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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성세윤 Jul 16. 2023

36. 핵심고객관리 프로그램 (1)

학교는 총 다섯 군데 지원했다. 하버드 HBS, 컬럼비아 GSB, 뉴욕대 스턴, 버클리 하스 그리고 가장 가고 싶었던 스탠퍼드 GSB까지였다. 현실적으로 내 스펙이라면 백업으로 10위권 밖 학교를 추가 지원하는 게 맞았지만 스폰서도 못 받게 된 상황에서 어중간한 학교에 지원하고 싶진 않았다. 그래서 꼭 가고 싶은 학교에만 지원했다. 합격한다면 정말 갈 거냐는 그다음에 고민할 문제였다.


원서에 필요한 추천서를 받기 위해 임정혁 부장에게 부탁을 하는 와중에 내가 여전히 MBA에 지원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이주완 대표가 날 불렀다. 해외 MBA 프로그램에 아직 예산 배정이 안돼 내년엔 지원받을 수 없을 것 같다고 했다. 이미 알고 있는 얘기였던 터라 놀랄 것도 실망할 것도 없었다. 귀가 솔깃 해진 건 그 후에 이 대표가 한 말 때문이었다. 


이 대표는 한국 사무소에 특진 프로그램이 만들어질 거라 했다. 우수 인력을 선발해 타 펌으로 이직하거나 MBA에 가면서 업무 공백이 생기는 걸 막기 위해 고안한 프로그램이었다. 차, 과장급 인력 중 대상자를 선발해 부장으로 특진시키고 MBA 졸업생과 동등 수준의 연봉을 보장해 주는 프로그램이었다. 


프로그램이 확정되면 MBA가 없는 인력에게도 MBA 졸업생만큼 대우해 줄 수 있는 근거가 생긴다. MBA를 운운하며 전략 인력을 위한 프로그램처럼 포장됐지만 사실상 수혜자는 IT 부서 인력들이었다. 프로그램을 통해 IT부서 인력들에게도 MBA 졸업생만큼 연봉을 챙겨줄 수 있게 되니 말이다. 이것도 정 전무가 추진한 프로그램은 아닐까 하는 합리적 의심이 들었고, 역시나 맞았다. 


하지만 나 역시 수혜자가 될 수 있는 건 사실이었다. 게다가 현대통신 프로젝트로 인해 전략에서 뿐만 아니라 어센트 전사적으로 실력은 인정받은 상황이라 대상자로 뽑힐 여지도 충분했다. 누군가 의도적으로 방해만 놓지 않는다면 말이다.


내친김에 옵션을 평가해 봤다. 우선 ‘베이스라인’ 시나리오부터 분석했다. 학자금 대출을 받고 MBA에 간다는 가정 하에 말이다. MBA를 간다면 학비와 생활비를 합쳐 2억을 투자해야 한다. 지금 내가 받는 연봉은 대략 5천이니 2년간 기회비용까지 합치면 총투자는 3억이 된다. 


MBA를 졸업하면 연봉은 1억이고, 안 간다면 7천 정도 받게 된다. 향후 연봉 인상률이 동일하다 가정하면 MBA에 투자한 비용을 회수하기 위해 10년을 일해야 한다. 한숨 밖에 안 나왔다.


기적적으로 해외 MBA 프로그램에 예산이 배정된다면 ‘낙관적’ 시나리오였다. 별도 비용 없이 MBA라는 타이틀을 얻게 된다. 졸업 후 몇 년간 회사에 몸이 묶이긴 하지만 기꺼이 감내할 수 있는 조건이었다.


그럼 특진 프로그램에 뽑히면 어떻게 될까? 우선 MBA에 가는 게 무의미해진다. 애초에 MBA를 고려한 계기였던 연봉 문제가 말끔히 해소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업무 공백 없이 부장급 인력과 신업사원들 사이에서 허리 역할을 하며 어센트 내 입지를 확고히 다질 수 있었다. MBA란 타이틀은 없지만 오히려 어센트 내에서 성장하며 컨설팅 ‘파트너’ 타이틀을 상대적으로 빨리 얻을 수 있었다. 장기적으론 오히려 특진이 유리할 수 있는 것이다.


