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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성세윤 Jul 07. 2023

30. 인텔리전트 시티 인프라 작전 (4)

다음 날, 전체 덱이 취합됐고 내부발표와 리뷰가 진행될 예정이었다. 우선 서 이사, 오 차장, 치수가 돌아가며 담당 내용을 발표하고 발표가 끝난 후에 피드백을 주고받는 시간을 갖기로 했다. 나는 아침 일찍 출근해 수없이 시계를 쳐다봤지만 치수는 리뷰 시간 바로 전에서야 술 냄새를 풍기며 출근했다. 수정된 자료를 나와 같이 볼 시간은 당연히 없었다. 뭐야, 이건. 일부러 늦게 출근한 건가?


전체 발표 내용이 팀원 전원 사이 공유되는 건 처음이었다. 서 이사와 오 차장이 먼저 발표를 끝냈다. 크게 흥미를 끄는 내용은 없었지만 논쟁의 소지가 될 만한 내용도 없었다. 무난한 수준이었다. 


다음은 치수가 발표할 차례였다. 에너지로 발표를 시작한 치수는 에너지 분야의 산업구조부터 가치사슬 분석과 주요 트렌드에 대한 설명을 이어갔다. 우려와는 달리 내가 작업했던 내용에서 크게 달라진 건 없었다. 자신이 발표하기 편하게 헤드 메시지를 바꾼 정도였다. 그런데 마지막 사업기회 장표로 넘어갔을 때 나는 고개를 갸우뚱할 수밖에 없었다.

뭐지? 전기차 내용이 왜 빠졌지? 그것도 나와는 한마디 상의도 없이? 이해할 수 없었다. 분명 스마트홈과 전기차 인프라가 가장 중요한 사업기회라고 강조했는데 전기차 내용을 통째로 날려버렸다. 


수정한다고 한 게 제일 중요한 사업기회를 날리겠다는 거였나? 그래서 나에겐 안 보여줄 심산으로 일찍 퇴근해 버리고 늦게 출근한 건가? 당장 물어보고 싶었지만 일단 발표를 처음부터 끝까지 다 듣고 논의를 시작하자는 분위기여서 기다려보기로 했다. 윤치수, 도대체 무슨 짓을 꾸미고 있는 거야! 


곧이어 에너지 분야 발표가 마무리 됐고 교통 쪽 발표가 이어졌다. 치수는 교통 인프라를 육상, 항공, 해상으로 나누고 도로나 철로 같은 기반 시설부터 복합 환승센터나 통합 관제 센터까지 다양한 사업기회를 언급했다. 교통은 내가 상관할 바 아니었다. 치수의 발표를 듣는 와중에도 내 머릿속엔 왜 전기차 충전 인프라 사업기회를 날렸을지에 대한 생각 밖에 없었다. 그때 치수의 앙칼진 목소리가 내 뒤통수를 강타했다.


“교통 인프라 분야 핵심 사업은, 전기차입니다.”


눈이 번뜩 뜨였다. 프로젝터 화면을 보니 에너지 사업기회에서 빠졌던 전기차 충전 인프라가 약간의 수정을 거쳐 교통 사업기회에 들어와 있었다. 그것도 핵심 사업기회로.

젠장, 교통 인프라에서 충전소를 다룬다고? 충전소는 내 사업 아이템이었다. 눈이 뒤집힐 것 같았다. 야! 충전소를 왜 교통에서 다뤄? 소리 없는 외침이 내 머릿속을 맴돌았고 분기탱천한 심장은 뜨겁게 요동쳤다. 


나는 숨을 한번 멈췄다 서서히 내쉬었다. 머리를 식혀야 했다. 흥분한 채 입을 열면 전에 오승일 차장과 다퉜던 것과 똑같은 상황이 발생할 뿐이었다. 


교통에서 전기차와 충전소를 다루는 게 틀린 어프로치는 아니었다. 쉽게 생각하면 전기차와 충전소가 자동차와 주유소인데 그야말로 교통의 핵심 인프라 아니던가! 나는 치수와 나 사이 지식의 간극이 내가 다루던 에너지에 국한된 거라 생각했는데 오판이었다. 치수가 다루던 ‘교통’이야말로 우리 지식의 간극을 명확히 드러냈다. 


