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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성세윤 Jul 18. 2023

38. 핵심고객관리 프로그램 (3)

“제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건 컬처(culture)에요. 지사장인 저부터 시작해서 말단 사원까지 개개인이 사고하고 행동하는 방식, 추구하는 목표, 뭐 이런 것들이 다 모여 컬처가 되겠죠. 다 추상적인 것들이라 어디서 비롯된다고 딱히 설명은 못하겠어요. 하지만 이게 가장 중요하단 건 단언할 수 있죠. 


제가 여기서 저희 직원들과 만들어가는 컬처 중심에는 저희 제품이 있어요. 이 제품들을 보시죠.” 


유 지사장은 내 앞에 스마트 폰 액세서리 몇 개를 늘어놓았다.


“별 것 없어 보이시죠. 사실 저희처럼 자체 브랜드도 없는 제조사 제품은 별 것 아니라고 생각할 수 있어요. 이런 저가 이어폰 제품이 얼마나 차별화가 되겠어요. 


하지만 이런 제품에도 고유의 특성을 부여할 수 있어요. 이쪽에 보시는 액세서리는 모두 오렌지 색과 곡면 형태를 두드러지게 나타낸 제품이죠. 고객 사 디자인 철학을 그대로 반영해서 만든 거예요. 저희 어카운트 매니저가 고객 사 디자인 팀과 본사 쪽 디자인 팀을 직접 연결해서 같이 팀을 꾸려 6개월 동안 작업 했죠. 비용은 저희 지사에서 부담했고요. 


실제로 계약을 성사시킬 수 있을지 확신이 없는 상태에서 6개월 넘게 모험을 했다고 할 수 있죠. 그렇게 할 수 있는 건 저희가 남들보다 더 나은 제품을 만들 수 있다는 확신이 있기 때문이에요. 그런 확신이 없다면 저희는 정말 동일한 제품에 고객사 로고만 찍어 파는 하청업체가 되는 거죠. 


그래서 저는 매일 아침 제 자신에게 질문을 해요. 우리 제품은 특별한가? 우리 제품은 무엇이 다른가? 만약 이 질문에 답 할 수 없다면 그때는 제가 퇴사할 때가 된 거겠죠.” 


유 지사장 말을 들으니 본사에서 들었던 얘기가 생각났다. 본사 제품팀에서는 프랑스 지사에서 주문제작에 대한 요구가 너무 많이 들어온다고 불평했다. 지사장이 보여준 제품처럼 맞춤형 제품을 만들기 위해 비용이 많이 들어가기 때문이다. 주문제작 때문에 디자인은 말할 것도 없고 부품 공급선이나 생산라인도 별도로 운영해야 했다. 


최대한 표준화된 제품으로 규모의 경제를 달성하며 경쟁력을 얻는 LK 사로서는 회사 전략과 반대방향으로 가는 것이다. 하지만 유 지사장 생각이 잘못된 것이라 단정할 수는 없었다. 명백히 프랑스는 가장 큰 수익을 내고 있는 지사였기 때문이다.


“물론 저희 제품 자체가 본질적으로 차별화하기 어렵다는 점은 알아요. 하지만 그래서 더더욱 차별화를 위해 노력해야 하는 거죠. 저는 매주 월요일 아침에 타운홀 미팅을 합니다. 이때 한 팀씩 돌아가며 새로 나온 제품의 장점에 대해 얘기하죠. 단순히 제품 스펙을 얘기하는 게 아니라 본인들이 직접 제품을 사용해 보고 좋았던 점을 얘기하는 거예요. 그러면서 제품에 대한 이해도 깊어지고, 어떻게 보면 ‘정’이 생기는 거죠. 


생각해 보세요. 자신이 좋아하지도 않는 제품을 남에게 팔 수 있을까요? 본인 스스로가 설득이 되지 않으면 다른 누구도 설득할 수 없어요.”


유재필 지사장 말은 깊은 여운을 남겼다. 이어폰 하나를 들고 아이 같은 미소와 눈빛을 반짝이는 그를 보면 제품에 대한 진심 어린 열정과 사랑이 느껴졌다. 


나는 내가 그린 장표 한 장에 이런 애정을 가질 수 있을까? 가로맞춤, 세로맞춤 같은 디테일에 집착하는 게 아니라, 내가 주장하고픈 메시지와 그 메시지를 통해 클라이언트를 돕겠다는 진심을 담아 장표를 만들었었는지 문득 스스로에게 묻게 됐다. 


유 지사장은 그의 말을 경청하는 내가 재미있는지 온화하게 웃으며 한참 동안 나의 얼굴을 들여다보기만 했다. 그리고 내가 이런저런 생각 끝에 겨우 몽상에서 깨어날 때쯤 다시 말을 이었다.