잠깐. 그렇다면 내가 왜 MBA에 가야 하는 거지?


결론은 자명했다. 난 MBA를 준비할게 아니라 지금이라도 정주성 전무에게 살갑게 다가서야 하는 거였다. 특진 프로그램에 지원하고 싶다고 말이다. 치수였다면 아주 자연스레 그리 했을 것이다. 


이런 생각을 하게 되는 나 자신이 우스웠다. 정 전무라면 치를 떨었던 나인데, 꼭 한 번은 멋지게 복수해 주겠다고 마음먹었던 나인데 이제와 줄이라도 한번 대볼 생각을 하다니 말이다.


흉심이 출렁출렁 일렁였다. 내가 혐오하고 등졌던 인간관계에 대한 모든 부정적 편견은 인간관계를 지속할수록 어쩔 수 없이 그렇게 돼버리는 법칙으로 뒤 바뀌어 인식됐다. 부정하고 거부할게 아니라 기꺼이 받아들이고 터득해야 하는 말이다. 내 처지도 분간 못하고 어디 배부른 생각을 하고 있는가!


생각이 복잡해지는 건 당연했다. 어센트는 올해 한차례 폭풍을 맞고 난파된 상태였다. 총괄대표는 박수를 받으며 반년 전 퇴장했지만 여전히 차기 대표는 미정이었다. 차기 대표로 취임하려던 김승일 대표는 리베이트 비리에 대한 소문이 돈 후 자진 퇴임했고 이연희 대표는 한 외국계 기업의 한국 대표로 자리를 옮겼다. 


김승일 대표와 이연희 대표 휘하에 있던 임원 중 절반 이상이 퇴사했다. 실무진들도 하나둘씩 빠져나가며 올해와 내년 사이 많은 인력들이 퇴사할 것으로 예상됐다. 어찌 보면 이주완 대표가 총괄대표가 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지만 그는 쉽게 나서지 않았다. 그에게 의지 없는 건지 아니면 무언가 그를 가로막고 있는 게 있는 건지는 알 수 없었다. 


그 와중에 정주성 전무는 김승일 대표와 이연희 대표 쪽 인력을 흡수하며 거침없이 세를 넓혔다. 그는 어센트 한국 사무소에서 가장 많은 매출을 올렸고 조만간 대표급으로 승진할 예정이었다. 


항간에는 그가 김승일 대표 리베이트 건을 폭로해 몰아냈다는 소문도 돌았다. 갑작스러운 김 대표의 퇴임에도 당황하는 기색 하나 없이 세를 확장하는 정 전무의 모습을 보면 충분히 신빙성 있는 얘기였다. 


도대체 그의 욕망은 어디까지 인지, 혹시나 이주완 대표에게까지 어떤 해코지를 하진 않을지 불안해졌다. 김승일 대표와 이연희 대표가 물러난 지금 정 전무 앞에 있는 건 이주완 대표뿐이니 말이다. 


어쩌면 이 대표가 총괄대표에 선뜻 나서지 않는 건 정 전무와 마찰을 피하기 위해서 일 수도 있었다. 나는 한없이 무거워지는 마음을 이끌고 다음 프로젝트에 들어갔다. 


LK 사는 유럽 유통업체를 상대로 다양한 프라이빗 라벨(private label) 제품을 판매하는 제조사다. 프라이빗 라벨 제품이란 이마트, 하이마트와 같은 유통사가 자사 브랜드로 제품을 판매할 수 있도록 제조된 제품이다.


LK 사는 마우스, 키보드 등 PC 주변기기를 중심으로 사업을 시작했다가 이제 휴대폰 액세서리에서 사무용품까지 제품군을 넓혔다. 고객 또한 전자제품 전문 유통점만 상대하다 이제 통신사와 일반 유통점으로 확장했다. 


하지만 주먹구구식 사업확장에 한계를 느끼던 LK 사는 사업체제를 정비하기로 했다. 그래서 시작한 게 핵심고객관리 (key account management, KAM) 프로그램이었다. 예전에는 제품 별 영업 팀에서 개별 판매활동을 했는데, 여기에 어카운트 매니저라는 직책을 만들어 고객을 관리하기 시작했다. 