마음이 급해졌다. 충전소를 내 아이템으로 다시 가져오려면 근거와 명분이 필요했다. 귀를 열어 치수 발표를 들었고 머리 한쪽으론 근거와 명분을 고민하며 반격 포인트를 물색했다. 몇 가지 아이디어가 떠오르긴 했지만 쉽게 정리되질 않았다. 생각은 길 잃은 양 떼처럼 방황했다. 견고한 로직으로 울타리를 쳐야 했다. 


어느덧 치수의 발표는 끝났고 피드백 세션이 시작됐다. 내 심장박동은 서서히 정상으로 돌아오고 있었다. 반격 스토리도 어느 정도 준비됐다. 나는 출정 전 칼날을 가는 전사 마냥 논리를 다듬고 또 다듬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치수의 전기차 장표가 다시 시선에 들어왔다. 다들 전기차가 주요 사업기회라는데 이견은 없었다. 오 차장이 평소처럼 별 의미 없는 코멘트를 날리는 동안 나는 조용히 검을 뽑아 치수를 겨눴다.


“근데 다시 생각해봐야 할 것 같아요. 전기차가 성장동력인 건 맞는데 지금 프레임대로 가면 사업기회를 제대로 얘기하기 힘듭니다.”


시선은 나에게 집중됐다. 서 이사는 더 얘기해 보라는 듯 눈짓을 건넸다.


“빌딩블록을 전기차 솔루션, 충전 인프라, 그리고 커넥티드카 이렇게 세 개로 나눴는데 이게 맞는 분류인지 모르겠어요. 전기차 솔루션은 전기차 산업에 중요한 요소이긴 하지만 현대통신에서 쉽게 진출할 수 있는 사업분야는 아닙니다. 


하만 (Harman)이나 보쉬 (Bosch) 같은 쟁쟁한 회사들 사이에서 경쟁력 있는 솔루션을 제공하려면 엄청난  투자가 필요할 거예요. 언급은 하되 그레이 아웃 시켜 논의 범위에서 제외시키는 게 맞을 것 같습니다. 


전기차 인프라는 큰 사업기회이긴 하지만 아직 단독 사업영역으로 보기엔 시기상조인 면이 있습니다. 전기차 보급율도 낮은 데다 충전 관련 표준도 마련돼 있지 않거든요. 


반면 커넥티드카 서비스는 기존 사업과 영역이 너무 겹칩니다. 내비게이션이나 뮤직 스트리밍은 현대통신에서 이미 제공하는 서비스고, OBD (On-Board Diagnostics, 운행기록 자기 진단 장치)를 활용한 차량관리는 사업분야로 보기엔 규모가 너무 작아요. 현대통신 사업부에서 마음만 먹으면 언제라도 자체 출시할 수 있는 서비스입니다.”


그동안 가슴에 쌓여있던 울분을 토해내듯 마음껏 칼을 휘둘렀다. 사정을 봐주거나 배려할 필요는 없었다. 먼저 내 장표에 칼질을 한 건 치수였다. 난 방어를 위해 반격할 뿐이었다. 일단 쓰나미를 몰아쳐 판을 뒤흔드는 데는 성공했다. 치수는 입을 굳게 다물었고 서 이사는 눈썹을 치켜올리며 고개를 까딱거렸다.


“그러니까 성 과장 얘기는 전기차 부분을 전부 빼자는 건가요? 전기차는 현대통신에서 관심 있게 보는 분야 중 하나예요. 뺄 순 없어요.”


서 이사가 먼저 입을 열었다. 정확히 내가 원하던 질문이었다.


“사업성과 실현 가능성을 보자면 그나마 전기차 인프라가 고려해 볼 만한 사업인 것 같습니다. 특히 충전소 사업이 그렇죠. 그런데 충전소 사업은 교통 인프라 관점뿐만 아니라 전력 인프라 관점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경쟁력을 갖추기 위해선 급속 충전이나 전기 가격에 따라 충전 시간을 조정하는 기술 같은 걸 적용해야 하는데, 이게 다 전력 기술이거든요. 


