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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성세윤 Jul 08. 2023

31. 인텔리전트 시티 인프라 작전 (5)

“어떤 프로젝트를 찾았다는 거죠?”


서 이사가 물었다.


“어센트 미국팀에서 진행한 프로젝트입니다. 콜로라도에서 진행한 ‘스마트그리드’ 실증단지 프로젝트예요.”


스마트그리드?


감이 안 좋았다. 프로젝트 명칭에서부터 심상치 않았다. 불안이 현실이 되고 있었다. 벙커에 틀어박혀 있는 줄 알았던 치수는 로켓포를 만들고 있었다. 그리고 그 뒤를 이은 치수의 설명에 스마트그리드가 얼마나 큰 사업기회인지 감을 잡을 수 있었다.

스마트그리드는 전력사업에 정보통신기술을 접목한 지능형 전력망이었다. 전력산업은 보통 발전, 송배전, 그리고 판매 이렇게 3개 영역으로 구분됐다. 여기에 정보통신기술이 접목되면 각 영역별로 혁신적인 기술과 사업모델이 가능했다.


먼저 발전영역을 살펴보자. 대다수 국가에서는 석탄, 가스, 기름 등 화석연료를 기반으로 한 화력발전소 혹은 원자력발전소를 주축으로 전력을 생산한다. 이 두 발전소는 비교적 저렴한 비용으로 대규모 전력을 생산하기에 적합하다. 


하지만 환경오염 문제가 있다. 그래서 최근 태양력, 풍력, 조력 등 신재생에너지 생산을 늘리는 추세다. 하지만 신재생에너지는 비용대비 생산량이 적고 생산성도 변동이 심하다. 태양력은 말 그대로 태양이 떠있을 때만 전력 생산이 가능하고 풍력도 마찬가지로 바람이 불 때만 전력 생산이 가능하다. 


여기서 신재생에너지는 한계에 직면한다. 전기는 생산 즉시 소비해야 한다. 그리고 실시간 소비량이 생산량보다 많아지게 되면 바로 과부하가 걸린다. 소비량이 임계치를 넘어서면 블랙아웃(blackout) 현상이 나타나 전력망에 연결된 모든 소비처에 전력공급이 끊긴다. 따라서 전체 발전량 중 재생에너지 비율이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공급이 불안정해져 블랙아웃 발생 확률이 높아진다.


이런 리스크를 줄이는 게 바로 정보통신기술이다. 실시간으로 전력생산량과 소비량을 측정하고 관제센터에 전달해 위험을 최소화할 수 있다. 생산량과 소비량을 실시간으로 비교해 블랙아웃 현상에 대한 위험이 높아지면 유휴 발전소를 가동하는 등 별도 조치를 취할 수 있다. 따라서 스마트그리드를 활용하면 신재생에너지 등 새로운 발전수단을 안정적으로 확산할 수 있다.


다음은 송배전 영역을 살펴보자. 송전과 배전은 전력을 공급하기 위해 수송하는 과정이다. 송전은 발전소에서 변전소까지의 수송이고 배전은 변전소에서 소비처까지의 수송과정을 뜻한다. 수송은 전력망을 통해 실행되는데 기존 전력망은 단방향으로 전력을 공급하는 용도로만 사용된다. 


하지만 스마트그리드 기술이 접목되면 실시간 전력정보를 바탕으로 양방향 제어가 가능해진다. 실시간으로 전력 수요를 파악하여 전체 공급량을 조정하고 수송 경로까지 제어할 수 있는 것이다. 


예를 들어 전력 수요가 낮아지면 화력 발전소의 발전량을 줄여 화석연료 소비를 낮추고 신재생에너지 비중을 높이는 식의 제어를 할 수 있다. 또한 소규모 발전 사업자나 가정단위에서 생산되는 태양력 에너지 등을 전체 전력망에 연결하여 판매하는 분산 발전도 가능해진다. 


마지막 판매 영역에서는 소비자가 전력 소비를 효율적으로 제어할 수 있는 다양한 서비스가 생긴다. 스마트 미터(smart meter)를 통해 실시간으로 전력 사용량을 확인할 수 있으며 가정 내 스마트 플러그(smart plug)를 설치하면 기기별 전력 사용량까지 제어할 수 있다. 


이 같은 정보를 실시간 요금제와 연동하면 전력 사업자와 소비자가 모두 윈윈 할 수 있다. 전력사업자는 전력 수요가 높은 저녁시간대에 요금을 올려 전력 사용량이 높은 에어컨이나 세탁기 등의 사용을 억제하는 소비 행위를 유도할 수 있다. 소비자는 실시간 요금정보를 바탕으로 전력 소비를 줄여 요금을 낮출 수 있다. 


