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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성세윤 Jul 06. 2023

29. 인텔리전트 시티 인프라 작전 (3)

꺼림칙한 기분으로 시작된 제안서였지만 결과는 좋았다. 어센트 미국 사무소와 유럽 사무소에서 에너지와 환경 전문가들을 투입해 현황을 정리한 자료가 큰 효과를 봤다. 모두 어센트 소속답게 최신 기술 트렌드는 빠삭히 꿰고 있어 통신 기술과 접목되는 분야에 대한 인사이트도 풍부했다. 


현대통신 임원들은 기존 작업들과는 확연히 다른 제안서라며 흥미를 보였다. 서승관 이사가 제안발표를 마치자 해외 신사업 본부장 주인창 전무는 현대통신 인원들이 산업에 대한 견문을 넓힐 수 있도록 본 프로젝트 때도 해외 전문 인력들을 대거 투입해 달라고 요청했다. 좋은 사업기회가 발굴된다면 본인 팀에서 직접 추진해 볼 수도 있다고 덧붙이면서 말이다. 다음 날 우리는 프로젝트 수주 통보를 받았다.


프로젝트 수주에 성공하자 제안서 작업 때 생겼던 긴장감은 어느 정도 풀어졌다. 오 차장과는 치수가 만든 술자리에서 화해했다. 어색함이 완전히 사라진 건 아니었지만 같이 일하기 불편할 수준은 아니었다. 


오히려 내 경계의 창날은 그날 사건의 유일한 수혜자였던 치수를 향했다. 그날 일을 생각하면 아직 장이 꼬여왔다. 치수는 아무 일 없다는 웃으며 날 대했지만 그럴수록 경계의 눈초리를 거둘 수 없었다. 내게 어떤 수작을 걸어왔는지 그 스스로가 더 잘 알고 있을 테니까 말이다.

산업을 초점으로 잡은 프로젝트 범위는 방대했다. 에너지 같으면 유류, 가스, 전력 등 다양한 에너지 산업 별로 탐사와 생산에서 처리설비, 저장, 운송, 판매에 이르기까지 전체 가치사슬을 검토해야 했다. 


찾아야 하는 사업 기회란 예를 들어 가스운송 파이프라인에 통신기술을 접목시킨 파이프 모니터링 센서 사업 같은 걸 고려할 수 있었다. 실시간 모니터링을 위해선 센서뿐만 아니라 데이터 통신 서비스도 필요했기 때문에 현대통신에 사업기회가 됐다. 


우린 우선 현대통신이 기존에 진행했던 프로젝트를 하나씩 맡아 분석하기로 했다. 분석 결과를 취합한 후 산업별 담당자를 정해 깊게 파볼 계획이었다.


프로젝트를 시작하고 삼일쯤 지났을 무렵, 치수가 커피타임을 청했다. 무슨 좋은 소식이라도 들었는지 싱글벙글한 표정이었다. 이럴 때면 영락없이 대학교 때 모습 그대로인데 회사라는 환경이 어쩔 수 없이 사람을 변하게 하나보다.


“우리 제안발표 때 있던 현대통신 전무 기억나?”


치수는 내가 의자를 꺼내기도 전에 물었다.


“주인창 전무 말이야? 해외 신사업 맡고 있다는.”


주인창 전무는 현대통신에서 최연소 전무 승진을 한 인재였다. 당시 최연우 회장은 공격적으로 해외 진출을 모색했는데 주인창 전무가 그 선봉장이라 할 수 있었다.


“맞아. 그때 주 전무가 이번 프로젝트에서 괜찮은 아이템 나오면 신사업 팀에서 추진할 수도 있다고 했었잖아.”


“어, 그랬지.”


“주인창 전무 밑에 에스랩 (S-Lab)이란 부서가 있더라고.”


“에스랩?”


“올해 신설된 사내벤처 조직이야. 우리 프로젝트 통해서 벤처 아이템을 하나 고를 예정이래. 그 주제로 후속 프로젝트도 띄울 거고 말이야. 내 동기 중에 에스랩으로 간 친구가 있어서 알아봤는데 대상으로 고려하는 프로젝트가 이미 몇 개 있다더라고.”