“10년 전쯤 일거예요. 그때 막 영업부장직을 맡았죠. 당시엔 영업이 뭔지도 잘 몰랐어요. 뭐든 가져다 팔기만 하면 되는 건지 알았죠. 


그래서 처음 팀을 꾸릴 때 무조건 역량을 보고 뽑았어요. 언변 좋고 붙임성 좋은 사람이라면 사실 뭘 가져도 줘도 잘 팔 수 있기 때문에 역량만 좋으면 된다고 생각했죠. 영업맨으로 이름 꽤나 알려진 사람들은 업계를 불문하고 무조건 만나 봤어요. 그리고 괜찮다 싶으면 바로 오퍼를 줬죠. 


그렇게 팀을 꾸리고 나니 매출이 3배까지 성장했어요. 그때만 해도 그게 제 경력상 가장 치명적인 실수였다는 걸 몰랐죠.”


“그렇게 성장했는데 실수라뇨?”


“어느 순간 매출이 정체되는가 싶더니 이내 하락하기 시작한 거예요. 매출이 오르지 않으면 성과급 받기도 어려워지니 영업사원도 하나둘씩 떠나기 시작했죠. 악순환의 연속이었어요. 제가 그렇게 공들여 채용했던 영업사원들도 떠나는 건 한 순간이더군요. 


유능한 영업사원이 빠지고 나니 매출은 더욱 빠르게 하락했고, 그러면서 더 많은 영업사원들이 떠났죠. 그렇게 1년 정도 지나고 나니까 남은 사람은 원래 저희 팀에 있던 사람들뿐이었어요. 그때 정신을 바짝 차리고 실패한 이유를 찾기 시작했죠. 의외로 원인은 쉽게 찾을 수 있더군요.”


“이유가 뭐였죠?”


“이유는 그 유능하다 자랑하던 영업사원들이었어요. 지금 생각해 보면 그들 목적은 오로지 판매였어요. 제품을 팔기 위해선 어떤 짓이라도 했죠. 


‘어떤 짓’ 중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아마 할인이었을 거예요. 나중에 보니 새로 영입된 영업사원 대부분이 기존 사원에 비해 1.5배에서 많게는 3배까지 할인을 해줬더라고요. 그러니까 매출은 오를 수밖에 없었습니다. 한 껏 매출을 올리면서 성과급도 엄청나게 챙겼죠. 


하지만 이런 식의 판매가 결국 독이 되어 돌아왔어요. 근본적인 원가 경쟁력 없이 할인만 해주다 보니까 한계가 생긴 거예요. 게다가 저희가 큰 폭으로 할인을 하니까 경쟁사도 하나둘씩 할인을 해주기 시작했죠. 


결국 가격 전쟁이 벌어져 저희도, 경쟁사도 모두 지는 싸움을 하게 된 거예요. 저희 스스로 제품 가치를 떨어뜨린 거죠.”


“하지만 영업사원이 왜 그렇게 하죠? 그러면 결국 그들도 손해 아닌가요?”


“저도 처음에는 그렇게 생각했죠. 하지만 아니었어요. 영업사원은 그렇게 하고 다른 회사로 옮기면 그만이에요. 심하게 비유하자면 그들은 암적인 존재였죠. 


한 회사에서 할인을 통해 실적을 올리고 성과급도 챙길 수 있을 만큼 챙기다 실적을 올리기 힘들어지면 다른 회사로 옮기는 거죠. 그 회사 제품 가치를 바닥까지 끌어내리면서 파괴하고 다음 목표물을 찾아 움직이는 거예요. 실제로 저희 회사에서 나갔던 사람도 다른 회사로 잘 들 이직하더군요. 저희 회사에 있으면서 괄목할만한 실적을 올린 건 사실이니까요. 


그때 깨달았죠. 우리 가치는 우리 스스로 만드는 거란 사실을요. 그건 정말 회사를 사랑하고, 제품을 사랑하지 않으면 할 수 없는 거예요.


제가 4년 전 처음 여기 지사장으로 부임했을 때 가장 먼저 한 것이 저희 회사와 제품을 ‘사랑’하는 사람을 찾는 것이었어요. 한 10명쯤 쓸만한 직원을 고를 수 있었죠. 


저는 그들에게 ‘카테고리 매니저’(category manager)라는 직책을 줬어요. 저희는 매년 연초에 전략 제품을 선정하고 영업 목표를 세우는데 카테고리 매니저는 전략 제품이 저희 제품 포트폴리오에 어떻게 포지셔닝되고 사용될 수 있는지를 고객관점에서 고민하는 역할을 했습니다. 