요금이 낮아지면 전력회사 매출이 줄어 손해일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전력수요를 실시간으로 살펴보면 저녁 시간대나 한여름에 피크 수요(peak demand)가 발생한다. 한데 전력은 저장이 될 수 없기 때문에 항상 총생산량을 이 피크 수요에 맞춰야 한다. 따라서 피크 수요를 줄이면 발전설비에 대한 투자를 낮추고 기존 설비를 효율적으로 운영할 수 있다.


치수의 설명이 끝나자 서 이사 얼굴엔 보름달 같은 함박미소가 떠올랐다. 오승일 차장은 한껏 달뜬 목소리로 이런저런 질문을 던져댔고 허수민 차장도 관심이 가는 듯 눈을 반짝였다. 


이걸로 결론은 났다. 이렇게 큰 굴지의 프로젝트라면 이거 하나 하기에도 조규식 차장 팀은 손이 부족할 것이다. 어쩌면 별도 팀을 셋업해야 할 수도 있었다. 


헌데 시나리오는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현대통신에서 만약 이 아이템을 주요 사업으로 추진한다면, 어센트 역시 카운터 파트 팀을 꾸려야 했다. 그리고 누군가는 그 팀을 이끌어야 했다. 새로운 팀 리더가 필요했고, 우리 중 누군가가 그 자리를 꿰차고 들어갈 수 있었다. 


맙소사! 윤치수! 이게 노림수였나? 전기차를 뺏아간 걸로 부족해 에너지까지 뺏아가려고? ‘스마트그리드’라는 허울 좋은 명칭을 붙여놨지만 실상 스마트그리드는 내가 그려놓은 전력 사업기회들을 하나로 묶은 개념에 불과했다. 신재생 발전을 포함한 분산형 발전영역과 스마트미터링과 스마트홈 개념을 적용한 실시간 에너지 플랫폼의 조합이 결국 치수가 설명한 ‘스마트그리드’의 핵심 아닌가?


그럼에도 ‘스마트그리드’란 개념으로 화두를 던진 게 치수라는 건 부정할 수 없었다. 지금껏 서 이사가 보여준 치수에 대한 편력을 생각하면 당장 서 이사가 치수에게 스마트그리드를 담당 아이템으로 추진해 보라 해도 이상할 게 없었다. 


심화병에 걸린 듯 가슴이 갑갑하고 숨이 콱 막혀왔다. 머리가 새부리에 쪼이듯 지끈거리며 관자놀이께 핏대가 불끈 솟았다. 분명 분석도 내가 더 많이 했고, 스토리에 대한 고민도 내가 더 깊게 했는데 도대체 뭐가 부족했던 걸까? 


치수가 한 거라곤 내가 분석했던 내용에 5% 정도의 정리와 포장을 더한 것뿐이었다. 그럼에도 마지막 발표를 하면서 주도권은 완벽히 치수에게 넘어가버렸다. 심지어 나조차도 그가 에너지와 교통 모듈을 모두 이끌고 있다는 생각을 피할 수 없었다. 앞으로 프로젝트는 어떻게 되는 걸까? 이대로 치수가 에너지 모듈까지 담당하게 되는 걸까?


회의가 끝난 후 치수가 카페로 나를 불렀다. 자신의 압승을 확인이라도 하려는 듯 말이다. 짜증은 났지만 무슨 말을 할지 들어봐야 했다. 그의 생각을 알아야 나도 작전을 짜건 뭘 하건 할 거 아닌가? 카페 한쪽에 자리를 잡은 치수가 고개를 들었을 때 어릿한 시선이 느껴졌다. 치수는 웃음기를 싹 뺀 굳은 면으로 날 보고 있었다.


“성세윤. 도대체 뭐야? 우린 같은 편이야. 내용 미리 공유 못해준 건 미안한데 그럼 나중에 따로 얘길 했어야지. 나도 어제오늘 새로 알아낸 내용이 있어서 정리가 안 됐는데 그렇게 대놓고 챌린지를 하면 어떡해?”


“뭐?”


적반하장도 유분수지. 같은 편이란 얘기가 지금 나오나? 칼을 뽑아 든 게 너지 어떻게 나야! 그때 뭐가 걸렸는진 모르겠지만 무언가 울컥하며 무작스레 업화가 폭발했다.


“야! 공격은 네가 먼저 했잖아. 전기차 인프라는 장표에서 빼버리고, 스마트홈은 스마트그리드로 덮어버리고. 그런데 나한테 뭐라고?”


“허, 참. 너 진짜 당황스럽다. 그게 어떻게 공격이야? 도와준 거잖아. 술까지 마셔가면서 정보 캐다 주니까 무슨 소리야?”