그러니까 어느 아이템을 맡느냐에 따라 후속 프로젝트 참여 여부가 결정된다는 얘기였다. 치수는 그게 어떤 아이템인지 이미 알고 있을까? 에스랩에서 준비하고 있는 아이템이 뭐지? 


그리고 이걸 나한테 지금 이 시점에 말하는 의도는 뭘 까? 후속 프로젝트로 연결될 아이템을 맡아야 한다고 힌트를 주는 건 가, 아니면 후속 프로젝트는 자신이 맡을 테니 건들지 말라는 선전포고인가? 감히, 자기가 뭐라고. 


후보 아이템이 뭔지 조금 더 물으면 답이 나올 것 같았지만 난 거기서 멈췄다. 치수에게 후보 아이템을 듣는 순간 내가 그 아이템을 맡겠다고 손을 들 수도 안 들 수도 없는 상황이 벌어질 것 같아서였다.


커피를 어떻게 마셨는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시간이 없었다. 난 자리에 돌아오자마자 다른 팀원들이 담당하던 현대통신 내부자료를 검토하기 시작했다. 2시간 후에 내부 미팅이 있을 예정이었는데 서 이사는 그때 인프라별 담당자를 정할 거라 했다. 그전에 후보 아이템에 대한 힌트를 찾아야 했다. 기존 프로젝트 자료를 보면 어딘가에서 힌트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내가 맡았던 자료는 통신 위주 산출물이었는데 모든 자료가 그런 건 아니었다. 전체 자료에 포함된 데이터의 양이나 사업기회의 구체성을 보니 쉽게 답이 나왔다. 에너지 인프라, 특히 전력 인프라 자료가 압도적으로 많았다. 에너지가 핵심이었다.


“에너지는 어느 분이 맡으시겠어요?”


서 이사는 당연히 연차 순으로 선택권을 줘야 한다는 듯 오승일 차장을 바라봤다. 오 차장은 시선을 피했다. 이미 자신의 장점을 살려 ‘통신’을 하겠다고 공공연히 선언한 오 차장이 에너지를 맡겠다고 나설 리 없었다. 


내 시선을 치수를 향했다. 에너지가 핵심이란 건 누구보다 잘 알고 있을 치수였다. 하지만 치수 역시 나서지 않았다. 가만히 있어도 그에게 공이 굴러올 걸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오승일 차장은 통신을 하려 할 거고 허수민 차장은 누가 봐도 업무량이 많아 보이는 에너지를 나서서 맡으려 하진 않을 게 뻔했다. 순서대로 기다리면 그에게 선택권이 주어질 테고 그럼 그는 마지못해 자신이 맡겠다는 듯 에너지 분야를 맡을 것이다. 


예상대로 서 이사는 허 차장 쪽으로 시선을 돌렸으나 허 차장 역시 서 이사의 시선을 피했다. 다음은 치수 차례였다. 기회는 지금 뿐이었다.


“제가 하겠습니다.”


잠시 정적이 흘렀다. 엄연히 연차라는 게 있는 데 감히 네가?라는 분위기였다. 이런 상황이 발생하리란 걸 모르진 않았다. 하지만 그 누구도 나에게 직접 뭐라 할 수 없을 거란 것도 알고 있었다. 그저 잠시 ‘뭐야 이건?’ 하고 스쳐 지나갈 수 있는 상황이었다. 그리고 그런 분위기에 억눌려 치수도 아무 말도 할 수 없을 것이다. 여기서 나를 반박하고 에너지를 자신이 하겠다고 나서기엔 아무런 명분도 없었다.


“아, 세윤 씨가 해보시겠어요? 에너지는 현대통신에서 특히 관심 있게 보는 분야라서 잘해야 하는데...”


대놓고 반대하진 않았지만 서 이사는 내게 단독으로 에너지를 맡기기 못 미더운 눈치였다. 하긴 서 이사와 일하는 것도 처음이고, 서 이사 눈에는 내가 이제 갓 과장으로 진급한 주니어에 불과할 테니 당연한 판단이었는지도 모른다.


“제가 교통 인프라를 하면서 도우면 어떨까요? 교통은 분량도 얼마 안 되고 현대통신이 관심 있어 하는 사업도 아니라 로드가 많이 걸리진 않을 것 같은데요.”


치수가 치고 들어왔다. 예상치 못한 전개였다.