그래서 충전소는 차라리 전력 인프라에서 충전 관련 기술과 함께 검토하면 어떨지 싶습니다. 전기차 시장이 아직 본격적인 성장기에 들어선 건 아니니 전력 쪽에서 역량을 키운 후에 사업화하는 거죠. 전기차 솔루션 부분은 언급만 하는 정도로 끝내면 될 것 같고, 커넥티드카 서비스 쪽은 이미 통신 서비스 차원에서 하고 있는 사업이니 통신에서 검토하고요.”


십 년 묵은 체증이 내려간다는 게 이런 말이었다. 전기차 솔루션 사업기회는 없애버리고, 커넥티드카 서비스는 통신으로 넘기고, 전기차 충전 인프라를 내가 가져오면 됐다. 치수의 전기차 장표 따위는 갈가리 찢어 능지처참에 처하는 거다.


“전기차 토픽을 나눠서 다루자는 거네요. 윤 과장 생각은 어때요?”


서 이사가 치수를 향해 고개를 돌리며 물었다. 젠장, 말은 내가 했는데 여기서 왜 치수 생각을 물어보는 걸까? 달리 반박할 만한 말도 없을 테긴 하지만 말이다. 치수는 잠시 뜸을 들이다 입을 열었다.


“성 과장님 얘기대로 전기차 시장이 커지려면 시간이 필요한 건 사실입니다. 그래서 전기차 사업기회들을 다운플레이하자는 데는 동의합니다. 당장 대규모로 투자해서 성과를 낼 수 있는 분야는 아니거든요.”


격하게 저항할 거라 생각했는데 치수의 표정에선 그 어떤 동요의 전조도 찾을 수 없었다. 반격의 실마리를 못 찾아 그냥 수긍하는 건가? 아닐 거다. 승부에 무심한 척 해도 지금껏 치수가 드러내고 자신의 패배를 인정하는 건 못 봤다. 승부욕이 강해서라기보다 약점 보이는 걸 죽도록 싫어했기 때문이다. 


또랑또랑한 목소리와 흔들림 없는 치수의 시선에서 패장의 무력감은 느껴지지 않았다. 어디엔가 기습을 준비하는 적군이 매복해 있었다. 어디서 치고 들어올지 경계를 늦춰선 안 됐다.


“그런데 다운플레이를 한다는 게 단기 성과에 대한 기대치를 낮추자는 거지 사업기회 자체를 다운플레이 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전기차가 미래 산업에서 중요한 축을 차지할 거고 관련 시장이 지속적으로 성장할 거란 건 피할 수 없는 사실이니까요.”


치수는 ‘피할 수 없는’을 강조했다. 매복해 있던 적들이 참호에서 슬며시 머리를 내밀었다. 숨어 있는 게 소총수인지 기관총수인지는 조금 더 두고 봐야 했다.


“어제 이현민 과장하고 술 마시면서 얘기를 좀 해봤는데요.”


아, 이현민 과장! 어제 치수가 계속 메신저를 하던 게 이현민 과장이었나 보다. 이현민 과장은 치수의 카운터 파트로 현대통신 B2B사업부에서 교통을 포함한 공공 인프라 분야를 맡고 있었다. 치수는 어제 한참 메신저를 하다 저녁 시간에 후다닥 짐을 챙겨 나갔었다. 그게 이 과장과의 술 약속 때문이었다니. 그는 이 과장과 무슨 얘기를 했을 까?


“어제 듣기론… 현대통신에서 내년쯤 전기차 관련 사업부를 만들 예정이랍니다. 담당은 이현민 과장 쪽 유현진 상무고요. 그래서 전기차 관련된 사업기회는 이현민 과장 쪽으로 몰아서 얘기해 주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그래야 저희도 이현민 과장 쪽에서 확실히 지원을 받을 수 있을 테니까요.”


쌨다. 이현민 과장은 카운터파트라 해도 평소 말이 없고 내부자료만 전달해 주는 정도라 크게 신경 쓰지는 않았는데, 그가 저런 핵심정보를 갖고 있을 줄이야. 아니, 그것보다는 그런 정보를 캐낼 생각을 한 치수가 더 짜증 났다. 그래도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다.


