했던 지사는 허허벌판에 가까운 곳에 있었다. 주변은 거의 목초지나 다름없어 시골에 내려온 것 같은 기분마저 들었다. 나중에 얘기를 들어 보니 원래 런던 중심가에 지사가 있었는데 최근 비용절감을 위해 외곽으로 옮겼다고 한다. 


나는 도착 다음 날 바로 영국 지사장 및 영업팀원들과 인터뷰 스케줄을 잡았다. 스케줄 잡는 건 생각보다 힘들었다. 대부분 영업사원은 고객 미팅을 위해 고객사로 바로 출근하고 미팅이 끝나면 퇴근했다. 지사로 오는 날은 많지 않았다. 내가 인터뷰를 진행하려고 했던 날도 겨우 서너 명 정도만 지사로 나올 예정이었다. 그나마 다행인 건 지사장과 인터뷰를 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영국 신지성 지사장은 차가운 인상에 임원다운 권위가 느껴지는 인물이었다. 그는 전자업계 영업직에서만 30년 넘게 일해온 베테랑으로 KAM 프로그램 도입 1년 전 LK 사에 입사했다. 그는 철저히 지표를 중요시했고 KAM프로그램 또한 그런 철학을 반영해 운영했다. 나는 우선 KAM프로그램에 대한 그의 생각을 들어 보기로 했다.


“KAM 프로그램에서 가장 중요한 게 뭐라고 생각하세요? 지금까지 실적으론 영국이 가장 성공적으로 프로그램을 운영한 곳 중 하나인데요.” 


“KAM  프로그램에서 가장 중요한 건 어카운트 매니저를 어떻게 볼 것인가에요. 정확히 말하자면 어카운트 매니저가 직접 판매를 할 거냐, 아니면 다른 영업사원들의 판매활동을 지원하는 역할만 할 거냐의 차이죠. 


어카운트 매니저가 직접 판매를 하면 본인에게 판매 책임이 생기고 그에 따라 성과급도 받게 돼요. 하지만 영업사원을 지원하는 역할이면 판매에 대한 책임도 없고 성과급도 없죠. 


저는 전자 쪽을 선호하는 편이에요. 사람을 움직이는 건 언제나 돈입니다. 영업실적에 따라 인센티브를 주지 않는 한 추가 매출은 기대하기 어려워요. 생각해 보세요. 판매는 영업사원이 하는 거고 그들은 판매목표를 할당받은 상태예요. 어카운트 매니저가 있건 없건 그 할당 치를 달성해야 되죠. 


물론 어카운트 매니저가 있다면 그 할당 치를 달성하기 쉬워질지는 몰라요. 그래도 할당 치를 초과 달성하는 것, 즉 매출성장을 이끄는 건 쉽지 않아요. 매출성장을 위해서는 어카운트 매니저에게 기대하는 성장만큼의 추가매출을 할당해야 돼요.”


영업실적 관리 프로세스를 보면 그의 말에 공감할 수 있었다.

연초 지난 연도 성과를 기반으로 재무팀에서 매출목표를 세우면 영업팀에서는 그 매출을 영업사원 별로 배분하여 할당량을 정한다. 이때 할당량은 영업사원 개인별 역량과 맡고 있는 지역이나 고객사에 따라 바뀐다. 중요한 고객사를 전담하고 영업 역량이 높을수록 많은 할당량을 배분받고 기본급도 높게 책정된다. 


그렇게 할당량을 배분받으면 할당량 대비 얼마큼 실적을 냈느냐에 따라 성과급을 지급한다. 예를 들어 할당량이 10억 원인데, 12억 원의 실적을 올렸다면 2억의 10%에 해당하는 2천만 원을 성과급으로 지급하는 식이다. 따라서 성과급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것은 초기 할당량을 얼마나 배분받느냐가 된다.