“아, 그래요. 그럼 되겠네요. 윤 과장님이 같이 봐주시면 문제없을 것 같아요.”


‘같이 봐주면’이라니! 뒷골이 당긴다는 표현이 있는데, 딱 그런 기분이었다. 대놓고 화를 낼 수도 없고, 그렇다고 그냥 이렇게 하자니 영 내키지 않았다. 치수와 나 사이를 한 번도 상하관계로 느껴보지 않았는데 서 이사의 말 한마디로 서열은 명확해져 버렸다. 업무만큼은 내가 더 잘할 자신 있었는데 그런 건 전혀 의미 없게 돼버렸다. 


제안서를 쓰면서 오 차장과 다퉜을 때부터 이미 꼬였다. 오 차장과 내 언쟁을 중재한 치수가 점수를 따고 들어간 것이다. 머리가 쑤셔오며 앞으로 일이 걱정됐다.


결국 내가 에너지를 맡게 되긴 했지만 찜찜한 기분을 피할 수 없었다. 치수 역시 내 사수처럼 포지션 된 게 마음에 걸렸는지 행동에 신경을 쓰긴 했다. 서 이사가 에너지 인프라 관련된 질문을 할 때면 나에게 직접 질문을 돌렸고, 보고나 자료리뷰를 할 때도 본인은 뒤로 빠져 내가 치고 나갈 수 있도록 해줬다. 


하지만 배려라곤 할 수 없었다. 그로선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을 것이다. 내가 콘텐츠를 잡고 그가 끼어들 틈을 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와중에도 치수는 에스랩에 있다는 친구에게 들었다는 핑계를 대며 이런 사업 아이템을 추가해라, 저 사업 아이템은 가능성이 낮으니 언급만 하는 정도로 끝내라 하며 시어머니 노릇을 했다. 틀린 말은 아니라 가만히 있었지만 원래 내가 생각했던 방향이라도 치수가 그쪽으로 손짓을 하면 괜히 머리가 지끈거렸다. 그렇게 우리의 불편한 동거는 한동안 지속됐다.


“중간보고는 발표자를 제한해 달라고 하네요. 3명 정도가 맥스일 것 같아요. 제가 앞단에서 인텔리전트 시티 개요와 프레임워크를 커버하고, 오 차장님이 통신하고 환경 쪽 발표해 주시고, 윤 과장님이 에너지와 교통 쪽 발표해 주시면 어떨지 싶은데요.”


현대통신 팀과 미팅을 마치고 돌아온 서 이사가 말했다. 이건 또 무슨 청천벽력이란 말인가! 컨설팅에선 발표가 전부다. 발표자가 책임자고 담당자다. 발표를 한다는 건 콘텐츠를 소유하는 거다. 지난 한 달간 내 뇌를 혹사시키고 산고를 겪으며 만들어낸 자료를 치수가 발표하는 꼴을 쳐다봐야 하다니! 하지만 치수를 건너뛰고 내가 발표할 명분은 없었다. 내 자식 같은 자료를 치수에게 거저 넘겨야 하는 상황이 돼버렸다.


두 가지 옵션이 있었다. 하나는 팩트 중심으로 자료만 취합해 치수에게 넘기는 거다. 자료에 대한 판단과 메시지는 치수에게 맡기고 말이다. 자료 분석과 해석에 들인 시간이 아깝긴 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다른 방법은 에너지 쪽 사업 아이템이 어떻게든 돋보이도록 치수에게 힘껏 조력하는 것이다. 빛나는 건 치수겠지만 최소한 에너지 사업이 아이템으로 선정되면 담당자인 나로서도 좋은 일이었다. 관건은 전력 인프라 관련 5대 사업 기회를 집대성한 한 장의 장표를 치수에게 공개하느냐였다.

5대 사업기회는 시장관점의 사업기회와 현대통신의 역량을 최대한 고려해 도출한 핵심사업기회였다. 제주도 실증단지에서 실제로 구현할 수 있는 아이템들이기도 했다. 