“말은 바로 하자, 윤치수. 도와주다니?”


“도와준 거지. 스마트그리드로 밀어붙이면 후속 프로젝트까지 계속 연결될 수 있다는 거 몰라? 전기자동차는 장기 과제라 들고 있어 봐야 도움 될 건 하나도 없어. 지금껏 봤으면 그 정도는 알 거 아니야?”


“…”


“그리고 전기자동차는 어차피 없어질 아이템이라 힘 빼지 말라고 한 거야.”


“뭐가 없어진단 말이야? 아깐 이현민 과장 쪽에서 담당할 거라며.”


“오승일 차장이 현대솔루션 출신인 거 알지? 오 차장이 알아봤는데 이번 프로젝트 끝나면 이현민 과장 팀은 현대솔루션 쪽으로 전배 될 거래. 전기차는 현대통신이 아니라 현대솔루션 아이템이라고. 현대솔루션엔 인하우스 컨설팅 조직이 있어서 절대 컨설팅 외주 안 줘. 후속 프로젝트로 우리가 참여할 가능성은 제로야.”


아! 이제야 치수의 큰 그림이 보였다. 교통 쪽은 어차피 후속 프로젝트에 대한 가능성이 없으니 에너지 쪽을 키워서 맡아보겠다는 얘기였다. 내가 한 달간 밤새가며 기반 다 닦아놨는데 이제 와서 숟가락 하나 얹어보겠다고 말이야.


“그럼 결국 에너지, 그러니까 스마트그리드만 살아남을 거란 얘기야?”


“그래, 스마트그리드가 답이라고. 전에 에스랩에 친구 있다 그랬잖아. 거기서 1년 이상 보고 있던 아이템인데 우리가 했던 콜로라도 프로젝트도 어제 그 녀석에게 들었어. 그래서 아침에 미국 담당자 하고 바로 콘퍼런스 콜도 한 거고 말이야.”


젠장. 불안한 예상은 빗나가는 법이 없었다. 치수가 노린 건 스마트그리드였다. 밑밥은 다 깔렸으니 이젠 자기가 발굴한 프로젝트니 자기가 하겠다고 말하겠지. 


하나 부정할 순 없었다. 무뚝뚝한 이현민 과장과 술자리까지 같이 하며 캐낸 정보, 오승일 차장의 비호감을 감내하며 알게 된 정보,  에스랩에 있는 친구를 닦달해 얻어낸 정보가 답을 찾는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그런 건 내가 못하는 부분이기도 했다. 생각하고 분석하는 건 자신 있었지만 술자리에서 유들 거리며 정보를 캐묻는다는 건 상상도 할 수 없었다. 어딘가 내 업무역량에 큰 구멍이 있는 것 같았다. 이건 어떻게든 메꿔야 하는 구멍일까? 이주완 대표, 임정혁 이사, 김한겸 부장을 겪으며 업무에 필요한 역량은 다 체득했다고 생각했는데 치수는 생각지도 못했던 방향에서 내 치부를 드러냈다. 


그랬다. 치수는 확실히 인간관계와 커뮤니케이션이라는 내가 가지고 있지 않은 역량이 있었고, 그 역량으로 스마트그리드라는 핵심 아이템을 발굴했다. 젠장. 나를 이렇게 사지로 몰아넣고 옴짝달싹 못하게 해 버리다니. 


완벽한 패배였다. 속은 폭발하듯 끓어올랐고 가쁜 숨은 멈춰지질 않았다. 지는 건 한 순간이었다. 그리고 문득 생각이 들었다. 어차피 질 거라면, 그냥 속 시원히 인정해 버리는 것도 방법이겠지.


“그럼, 잘 됐네. 기왕 그렇게 된 거 교통은 버리고 에너지를 네가 해. 스마트그리드 찾아낸 것도 사실상 너니까 가져가서 마음대로 하라고!”


“야, 너 말하는 게 삐딱하다. 뭘 마음대로 하라는 거야. 엄연히 정해진 역할과 책임이 있는데. 에너지는 너 담당이잖아.”


그러니까 내 담당인데, 왜 네가 자꾸 끼어드는 거냐고? 대놓고 아이템을 달라고 하진 못하겠다는 거냐?


“담당이 무슨 상관이야. 그거야 바꾸면 그만인 거지. 그렇게 관심이 있는 거면 네가 하라고.”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난 못해.”


“뭘, 못한다는 거야. 난 괜찮으니까 가져가서 하라고.”


“그게 아니라 정말 못한다고.”


“왜?”


“나 퇴사야. 다음 달에 나가.”


순간 머리를 한대 얻어맞은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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