지금까지 LK 사는 큰 문제없이 할당량 배분 정책을 운영했지만 여기에 어카운트 매니저라는 직책이 생기면 문제의 소지가 발생한다. 어카운트 매니저 직책을 만드는 것이 매출성장을 위해서인 만큼 추가 매출목표를 세워야 한다. 


만약 어카운트 매니저에게 매출을 할당하지 않으면, 그 몫은 그대로 영업사원들 부담이 된다. 영업사원들 입장에서는 아직 어카운트 매니저가 어떤 역할을 할지 증명되지 않은 상황에서 할당량만 늘어난 셈이다. 어카운트 매니저 관점에서도 자신에게 매출에 대한 책임과 인센티브가 없다면 얼마나 적극적으로 영업사원을 지원할지 의문이다. 그래서 신 지사장은 어카운트 매니저에게 할당량을 줘야 한다고 얘기한 것이다.


“제가 어카운트 매니저에게 할당량을 주는 이유는 또 있어요. 어카운트 매니저와 영업사원 사이에 경쟁심리를 일으키기 위해서죠. 어카운트 매니저와 영업사원이 모두 할당 치를 받게 되면 둘은 필연적으로 경쟁관계가 돼요. 고객이 주문하고 싶은 제품이 있다면 어카운트 매니저에게 살 수도 있고, 영업사원에게 살 수도 있으니까요. 그래서 서로 경쟁을 하면서 더 적극적으로 영업을 하게 되죠.”


“하지만 그러면 판매창구를 일원화하려는 어카운트 매니저의 취지가 희석되지 않나요? 지나친 경쟁 때문에 어카운트 매니저와 영업사원 사이에 갈등이 생길 것도 같고요.”


“겉으로 보기엔 그럴 수 있죠. 하지만 정책과 프로세스만 잘 세워놓으면 경쟁과 협력이 공존하는 코피티션(co-opetition) 체계가 만들어져요. 


저희는 판매기회 별로 지분을 설정해서 관리하죠. 판매기회를 처음 시스템 상에 등록한 사람이 그 판매기회에 대해 100% 지분을 갖게 돼요. 여기까지는 어카운트 매니저와 영업사원이 철저히 경쟁관계에 있어요. 서로 자신이 먼저 판매기회를 발굴해서 지분을 확보하려고 하죠. 그런데 등록된 판매기회에 입찰을 할 때는 얘기가 달라져요.


어카운트 매니저는 고위급 임원진이나 파트너십 팀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고, 영업사원은 자신이 담당하는 제품에 대한 전문지식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입찰에서 이기기 위해서는 서로 협력해야만 되죠. 


그래서 어카운트 매니저가 입찰에 응할 때는 영업사원에게 도움을 요청하고 지분을 배분해요. 반대로 영업사원이 입찰에 응할 때는 어카운트 매니저에게 지분을 배분하고 입찰에 참여시키고요. 처음에는 경쟁관계로 시작하다 마지막엔 협력하는 거예요. 


항상 끝맺음을 협력으로 하기 때문에 경쟁을 하면서도 좋은 관계를 유지할 수 있죠. 간혹 두 개 판매기회가 하나로 합쳐지거나 할 때 문제가 발생하기도 하지만 그럴 때는 저나 영업그룹장이 직접 중재한답니다.”


신지성 지사장과 인터뷰 후 나는 추가로 어카운트 매니저와 영업사원들을 몇몇 더 인터뷰했다. 확실히 그들 사이 묘한 긴장감이 흐른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어카운트 매니저들은 파트너십 관점에서 비전과 협력 관계를 확실히 정의해야 영업기회가 생긴다며 자신들의 역할을 강조했다. 마치 자신들이 영업사원 관리자인 것처럼 말이다. 


반면, 영업사원들은 자신들이 요구사항이나 차별화 소구점을 만들어 주지 못하면 사업기회가 생겨도 결국 경쟁사에게 뺏기길 수밖에 없다고 자신감 있게 말했다. 그들 발언엔 영업하는데 다른 누군가의 도움은 필요 없다는 자신감이 묻어 있었다. 