이 중 내가 가장 눈여겨보던 사업은 3번 스마트홈 에너지 관리 사업과 5번 전기차 충전 인프라 사업이었다. 스마트홈 에너지 관리 사업은 난방, 공조 시스템 등을 통제해 댁내 에너지 사용량을 최적화시켜주는 서비스다. 스마트 실내 온도계나 미세먼지 측정기 같은 소형 디바이스와 디바이스의 실시간 통제 및 자동화를 설정하는 앱 서비스가 결합된 형태로 소비자의 에너지 사용형태를 가장 직접적으로 모니터링할 수 있는 서비스이기도 했다. 


5번 전기차 충전 인프라는 향후 10년간 빠르게 성장할 대규모 인프라 사업이었다. 현대통신의 역량은 부족하지만 규모는 가장 커 무시할 수 없었다. 관건은 자동차 산업 경험이 전무한 현대통신이 어떻게 경쟁력을 확보하느냐였다.


자료 정리가 끝나갈 무렵, 치수에게 메시지가 왔다. 발표 준비를 위해 콘텐츠를 공유해달라는 거였다. 나는 사업기회 장표가 포함된 자료와 제외된 자료 사이를 오가며 머릿속으로 이런저런 시나리오를 돌렸다. 


치수가 자료를 발표한다고 해서 내 아이템이 치수 아이템 되는 건 아닐 거다. 사업기회로 내 아이템이 선정되는 게 우선 아니겠는가? 발표 당일, 그 잠깐 순간동안 치수가 빛난다 해서 내게 해가 될 건 없었다. 이메일 첨부파일을 수십 번 바꿨고, ‘전송’ 버튼 위로 마우스를 수 없이 갖다 댔다. 에이, 모르겠다. 위험부담이 있더라도 아이템 채택이 최우선이었다. 숨을 크게 한번 들이킨 나는 주저 없이 전송 버튼을 눌렀다.


치수는 슬라이드를 한 장씩 보며 꼼꼼히 내용을 물어봤다. 시장 사이즈 자료는 어디서 난 거냐, 이 사업 기회는 어떻게 도출된 거냐. 치수의 질문이 이어질수록 내 머릿속 가득한 지식이 치수에게 빠져나가는 기분이었다. 나는 내 피 같은 지식을 잠재적 경쟁자에게 수혈하고 있었다. 


어느 정도는 내 몫으로 남겨놓고 싶었는데 치수는 남은 한 방울의 피까지 흡수하겠다는 듯 집요하게 물어보고 또 물어봤다. 역시 마냥 친구라서 인정했던 놈은 아니었다. 그의 질문은 날카로웠고 핵심을 제대로 겨냥했다. 특히 마지막 사업기회 장표에선 각 사업기회를 어떻게 구체화할 건지 중간보고 이후 진행될 작업에 대해서 까지 캐물었다. 


3시간 남짓 내용을 전달해 준 나는 마공에 기를 빨린 듯 살과 뼈가 달라붙은 초췌한 몰골로 회의실을 나왔다. 이제 치수는 내가 아는 모든 걸 알고 있었고, 나는 소모품처럼 소비돼 버렸다. 내 아이템이 채택될 수 있다면 기꺼이 감내해야 할 고초였다.


“엄청 공들여 작업했네. 내가 잘 살려야 하는데 말이야. 수고 많았다.”


치수는 내 어깨를 툭 치며 말했다.


“어, 그래. 보고 더 궁금한 거 있으면 물어봐.”


“아니, 이 정도면 된 것 같아. 몇 군데 수정 좀 하고 공유해 줄게.”


발표자가 최종적으로 자료를 수정하는 건 일상적인 일이었지만 기분이 다시 나빠졌다. 젠장. 내 자료가 부족하다는 거야!


곁눈질로 보니 치수는 누구와 그렇게 얘길 하는지 신규 메시지로 번쩍 거리는 메신저 창과 파워포인트 사이를 오가며 부산히 키보드를 두드려 댔다. 어딜 어떻게 수정하는지 실수라도 하면 바로 반박해 주겠다 벼르고 있는데 치수는 어디선가 전화를 받고 그대로 퇴근해 버렸다. 수정한 자료는 보여주지도 않고 말이다. 


내가 가지고 있던 모든 지식은 치수에게 전달된 반면, 난 치수가 어떤 생각으로 어느 부분을 수정했는지 전혀 몰랐다. 그 차이 만으로 에너지 분야의 주도권은 치수에게 넘어가버린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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