헌데 시간이 지나다 보니 이들은 점점 특정 카테고리 제품이 아니라 저희 회사와 제품 전체를 팔 수 있게 됐어요. 부족한 인력 때문에 매번 카테고리가 바뀌고 업무영역을 넓히다 보니 자연스레 그렇게 됐죠. 


그러더니 그들은 이제 특정 제품이 아니라 회사사랑과 제품사랑을 설파하게 되더군요. 특정 제품을 담당하는 영업사원들과는 차별화된 역량을 갖추게 된 거죠. KAM프로그램을 도입한 후론 이 인원들이 자연스럽게 어카운트 매니저가 됐습니다.


그래서 저희 지사 어카운트 매니저 역할은 단순히 어카운트를 담당하는 인력은 아니에요. 제품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회사 컬처를 만들어가는 사람들이죠. 항상 제품 가치에 대해 고민하고 향상할 수 있도록 스스로 실천하고 연구하면서 컬처를 만드는 역할을 하는 거예요. 


컬처가 만들어지면 조직 체질 자체가 바뀌게 됩니다. 보통 컬처가 없는 조직은 사람이 조직을 이끌죠. 그래서 사람이 바뀌면 조직도 바뀌어요. 하지만 컬처가 생기면 사람이 그 컬처에 동화되죠. 새로운 직원이 들어와도 회사 분위기에 따라 가장 먼저 저희 제품의 ‘가치’에 대해 생각하게 되는 거예요.”


“하지만 실질적으로 어카운트 매니저와 영업사원들 간 협업은 어떻게 이루어지죠? 예를 들면, 영국에서는 어카운트 매니저에게도 할당량을 부여해서 직접 영업을 하게 하던데요.”


나는 이야기가 너무 이론적으로만 흘러가는 것 같아 분위기를 환기시키기 위해 물었다.


“저희는 어카운트 매니저에게 따로 할당량을 주지는 않아요. 영업사원과 할당량을 공유하는 체제죠. 영업사원이 할당량을 달성해 성과급을 받으면, 그 성과급의 10%가 해당 어카운트 매니저의 성과급으로 지급돼요.”


“그렇게 되면 불화가 생길 수 있지 않나요? 사실 영업사원 관점에서 본다면 자신의 성과급을 뺏긴다고 생각할 수 도 있을 것 같은데요.”


“전혀요. 저희 어카운트 매니저는 어카운트 매니저역할뿐만 아니라 성 과장님처럼 컨설턴트 역할도 하고 있어요. 얘기했듯 카테고리 매니저 역할도 겸하기 때문에 누구보다 저희 제품을 잘 알고 있는 사람들이라 고객사에 어떻게 오퍼링을 제안해야 할지 알고 있답니다. 


어떻게 보면 영업사원에게는 멘토 같은 존재예요. 항상 고객사에 제품의 어떤 점을 부각하고 경쟁사와 차별화할지 조언해 주죠. 재직기간이 오래된 만큼 본사 제품팀이나 마케팅팀에 의뢰할 일이 생기면 적극적으로 지원해 주고요. 그래서 어카운트 매니저와 영업사원 사이에 자연스럽게 협업관계가 형성됩니다. 어카운트 매니저들 역량은 영업사원이 누구보다 잘 알고 있거든요. 


새로 들어오는 영업사원도 몇 번 같이 일을 해보면 그들이 얼마나 도움이 될 수 있는지 쉽게 알 수 있죠. 어떻게 보면 영업사원이 성과급을 받을 수 있게 해주는 게 어카운트 매니저 역할인 거예요. 그래서 성과급을 뺏긴다고 생각하는 건 어불성설이죠.” 


유 지사장과 인터뷰가 끝나고 예정된 스케줄대로 어카운트 매니저와 영업사원 인터뷰를 진행했다. 전반적으로 유 지사장이 견고한 성을 쌓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의 말대로 전 직원이 서로 협력하며 LK 사 제품 가치를 높이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이 보였다. 그리고 뭐라 정의하긴 어려웠지만 컬처라는 게 이 모두를 유기적으로 연결시켜주고 있었다. 


신지성 영국 지사장과 유재필 프랑스 지사장과의 만남은 조직과 공동체라는 새로운 고민거리를 던졌다. 그 둘은 정반대 스타일로 정반대 방법으로 조직을 운영했다. 영국 지사는 시계 속 톱니바퀴처럼 빈틈없이 짜인 프로세스와 정책을 통해 KAM 프로그램을 운영했고, 프랑스 지사는 수년에 걸쳐 다져진 컬처를 통해 유기적으로 KAM프로그램을 운영했다. 