어카운트 매니저(account manager)는 고객 구매부서 및 카테고리 담당 직원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며 제품 별 영업 팀에게 판매기회를 만들어 주는 역할을 했다. LK 사 관점에서는 어카운트 매니저를 통한 체계적 고객관리가 가능했고, 고객 관점에서는 구매창구가 일원화되어 편리했다. 선도 기업에서는 이미 도입되어 효과를 톡톡히 보고 있어 LK 사 또한 기대치가 컸다. 


하지만 성과는 기대치보다 낮았다. 매출 성장세는 이전에 비해 약간 향상된 정도에 불과했고 수익성은 오히려 악화됐다. 임원진 의견도 극명하게 갈렸다. 일부 임원은 KAM 프로그램을 확장할수록 수익성만 악화될 것이라 우려했다. 어카운트 매니저가 일반 영업사원보다 고급인력이라 프로그램 유지 비용이 높았기 때문이다. 


반면 일부 임원은 KAM프로그램의 효과가 나타나려면 지속적으로 투자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아직은 어카운트 매니저가 고객과 관계를 쌓으며 사업기반을 닦는 단계고 프로그램이 정착되면 그때부터 성장이 가속화될 거라 판단했다.


결국 의견은 프로그램을 유지하자는 쪽으로 모아 졌지만, 프로그램 효율화의 필요성에는 모든 임원이 동의했다. LK 사는 어센트에 KAM 프로그램 운영방안에 대한 베스트 프랙티스(best practice)를 정의해 달라고 의뢰했다.


프로젝트 팀은 소규모로 꾸며졌다. 허수민 차장이 프로젝트를 리딩하고 나를 포함해 주니어 3명이 투입됐다. 허수민 차장은 팀을 전반적인 KAM 프로그램 전략을 도출하는 프로그램 운영전략 모듈과 LK사 지사 중 가장 효과적으로 운영되는 프로그램을 벤치마킹하는 베스트 프랙티스 모듈로 나눴다. 


인텔리전트 시티 프로젝트를 하며 신뢰가 쌓여선지 허 차장은 별다른 간섭 없이 내가 단독으로 베스트 프랙티스 모듈을 진행하도록 배려했다. 어쩌면 바람이나 쐬고 오라는 취지였는지도 모르겠다. 벤치마킹을 하려면 해외출장이 필수였으니 말이다. 


허 차장은 이미 내가 해외 MBA 프로그램에 지원했고 국내 프로그램이 도입되며 스폰서십이 무산됐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어디서 들었는지 특진 프로그램도 있으니 한번 도전해 보란 말도 보탰다. 사실 허 차장도 특진 대상일 텐데 고마울 따름이었다.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다 MBA에 가는 게 꼭 돈 때문만은 아닐 거라고도 조언했다. 아직 젊을 때 해외에서 경험을 쌓는 게 나쁘진 않을 거라고 하며 MBA를 마치고 해외취업에 성공한 몇몇 선배 얘기도 해줬다. 모두들 어렵게 한 선택이었지만 충분히 보상받으며 남 부럽지 않은 커리어를 키우고 있다고, 나 역시 단순히 비용 때문에 쉽게 포기하진 말라고 말이다.


“그래도 돈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네요.”


난 긴 대화 끝에 한숨과 함께 내뱉듯 말했다. 그리고 남동생 바라보듯 날 보고 있던 그녀와 눈을 마주쳤다.


“그나저나 왜 그렇게 생각하세요? MBA 가는 게 좋을 것 같다고요.”


“색다르잖아요. MBA도 그렇고, 해외취업도 그렇고요. 세윤 씨는 그런 게 어울려요.”


나도 모르게 볼이 화끈 달아올라 고개를 돌렸다. 색다른 커리어가 어울린다는 말이 왜 이리 설레게 들리는지. 그녀 말대로 MBA에 대해 조금 더 고민이 필요하다는 생각은 들었다. 


관점을 넓혀 금전적인 측면뿐만 아니라 커리어 전반에 대해 고민해봐야 했다. 생각이 극명히 한쪽으로 치우치고 있었는데 허 차장 덕분에 간신히 균형을 잡았다. 일단은 정신 차리고 프로젝트에 집중하는 게 내가 그녀에게 해줄 수 있는 유일한 보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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