“충전 인프라 사업기회는 에너지 쪽 조규식 차장 팀에서 보고 있습니다. PLC (Power Line Communication, 전력선통신)를 활용한 충전 기술도 검토 중이라고 하고요.”


조규식 차장은 에너지를 담당하는 내 카운터파트 였다. 조규식 차장인 충전 인프라에 대해 직접적으로 언급한 적은 없지만, 치수 쪽으로 기우는 분위기에 제동을 거는 게 우선이었다.


“아, 그래요? 두 팀이 같이 보고 있다면 더더욱 저희가 교통정리를 해줘야겠네요.”


서 이사는 줄다리기 심판처럼 양 옆에 있던 나와 치수를 번갈아 보며 말했다. 힘겨루기는 이미 시작됐다.


“내용 상으로 보면 교통이건 에너지건 상관없을 것 같긴 합니다. 그래서 조금 현실적으로 접근하면 어떨지 싶은데요.”


치수가 먼저 치고 나왔다. 소강상태에서 잠시 숨을 돌리려고 했는데 치수는 쉴 틈을 줄 생각은 없는 것 같았다.


“현실적 접근이라는 게 무슨 뜻이죠?”


“교통을 담당하는 이현민 과장 쪽이나 에너지를 담당하는 조규식 차장 쪽이나 어차피 목적은 임원들이 관심 끌만한 토픽 발굴해서 지원 좀 받아 보겠다는 거 아니겠습니까? 전기차는 워낙 요즘 핫한 토픽이니까 양쪽에서 관심을 보이는 거고요. 


헌데 어차피 양쪽 다 한꺼번에 여러 토픽을 추진할 순 없습니다. 조직논리 상 한쪽에 힘이 너무 집중되면 더 세게 견제받을 테니까요. 그래서 스마트홈을 주력 아이템으로 잡고 있는 조규식 차장 쪽에서 전기차 사업까지 동시에 추진하긴 어렵지 않을까 싶습니다.”


끄응. 나도 모르게 앓는 소리가 나왔다. 사업기회가 있고 실행 역량이 있으면 하는 거지 조직논리가 여기서 왜 나와야 할까? 짜증은 났지만 이쯤 되니 그냥 치수에게 전기차 사업은 떼어 주고 하나씩 맡아하는 것도 방법일 수 있겠단 생각이 들었다. 


단기적으로 성과를 낼 수 있는 건 스마트홈 쪽이니 치수가 전기차 사업을 가지고 떨어져 나간다면 나로선 오히려 잘 된 일 아닐까? 치수와 상하도 불명확한 관계로 엮여 있느니 차라리 따로 일하는 게 나았다.


“그렇군요. 조직논리로 보면 교통에서 전기차를 다루는 게 맞겠네요. 이렇게 정리하면 될까요, 성 과장님?”


서 이사는 동의를 강요하듯 물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자포자기한 건 아니었다. 스마트홈을 지키기 위해선 이게 최선이었다.


“그리고 스마트홈 쪽 말인데요…”


다시 치수였다. 스마트홈 얘길 왜 꺼내는 거지? 스마트홈은 내 영역이다. 설마 이것까지 건드리려는 건 아니겠지? 서 이사는 계속 얘기해 보라는 듯 치수를 보며 고개를 까딱거렸다.


“스마트홈도 좀 키워보면 어떨지 싶은데요. 어제 어센트 데이터베이스에서 재밌는 프로젝트를 하나 찾아서요. 오늘 오전에 본사에 들어가서 컨퍼런스콜을 했었는데 검토해 볼 만한 것 같습니다.”


“아침에 늦는다고 전화 주셨던 건 말씀이시죠? 무슨 내용이에요? 안 그래도 궁금했는데.”


아! 아침에 늦게 온 건 어제 술을 마셔서가 아니라 컨퍼런스콜을 했기 때문이었구나. 수정된 내용을 나와 공유하기 싫어 그냥 일찍 퇴근하고 늦게 출근한 거라 생각했는데 내 생각이 짧았다. 이현민 과장과 술 약속을 했던 건 전기차 관련 사업기회를 확인하기 위해서였고, 오전에 늦게 출근한 건 데이터베이스 찾은 프로젝트를 더 알아보기 위해서였다. 


도대체 어떤 프로젝트를 찾았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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