어카운트 매니저와 영업사원 모두 서로 도움 되는 부분이 있다는 걸 부정하진 않았지만 실제 매출을 일으키는 추체는 자신이라 굳게 믿었고, 그 믿음에서 나무 기둥 같은 굳건한 자부심이 생장하는 걸 느낄 수 있었다. 


두 기둥이 서로를 향해 가지치고 팽팽히 전선을 형성하며 긴장감을 유발했다. 그런 긴장감이 최근 매출성장을 이끈 원동력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신 지사장이 다져놓은 업무 프로세스와 정책에 따라 쉴 새 없이 경쟁하고 또 협력하면서 말이다.


다음 행선지는 프랑스였다. 프랑스 지사는 파리 도심부에 자리 잡고 있었다. 큰 건물은 아니었지만 작은 호수와 정원도 있어 나름 운치 있어 보였다. 프랑스 일정은 생각보다 쉽게 풀렸다. 지사 쪽에서 인터뷰 스케줄을 포함한 전체적인 일정을 조율해 준 덕에 나는 그 일정에 따라 움직이기만 하면 됐다. 


첫 인터뷰는 프랑스 유재필 지사장이었다. 유 지사장은 신 지사장과는 정반대 이미지 였다. 친근한 인상의 그는 LK 사가 첫 직장이었고 20년 넘게 LK 사의 다양한 부서를 돌며 지사장 자리까지 올라온 인물이었다. 


그가 프랑스 지사장이 된 것은 4년 전이었고 그 후 실적은 꾸준히 성장했다. 하지만 영국처럼 KAM프로그램을 시작한 후 성장세가 확연히 좋아진 것은 아니어서 성장이 KAM 프로그램에 의한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나는 우선 KAM 프로그램의 효과에 대해 물어보기로 했다.


“KAM 프로그램을 도입하고 효과는 어땠나요? 프랑스는 프로그램을 도입 전에도 성장세에 있어서 꼭 KAM 때문에 성장했다고 보기는 어려울 것 같은데요.”


나는 간단히 인사를 나누고 바로 질문을 던졌다.


“글쎄요. 오히려 반대로 얘기해야 할 것 같은데요.” 유 지사장은 의미심장하게 웃으며 말했다.


“반대요?”


“네. 사실 저는 지사장에 부임한 첫날부터 KAM프로그램을 도입했어요. 그러니까 2년 전에 시작한 게 아니라 4년 전부터 시작한 거죠. 물론 공식적으로 KAM이라는 용어를 쓴 건 아니지만요. 제가 영업팀을 운영했던 방침 자체가 KAM 프로그램에 기반한 거였거든요.”


“조금 더 자세히 설명해 주실 수 있나요?”


“과장님은 조직 운영하는데 가장 중요한 게 뭐라고 생각하세요?”


유 지사장은 오히려 나에게 되물었다.


“여러 가지 있겠지만 크게 보면 어떤 역할을 하느냐는 관점에서 조직 구조가 중요하겠고, 역할을 어떻게 수행하느냐는 관점에서 성과급 같은 인사정책이 중요하겠죠.”


나는 시큐테크 사 영업전략 프로젝트를 떠올리며 차분히 말했다.


“네. 컨설턴트 분이어서 그런지 조리 있게 말씀 잘하시네요.”


유 지사장은 웃으며 말했다. 비꼬는 말투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말을 잘한다는 얘기가 왠지 마음에 걸렸다. 말은 잘한다라면 말만 잘한다는 건가, 행동은 없이? 지속적으로 나를 괴롭혀오던 내 진로에 대한 해답을 아직 못 찾아서, 컨설팅이란 업이 내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 고민 중인 탓에 예민해졌다.


수십 년 경력에 수백 명의 사원을 거느리는 지사장 앞에서 스스로 느끼는 자격지심이었는지도 모른다. 실로 불과 몇 분이 채 지나지 않아 나는 그의 경험과 성찰의 깊이에 압도되지 않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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