하지만 궁극적으로 보면 둘 다 같은 모델이었는지도 모른다. 영국은 신 지사장이 다져놓은 프로세스와 정책 내에서 경쟁과 협력을 통한 영국지사 특유의 긴장감 있는 컬처가 형성되었고, 유 지사장 또한 차별화 중심의 컬처를 계승하기 위한 프로세스와 정책을 운영했다. 매주 월요일 실행하던 타운홀 미팅이나 어카운트 매니저가 영업사원과 성과급을 공유하는 정책이 그런 것이었다. 


결과적으로 보면 프로세스, 정책, 문화, 이 모든 것이 조합되어 개개인이 자신의 역량을 최대한 끌어내며 서로 협력할 수 있는 체계가 만들어졌다. 신 지사장과 유 지사장은 그런 ‘유기적 공동체’를 만들어낸 장본인이자 그들과 함께 전장의 선봉에 선 지휘관이었다.


연이은 인터뷰와 이동 덕분에 귀국하는 비행기를 탈 때쯤 녹초가 됐다. 하지만 쉽게 잠을 청할 수 없었다. 담요를 어깨까지 끌어올린 채 뒤척이면서도 신지성 지사장과 유재필 지사장의 모습이 떠올랐다. 


전열을 갖추고 전투에 임하는 장수의 모습이었다. 그들은 스스로 전장에 뛰어들어 아군을 독려하며 용맹히 적군을 향해 돌진하고 있었다. 바람을 가르며 눈을 부릅뜨고 전방을 주시하는 그들 두 눈에는 보였을 것이다. 그들이 꿈꾸는 미지의 세계가 말이다. 


그 세계가 어떤 세계인지 나로서는 알 수 없었지만 그들의 눈빛에서 품어져 나오는 기개와 확신으로 그게 그들 만의 ‘멋진 신세계’라는 건 짐작할 수 있었다. 


문득 치수가 생각났다. 치수도 저렇게 전장에 뛰어들기 위해 퇴사를 했던 걸까? 자신 만의 전투를 위해, 자신 만의 신세계를 개척하기 위해서 말이다. 


그렇다. 나는 아직 전장에 뛰어든 적이 없었다. 여태껏 무공을 연마했을 뿐이었다. 전장에 뛰어들어 맨손으로 전투를 치른다는 건 또 다른 차원의 얘기였다. 나도 이제 전장에 뛰어들어 나 자신만의 전투를 시작할 타이밍이 된 걸까? 엔리코 부사장이 얘기했던 것처럼 전장 속으로 들어가야 했다.


하지만 내 전장은 어디일까? 미국일까, 아니면 한국일까? 난 어떤 전쟁을 벌여야 하는 걸까?


학자금 대출을 받으면서까지 MBA를 가는 건 의미 있을까? 그러려면 졸업 후 해외취업이라도 해야 했다. 하지만 영주권도 없는 내가 MBA를 간다고 한 들 취업에 성공하리란 보장은 없었다. 아니, 취업에 성공한다 해도 진급이나 이직을 생각하면 오히려 한국보다 못할 수도 있었다.


그럼 지금이라도 아무 일 없던 것처럼 정 전무에게 깍듯이 인사를 건네고 특진 프로그램에 지원하고 싶다고 해야 할까? 어센트에 계속 있으려면 적어도 한 번은 정 전무와 부딪히고 그를 통과해야 했다. 쩍 벌린 그의 가랑이 사이를 기어서건, 있는 힘껏 밀쳐 쓰러뜨려서건 말이다. 내가 과연 그를 통과할 수 있을까?


수많은 생각이 오고 가는 사이 내가 던졌던 모든 질문들은 하나의 교차점으로 수렴됐다.


‘당신의 커리어 목표는 무엇입니까?’


그렇다. 난 여전히 이 단순한 질문의 답을 찾지 못했다. 내가 MBA에 가고 싶던 이유는 단순히 연봉을 높일 수 있어서라 생각했는데 높은 연봉을 받을 수 있는 특진이란 옵션이 생겼음에도 난 여전히 고민하고 있었다. 


그 옵션이란 게 내 인생 최악의 빌런 정주성 전무를 상대해야 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래서 답답했다. 나 스스로 납득할 만한 고민의 근인을 찾을 수 없으니 말이다. 


10시간 남짓 비행기를 타며 뜬 눈으로 출장을 마쳤다. 착륙 후 전화기를 켜자 쓸데없는 생각 좀 그만하라는 듯 이주완 대표의 문자 메시지가 요란한 진동과 함께 도착했다.


“프로젝트 마무리는 잘 되셨죠? 실력발휘를 해주셔야 할 프로젝트가 발주됐습니다. 도착하면 연락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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